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 속사도 시대(100-313년) [2]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0.이단과 분파들

1.이단들

교회는 초기에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받았고 2세기부터는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각종 이단 종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런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복음을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해하고 곡해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 종파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복음을 유대교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엘카이파가 다 그러했으며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역시 그런 경향을 나타내었다.

1.에비온파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2.엘카이파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3.그노시스파

그노시스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하는데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여러 가지 세상 종교적 신비적 요소들 곧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마술,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의 신화들과 여러 가지 다른 철학들과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물에다 애매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일종의 새로운 종교 철학이었다.

그들은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하였으며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하여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과 부활 등의 실재를 부정했다. 대속자에게 있는 인간적 요소는 단지 사람을 속이는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금욕과 방랑생활을 좋게 여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 속에서도 위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물질적인 것은 악하므로 순수한 쾌락마저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우선적인 문제는 이 우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어찌하여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의 해석 문제였는데 특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구원과 헬라 철학의 발출설(發出說), 동양과 헬라의 이원설(二元說)을 채택하여 계통있는 사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공통적 사상을 보면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이온(Aeon ; 영원히 존재하는 자)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은 아이온의 최하급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인간들인데 이들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사탄과 자신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정신적(psychics) 인간들인데 이들은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선행으로 세상의 중간층까지만 간다. 셋째, 영적(pneumatic) 인간인데 이들은 특수계층에 속하며 참 지식(gnosis)을 가졌으며 그 지식으로 신앙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4.마니교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은 동방에 있으며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종교인데 서방으로 퍼짐에 따라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 시조는 마니(216-276)인데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서 젊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반대자들로부터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과의 싸움이며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여 생긴 것으로 본다. 사람은 빛을 이 흑암 속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解脫)의 방법은 육체를 정복하여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마니교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과 혼인과 망령된 말을 금했는데 이 점에서는 불교와 비슷하다. 마니교의 최고의 덕목은 세 가지를 인봉(印封)하는 데 있다. 첫째는 입의 인봉인데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 인봉은 손의 인봉인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봉은 가슴의 인봉으로 정욕과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는 초기의 기독교와 유사하거나 더 질서정연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니 밑에 12사도가 있고 그 밑에 70인의 감독이 있었으며 그 밑에 교사들이 있었고 또 그 밑에는 행자(行者)가 있었는데 행자 중에는 택한 자와 듣는 자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택한 자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마니교는 동서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 이르렀고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어거스틴도 젊을 때 8년간이나 마니교에 탐닉한 적이 있다.

 

2.교회의 분파들

1.몬타누스파

몬타누스파는 교회가 영지주의 등 이단들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사도들의 타계로 인해 그러한 교회들을 굳게 할만한 사람들도 적어지고 게다가 초대교회를 특징지웠던 성령의 충만과 놀라운 은사들도 적어지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이때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예언들도 의심받게 되었다.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초기의 영적 생명력은 결핍되고 경직성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몬타누스파는 이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반발(반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156년 프리기아의 몬투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후에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분리되었다.

몬타누스파가 주장하는 진리(교리)는 거의 당시 카톨릭 교회와 같았으며 소위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특별한 주장을 하는 것이 없었다. 성경의 모든 책을 다 정경으로 인정하고 전통적인 신앙 고백들을 다 굳게 지켰다. 그들은 뿌리를 정통 기독교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노시스파와 그밖의 여러 가지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 내의 진보적 사상들을 막고 초대 기독교를 부흥시키려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생겨난 것이었다.

몬타누스파는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특히 반대하였으며 엄격한 규율을 실시하여 교회의 규율 문란으로 인한 신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예수께서 속히 오셔서 천년왕국을 건설하시리라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 계급제도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교사와 교역자의 자격과 임명은 안수나 감독의 임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직접 맡겨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주의(萬人祭司長主義) 원리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몬타누스파이다.

또 이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하여 금욕과 고행을 장려하였으며, 재혼을 금하였다. 여자의 사치스런 의복을 금하고 처녀는 너울을 쓰도록 하였다. 또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두 번째 회개(세례 후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박해 때 숨는다든지 도망하는 것을 정죄하며 변절했던 사람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 세례를 칭송함으로써 장려했다.

2.노바티아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가 생긴 것은 디키우스 황제(249-251)의 심한 박해 때 교회 안에 많은 변절자들이 생겨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해가 지난 뒤 변절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로마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대부분의 로마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한 서방 교회의 감독들과 동방 교회 감독들은 변절자들에 대해 관대히 대했다. 그러나 노바티아누스는 이들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다툼이 생기게 되어 노바티우스는 한 분파를 세우게 되었다. 로마 감독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후 노바티아누스를 파면하고, 변절자들을 적당히 회개시키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노바티안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을 배반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로서 이 세상에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범죄자는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밖에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살인, 음행 등의 죄도 중죄로 간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혼도 실질적 간음으로 보았다. 교회들은 이들을 분파주의로 정죄하고 그들의 행위가 교회의 질서를 문란시키고 분열을 일으켰으며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과 기존 교회들 사이에 생긴 간격으로 파문을 당하고 분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였으나 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카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카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카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몬타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 노바티아누스, 도나투스 같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이나 말썽꾼들이 아니며 교회가 바른 길로 나아갈 것을 염원하며 그렇게 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행동 원칙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탁월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언제나 개인주의적 편협함과 고집, 완고함 등이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종종 광신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그들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이들이 보다 폭넓고 명철한 판단을 하여 개혁을 균형 있게 진행했더라면 오류들은 줄어들었을 것이며 그들의 활동은 교회 생활과 신앙 사상의 개혁과 발전에 훨씬 더 큰 유익을 남겼을 것이다.

 

 

11.성경의 편집과 신경(信經)의 작성

1.신약 성경의 편집

최초의 복음서는 적어도 주후 60년 경에 가서야 쓰여졌다. 이 기간을 전후로 하여 바울의 서신들이 기록되었고 그보다 후에 요한이나 기타 사람들의 서신들이 기록되었다. 1세기 말엽에 가서 바울의 서신들이 최초로 한 데 모아졌다. 2세기 중엽에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모아졌다. 요한복음은 얼마 있다가 공인을 받았다.

오늘날의 신약 성경은 속사도 시대 동안 편집되고 확정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 의하면 일요일의 모임 때 예수님의 언행을 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복음서였을 것이다. 유스티누스의 제자 타티아누스가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한 줄기의 전기로 만들어서 {데아테사론}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160년 전후의 일이다. 사도의 서신을 복음서와 같이 성경의 일부로 취급한 최초의 사람은 그노시스파의 마르키온이다. 마르키온은 주후 140년 경에 최초의 정경 목록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완전치 못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중 10개만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키온은 그의 잘못된 사상 때문에 구약 성경을 일절 배척하고 성경을 오직 복음서와 사도 서신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처럼 마르키온의 정경 형성 작업은 그노시스파가 사도들의 이름을 붙인 자기들의 복음서와 묵시록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올바른 정경 형성 작업을 촉구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와 함께 몬타누스파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소위 '새로운 계시'의 등장도 정경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말에는 소위 사도들의 '행전'들이라는 책이 몇 가지 나왔는데 여기에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사도들의 선교 활동 내용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빌라도의 생애에 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몇 가지 복음서들도 나왔다. 이런 책들은 기독교 소설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특히 이런 책들은 가현설자나 결혼을 거부하는 주장을 하는 일부 이단들의 주장을 널리 퍼트리는데 기여했다.

2세기 말에 기독교 저술가들은 교회가 공인한 책을 모두 밝힐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오직 네 권의 복음서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무라토리 단편}으로 알려진 최초의 정경 목록은 일반적으로 주후 200년 경 로마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740년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토리가 밀라노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인데 첫 부분은 분실되었으나 남은 부분에는 네 권의 복음서와 바울의 13개의 서신서들 및 사도행전과 요한의 두 서신,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공인이 유보된 베드로 묵시록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전후서와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삼서는 빠져 있었다. 1세기의 교부 로마의 클레멘트는 이미 히브리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페시토라는 성경도 있는데 2 세기 중엽 이전에 에뎃사에서 만들어진 시리아역 신약 성경이다. 그 안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의 13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요한1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요한2,3서가 추가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를 인용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빌레몬서, 요한2,3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 시대 즉 150년 경에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을 합한 신약 성경이라는 것이 일반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는 이미 그것이 있었다. 지금의 신약 성경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히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2세기 말 경에는 오늘날 신약 성경에 수록된 문서의 대부분이 이미 성경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에 아직도 성경으로 승인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이었다.

3세기 초까지 정경의 주요 목록에 대해 전교회적인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몇 권의 책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방교회는 히브리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몬타누스파가 장을 배교자들의 회심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요한계시록은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책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론을 반대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4세기 초까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된 책은 베드로후서, 요한2서와 3서, 유다서였다. 요한계시록도 어떤 사람들에게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결국 367년에 신약 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정경에 들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신앙 문서로 평가된 {디다케(열두 사도의 교훈집)}와 {헤르마스의 목자서}는 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허용되었다. 정경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유익한 글로 인정된 또 다른 책은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이다. 그밖에 시리아 교회는 수 세기 동안 타티안의 {디아테사론(사복음서의 기사를 한 권으로 간추려 놓은 책)}을 네 권의 분리된 복음서 대신 사용했다. 후에 시리아 교회는 요한계시록을 거절하였고 히브리서 등 공동 서신들의 권위를 낮게 평가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모든 책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 정경이 확정되고 공인된 것은 393년의 힙포 공의회와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였다.

2.사도신경의 형성

교회가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 종파들과 투쟁하는 동안 교회에는 세 가지 산물이 형성되었는데 첫째는 신경이고 둘째는 교회법, 셋째는 조직이다. 이 중 신경(信經;Creed)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교훈을 집약하여 하나의 신앙고백 형태로 만든 것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회 복음의 유일성을 의미하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적 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유력한 설은, 초대 교회 당시 세례식을 거행할 때 세례주는 사람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이것을 받는 수세(受洗) 후보자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고백이 점점 일정한 형식으로 되어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과는 같지 않은 듯하다. 그후 교회에 아리우스,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이 일어남으로써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구를 넣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전문(全文)이 완성된 듯하다.

 

12.로마 교회

2세기 말 교회에서 나타난 현저한 두 가지 현상은 첫째, 지역 교회에서 성직제도가 거의 확립되어 감독(주교, 목사)의 역할과 권위가 다른 신자들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것이고, 둘째, 다른 지역 교회들에 비해 로마 교회의 역할과 권위가 크게 신장된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나 폴리갑은 그런 감독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이제 교회의 여러 은사자(직분자) 중 하나가 아니라 초대교회 때 성령께서 담당하셨던 역할을 대신할 정도의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말하기를 "감독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지역교회에서 감독이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처럼 로마교회도 다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이런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온 세상 모든 교회의 감독과 같은 위치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회의 비중이 이렇게 커진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거기서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로서 실제로 모든 면에서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큰 교회였지만 100년 경에 이르러서는 로마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93-97년에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형이 아우에게 말하는 어조로 고린도교회의 순종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로마교회는 부유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자선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교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2 유대전쟁(135년)이 일어나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된 후에는 세상 어디에도 로마와 지도권을 다툴 교회는 없게 되었다. 로마는 영지주의, 몬타누스파와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서 사도신경과 신약 정경이 결정되었을 뿐 아니라 서방에서는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교회가 로마교회 뿐이었기 때문에 이단에 반대하는 모든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지도를 바랐다. 이레니우스는 185년에 쓴 그의 글에서 모든 교회는 베드로와 바울이 세운 로마 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초기의 교부들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로마교회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른 교회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교회라고 믿었다.

로마교회가 왕성할 때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약해졌다. 2세기에는 소아시아, 시리아가 제국 판도 내에서 가장 기독교화 되어 에베소, 안디옥이 유수한 기독교 중심지였다.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들 간에 부활절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 교회의 주장은 소아시아 교회들의 주장을 이기고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에서조차 로마 교회의 위상은 견고하게 되었다. 유대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지도력 쇠퇴와 2세기 안디옥 교회 및 소아시아 교회들의 쇠퇴로 말미암아 200년 경의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감독들 중 가장 우월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로마의 감독은 교황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3세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큰 우위를 나타내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나 카르타고 같은 북아프리카의 도시들도 제국의 수도 교회인 로마 교회의 지도권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13.속사도시대의 생활상

이 시대에 이르러 성경과 신조가 교회의 내부적 통일의 핵심이 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정치는 점점 조직화되게 되었다. 유능한 지도자와 경제적 풍부함을 지닌 대도시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이들 대도시 교회들은 많은 신자들을 갖게 되었다. 또 이 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구원의 구심점으로써 확고히 그 위치를 세우게 되어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감독의 권위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감독과 장로가 일반 신자와 다르다는 사상이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감독이 권력이 커지게 되었으며 모든 힘이 감독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를 대표하는 지위에 섰으며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특히 박해 시기에는 흔들리는 신자들과 교회를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리하여 점차 감독은 사도의 직분과 권위의 후계자라는 사상이 발달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는 감독에 의하여 설립되어야 하고 감독 없이는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당시 이미 감독이 교회의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의 세계적인 대 회의는 없었다. 다만 각 지방의 대회는 있었는데 3세기 들어서서 도시를 중심으로 지방 대회가 열렸다. 카르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에서 지방 대회가 열렸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에만도 미디아, 알렉산드리아, 스페인의 엘베리스, 고올의 아를르에서 대회가 소집되었다.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해서는 직원도 필요하였다. 속사도시대 초기에는 감독과 장로가 직제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감독은 공식적으로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며, 장로는 감독이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나 회중들 앞에서 동의를 얻어 감독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점점 교회 조직이 정비되어 감독 1명에 여러 명의 장로로 구성된 장로단(長老團) 또는 수십 명의 집사로 구성된 집사국(執事局)이 있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3세기 후반에 와서는 이 조직이 더 세분화되어 안수직(按手職)인 감독과 장로단 그리고 비안수직인 집사 외에도 이들을 보조하는 하급의 직분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부(副)집사, 시송악사(詩誦樂士), 귀신쫓는 자, 성경낭독자, 회당지기, 노래하는 사람 등이었다. 감독은 지방 교회 평신도들이 선거로 선출하였고 3명의 인근 감독이 안수하였다. 장로와 집사는 교회와 교직자들이 선출하였는데 감독이 안수하였다.

1세기 말에 처음 시작되어 2세기와 3세기를 거치면서 키프리아누스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발달한 감독제도는 차츰 세력이 커지고 통일화되어 드디어는 세계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 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황 정치에 있어서는 감독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그 중에서도 특히 로마 감독 곧 교황은 다른 모든 감독들보다 우위에 서며 오류가 없는 절대자라고 주장되었다.

로마 각 주의 대감독구 도시의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이것은 교직제도를 세우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감독(Archbishop)이란 말은 이런 특별한 대도시에 있는 감독들에게 일찍부터 쓰였던 것인데 나중에는 이것을 대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대감독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에 있었으며 얼마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도 대감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감독은 교회 정치의 수반으로서 행정을 관리하였고 집회와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설교를 하였고 종교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장로는 일반적으로 예배에 관련된 일들을 관리하였고, 안수례를 행하였으며 신자들을 교육하였고, 종교 회의에서 감독의 상담 역할을 맡아 행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집회는 초기에는 개인 집에서 모이거나 셋집, 혹은 회당 등에서 모였으나 세기에 이르면서부터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서 가졌다. 회당은 직사각형 모양의 본당과 강단을 갖추었다. 모임은 주일(일요일) 집회(예배) 외에 주간 중에도 모였다. 집회에서는 사도들의 언행록과 선지자들의 글을 비롯한 성경을 읽었고 다 읽고 나면 회장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을 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있었으며 성찬도 매주 행했던 것 같다. 자원에 의해 바쳐진 헌금은 보관하였다가 고아와 과부, 병들어 곤궁한 자, 옥에 갇힌 자, 나그네와 유랑민 등을 구제하는 데 쓰여졌다. 일요일에 모임을 가진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날(첫날)이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기 때문이다.

찬송가로는 시편과 장, -2:29, 등을 불렀다. 더러는 찬송가는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찬송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지은 것이다. 설교는 처음에는 단순하였으나 갈수록 정교하고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말하는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설교를 통해서 생활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과 아울러 (거짓 사상과 이단들의 발호로 인해) 성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설교가 웅변적이고 교리적이며 짜임새 있는 글처럼 되어갔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예전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세례 외에도 각종 절기를 지켰다. 세례의 경우 세례 받으려는 사람에게 기도와 금식,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을 치며 2년간 준비 기간을 가지게 했다. 세례는 주로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침례를 행했다. 세례는 축일에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부활절 전날 밤에 많이 행했다. 또 찬성과 반대 양론 속에서 유아 세례도 실시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출생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베풀 것을 권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린 아이의 세례에 반대하여 성장 후로 미룰 것을 권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전반적으로 유아 세례를 시행했다.

절기 중 큰 절기로는 부활절이 있었는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날짜가 달랐다. 동방은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유월절에 해당되는 일요일 즉 춘분 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일짜를 통일하기 위한 동방과 서방 간의 논의가 계속 되어 마침내 325년 니케아 회의 때 일요일에 하기로 결정되었다.

부활절 전 일 주일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여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로마에서는 주님이 40시간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을 기념하여 40시간 동안 금식과 철야 기도를 했다. 이 40시간은 나중에 니케아 회의(325년)에서 40일로 변해 사순절(四旬節)로 정해졌다. 부활 주일 전야에는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세례를 받은 이들이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다. 부활 주일 새벽에 모든 금식이 끝나고 즐거운 오순절이 시작되었다.

부활절 후 50일간은 환희의 때로서 매일 만찬식을 행했고, 제40일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제50일에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을 기념하였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성탄절의 풍습이 없었다. 헬라 교회에서는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그의 나타나심을 축하하여 1월 6일에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라는 축하 행사를 했다. 서방 교회에서 나중에 성탄절이 시행되자 주현절의 성질이 달라직 되었다.

당시 교회는 형제 사랑에 크게 힘을 썼고 특히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서로 돌보았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감독 우르바누스 1세(223-230년)는 로마 전체에는 그리스도인 거지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3세기 중엽에 로마 교회는 1500명의 과부와 그밖에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시리아, 아라비아, 갑바도기아에까지 구제금을 보내기도 했다.

정절을 중히 여기는 정신은 종종 다소 소극적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초대 교회는 결혼의 정당성과 소중함을 인정했으나 이 시대에 와서 결혼은 정욕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독신자(獨身者)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재혼은 더 좋지 않게 생각되었다. 306년 스페인의 엘베리스에서 개최되었던 지방 대회에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는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직에 있는 자는 독신이 좋다는 사상이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으나 강제적 규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독신자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은 아직 이 시대에는 없었으나 번잡한 세상 생활을 피하여 혹은 박해를 피하여 산과 들로 나가서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은 더러 있었다.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일반적으로 중히 여겨졌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또 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은 특별하였다. 그리하여 2세기 중엽부터는 이들의 유물이 존중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무덤에서 이적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각 순교자들의 순교일에 성만찬식을 행했으며 3세기 초부터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헌물을 바치기도 했다. 순교자 다음으로는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굽히지 않은 수절자(守節者)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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