니케아회의 시대 (313-590년)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즉위에서부터 590년 마지막 라틴 교부이자 초대 로마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 때까지를 니케아회의 시대라고 부른다.
1.서론 : 이 시대의 특징
이 기간은 기독교 로마 제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니케아 회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자처럼 부르는 이유는 최초의 세계적인 종교 대회인 니케아 회의가 그 기간 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시대에 와서 성숙되고 안정되어 통일된 하나의 제도적 종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의 장래를 위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점도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점도 있다. 이 시대가 끝나면 중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중세 이래로 새로이 유럽의 주인공이 될 게르만 민족의 개종은 벌써 이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1.기독교 신앙이 자유를 얻음
325년은 교부시대 제 3기의 시작이며 총주교와 그리스도인 황제 시대가 열린 때이다. 이 기간에는 한 사람(배교자 줄리안)을 빼고는 모든 로마 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옹호했다. 이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를 니케아시대, 325년 이후부터 590년까지는 後니케아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후 313년부터 590년까지를 니케아시대라고 한다.
2.교리의 논쟁이 심화됨
이 기간은 오랫동안 계속 되던 박해의 시기가 끝난 시기였다. 박해시대 25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언제 새로운 박해의 선풍이 일어날지 몰라 늘 불안한 상태로 살고 있었다. 따라서 박해 중에는 (신학은 별로 없고) 오직 신앙만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면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적 활동이 양지에서 행해지게 되었고 교회의 일도 많아지고 규모가 커졌다. 그러자 자연히 교리 논의가 왕성해지고 신학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다.
3.세계 대회가 열림
교리와 신앙적 관심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자 교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대회를 소집했고 그 가운데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거의 제정되었다. 삼위일체 교리 논쟁과 니케아 회의, 그리스도의 二性 논쟁과 콘스탄티노플 회의, 그리스도의 인격 교리 논쟁과 에베소 회의, 그리스도의 일성론 교리 논쟁과 칼케돈 회의, 그후의 一意論 논쟁과 콘스탄티노플 회의 등이 그런 회의이다.
교회 정치 분야에는 {암브로시우스}이 유명하고, 설교가로는 {크리소스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유명하다.
4.교권이 증진됨
당시 로마 제국의 힘은 쇠해지고 북방 야만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제국이 쇠해지고 정치력이 쇠해질수록 복음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교회 지도자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졌고, 특히 로마 주교(교황)의 세력이 강대해져 교회는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국교가 되고 관직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5.수도원의 발전
이렇게 되자 교회는 현저하게 세속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주의, 은둔주의가 성행하여 수도원이 생겼다.
2.콘스탄티누스 대제
1.콘스탄티누스 대제 略史
콘스탄티누스는 288년 나이시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서부지역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였으며 어머니 헬레나는 경건한 여인으로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소년 시절부터 전투에 참가하며 용맹한 군인으로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로마의 서부지역에는 황제를 자칭하는 자가 6명이나 나타났는데 클로루스 직전의 서부지역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와 싸워 이기고 313년 밀라노에서 동부지역 황제인 리키니우스와도 만났다.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그의 누이를 왕후로 주었고 두 황제는 함께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후에 동부지역 황제 리키니우스가 이교의 편을 들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반대하고 스스로 기독교의 옹호자로 나서서 323년 리키니우스와 싸웠다. 여기서 이김으로써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 전체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337년 65세 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죽었다.
2.기독교를 옹호하게 된 동기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믿을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위안 다리에서 전투를 할 때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본 경험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위에는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는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그날 밤 잘 때 꿈을 꾸었는데 이때 주님이 나타나서 낮에 본 것과 같은 십자가를 보이면서 이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군기장(軍旗章)으로 삼으라는 말씀을 했다. 그가 그대로 했더니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기독교에 대해 배우고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온 후에도 죽을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것은 세례 후 다시 범죄하면 다시 속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업적
1.기독교 지지와 보호
콘스탄티누스는 스스로를 기독교의 옹호자요 보호자로 자처했으며 또 자신은 기독교회의 외부적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는 궁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도 했고 기독교 학자들이나 전도자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교리 논쟁이 심해지자 이단을 제거하고 교회를 통일하고 교회의 연합을 유지시키기 위해 국비로 니케아 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단지 기독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교로 채택한 기독교가 분열되면 로마 제국 전체의 안녕과 평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2.법적 뒷받침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위해 여러 국법들을 개정하였다. 십자가 형벌을 폐지하고 검투를 금지시키고 축첩과 간음을 엄중히 금하며 이혼을 제한시켰다. 또 여자들도 토지 외의 재산은 소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켰고 죄인의 이마에 화인을 찍는 습관도 금지시켰다. 또 교회법을 국법과 마찬가지로 인정하며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해 교직자가 내린 결정은 국가가 그 효력을 공인하였다. 교회의 대회의(大會議)의 판결은 그대로 로마 제국의 국법이 되었다. 또한 교회 건물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피난처)가 되었고 죄인은 그곳에 피함으로써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또 죄인을 위하여 사죄와 감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교직자에게 주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일요일을 지키게 하는 법을 제정하여 이 날에는 법정을 닫고 시골에서의 농업 외의 모든 영업을 금지하고 군대의 훈련도 쉬게 하였다. 교직자는 병역과 세금 부담을 면제해 주었다. 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 시에 몰수된 건물과 토지를 돌려주기 위해 교회재산관리법을 제정하고, 교회에 내는 기부금을 공인해 주었다. 이밖에 기독교 외의 종교에 대해 박해하지는 않았으나 잔혹하고 불결한 행동과 제사 및 우상 숭배는 금했다.
3.천도(遷都)
콘스탄티누스는 332년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다. 그것은 동유럽의 야만인과 페르시아인을 제어하는 목적과 아울러 이교적 전설과 흔적이 적은 기독교적 새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기독교를 옹호한 왕으로서의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는 권력의 증대와 함께 허영심과 점차 교만과 자기 만족에 빠져갔다. 그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왕위에 대한 집착에 빠진 나머지 자기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이유로 그의 처와 장남을 처형하고 조카까지 살해한 잔인한 행동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세 아들,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와 차남 콘스탄스 및 삼남 콘스탄티우스가 로마 제국을 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과 살인, 음모로 자신의 왕위의 안전을 도모했으나 장남은 340년 동생 콘스탄스와 싸우다 죽고, 콘스탄스도 350년 프랑크인 마그넨티우스와 싸우다 죽었다. 그 후에 동방 지역 왕이던 3남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를 멸하고 로마를 통일하여 353년부터 혼자 황제로 있다가 361년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사촌 '배교자 줄리안'이 왕위에 올라 18개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짧은 기간동안 기독교를 제어하려고 애썼지만 곧 죽고 말았다. 줄리안이 로마를 다스린 뒤에 얼마 동안은 그리스도인 황제들이 동방과 서방을 아울러 다스렸다. 이들은 처음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채택한 종교 관용 정책을 썼다. 그러나 황제의 후계자들은 차츰 안으로는 이단자를 박해하고 밖으로 이교도들을 박해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쓰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 때 이교 억압이 가장 심했다. 그가 죽은 후에 로마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져 각기 황제가 있게 되었다.
3.니케아(Nicaea) 회의 : 1차 세계 교회회의
1.날짜와 소집자
니케아 회의는 기독교회의 세계 대회의 효시였다. 이 회의는 당시의 최대 사건일 뿐 아니라 기독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회의가 교리 대 교리의 싸움을 처리하기 위해 열린 회의가 아니라 기독교 진리 대 사이비 거짓 진리의 싸움을 처리하기 위해 열린 회의였기 때문이다. 니케아 회의는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70킬로 정도 떨어진 소아시아의 작은 동네 니케아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했으며 여기에는 각처에서 300명 정도의 감독이 참석했다.
거기 참석한 감독의 대부분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 언어(동방은 헬라어, 서방은 라틴어)가 다르고 거리가 먼 서방에서는 감독들이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회원들 중에는 로마 제국의 박해 당시에 입은 고난의 흔적이 없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회의는 5월에 시작하여 7월까지 42일동안 계속되었다.
2.소집 방법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각지 감독에게 안내장을 보냈는데 통지를 받은 각지의 감독은 장로 2명,수행원 3명을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를 위해 나라에서는 교통의 편의를 도모해 주고 여비와 체제비 및 회의 진행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국고에서 부담했다.
3.소집 동기
(1) 부활절 일자의 조정 문제 : 동방에서 지키는 부활절과 서방에서 지키는 부활절의 일치를 보기 위해서 모였다. 동방에서는 부활절을, 서방에서는 주일을 중심으로 날짜를 정하고 있었다.
(2) 더 중요한 동기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아리우스(Arius) 논쟁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논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신학의 싸움터가 되고 혼란이 일어나게 될 우려가 높았다. 이를 그대로 두면 교회의 통일성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서 로마 제국도 분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어떻게든 그것을 조정하고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4.아리우스
아리우스(Arius)는 리비아 출신으로서 루키아누스(Lucianus)에게 사사했다. 루키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성경 해석에 통달한 인물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에 대항하여서 삼위일체론을 부정하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낳은 존재이며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창조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한 루키아누스의 제자인 아리우스는 스승의 원리에 찬동하였고 오리겐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가 되었으며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금욕 생활을 통해 추종자가 많았다.
1.아리우스의 학설 (그리스도관)
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그는 참 신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성질을 가진 분도, 같은 格을 가진 분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받아서 세계 창조의 중재자가 된 '사람'일 뿐이다. 그는 시작이 있는 존재이다.
②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로서 人性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선한 사람이다.
③ 그리스도가 악을 택하셨다면 악을 행할 수 있었지만 그가 선을 택했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아들로 인정되었다.
2.논쟁의 발단
①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은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드로스가 삼위일체의 顯現을 세밀하게 가르지고 있을 때 장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사벨리우스적이라고 공격함으로 일어났다.
아리우스는 신의 통일성과 자기 충족의 존재(하나님은 한 분으로 족함)를 강조했고 피조자이신 예수는 신의 본질과는 달리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무(無)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또 예수는 비록 첫 피조물이요 세계 창조의 대리자이지만 영원하지는 못하다고 했으며 신에게는 시작이 없으나 아들에게는 시작이 있다고 했다. 또 예수님은 그 본질상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다르고 신보다 조금 낮은 존재라고 했다. 또 예수님은 성육신(成肉身) 때 로고스가 인체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성령이 결합된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감독은 아들은 영원하시고 아버지의 본질과 같으시며 절대로 피조자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아리우스와 정면 충돌했다.
② 논쟁이 격화되자 교회는 32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방 대회를 열고 아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애굽 감독들을 파면했다.
③ 그러자 아리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각지로 다니면서 반대 연설을 하고 지지자들을 많이 얻어내었다. 당시 유명한 니코메디아 감독의 유세비우스도 이에 합세했다.
④ 이리하여 동방에는 아리우스 설이 일반적으로 유포되게 되었다.
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정복하고 동서 패권을 잡았을 때 동서 교회가 이처럼 어지러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느껴서 그의 교회 고문인 스페인의 코르도바 감독 호시우스(Hosius)에게 친서를 주어 알렉산드리아에 특파하여 '무익한 논쟁을 피하고 화해하라'고 권고했으나 성공치 못하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게 된 것이다.
5.참석자들의 형편
(1) 유세비우스는 참석자의 수가 250명이라 하고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계산한 회의 일수의 차이 때문인 듯 하다. 서방에서는 거리가 멀고 헬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단 10명만 참석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박해 때문에 눈멀고, 양손이 불구가 되고, 갖은 악행을 겪은 자들이 많이 있었다.
(2) 모인 회원들은 세 파로 나누어졌다.
① 아리우스파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비롯하여 니케아, 칼케돈, 에베소 감독이 이 파에 속했다. 아리우스도 장로로 참석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한 파벌의 대표로서 싸울 역량과 품격을 갖춘 인물은 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처음에는 그를 보호하다가 후에는 그의 겁 많음을 책망했다.
② 중립파 - 대다수는 여기에 속했는 교회사의 시조로 유명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논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③ 정통파 - 소수였지만 유력한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감독, 코르도바의 호시우스 감독, 회의의 대세를 지배하게 될 인물이며 알렉산드로스의 수행원으로 참석한 아타나시우스가 이 파에 속해 있었다.
6.회의
회의는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연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의장은 유세비우스나 호시우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신조 초안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자기 교회에서 지금껏 사용한 것으로서 이것으로 중립적인 화해의 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회의의 격렬한 논쟁의 논점은 그리스도가 동일 본질(homoousios)인가 아니면 유사 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에 귀착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추상적인 사변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 구원의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그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요지는 하나님과 인간을 결합시킬 수 있으려면 그 중재자는 피조물로는 안되며 반드시 하나님이라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교부들은 아들인 하나님의 신성을 천지 창조에 관여하는 측면에서만 설명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의 합리적인 발언은 회의의 대세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결국 정통파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논쟁은 정통파의 승리로 끝났다.
7.결의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초안은 수정되고 토론은 종결되었다. 이는 곧 아리우스설의 부정(否定)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의장은 일어서서 신앙고백을 낭복할 것으로 선언하고 유명한 니케아 신조는 낭독되어 출석한 사람들이 거기 기명하게 되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하루 생각하고 서명했고,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이 문서에 동의치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마지막 문귀를 삭제하고 서명했다. 이집트의 감독 데오나스와 세쿤두스는 기명을 거절하였으므로 아리우스와 함께 일루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은 이단에 대해 형법의 처분을 내린 최초의 실례였다.
니케아 회의는 그 후 사도행전과 십계명에 기준하여 교회 정치에 관한 규정 제20조를 제정하고, 부활절은 유월절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주일을 기준으로 삼아 주일에 지키기로 했다. 모든 의식이 끝난 325년 7월 29일은 황제 즉위 20주년 기념일이었으므로 참석자 전원이 초대되어 잔치를 벌인 후 폐회되었다.
8.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사상 비교
아리우스 / 아타나시우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 유사함 / 동질임
아들의 신성 : 반신성(半神性) / 완전한 하나님
아들의 인성 : 특별히 주장 / 완전한 사람
아들의 창조 : 무로부터 창조 / 영원히 낳으심
아들의 영혼 : 영혼이 없음 / 로고스가 영혼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