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시기를 續사도시대(Post-Apostolic Age) 또는 前니케아회의시대 (Ante-Nicene Age)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교회가 보다 구체적으로 형성된 시기요 발전된 시기였다.
1.박해로 인한 순교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가 로마제국 정부로부터 큰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로 (Nero) 황제로부터 이 시대의 말기까지 약 250년간 박해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순교자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이그나티우스(안디옥), 폴리갑(서머나), 유스티누스(로마), 키프리아누스 (칼타고) 등이 이 시기에 죽은 대표적 교회 지도자들이다.
2.카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형성
박해와 기타 안팎에서 오는 여러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그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통일과 규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점차 가정 교회의 상태에서 교회 간의 연합을 통해 커지고 조직화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감독의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카톨릭 교회가 되었다. 이때의 카톨릭이라는 말은 공동, 보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이후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소위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이 시대의 카톨릭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古카톨릭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만 통일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통일되었는데, 사도신경이 이 시대에 생겨났고 신약성경 정경도 대략 이 시대에 편성되었다.
3.여러 사상들의 발흥
온갖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왕성하게 증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상적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져서 가히 사상의 발효시대라고 할만 했다. 헬라 철학, 동방 신비종교, 유대의 율법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복음과 뒤섞임으로써 신앙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새로 연구 검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영지주의(Gnostism)나 신플라톤주의(Neo-Platonsim) 등의 절충 사상으로 사상적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2.기독교의 확장
1.교회 확장의 중심지
(1) 예루살렘 -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 각처로 흩어졌던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기독교를 확장시켰다.
(2) 수리아의 안디옥 - 바울이 서쪽으로 전도해 나가는 근거지가 되었다.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 전도의 거점
(3) 에베소, 서머나 - 소아시아에서는 서남방 해안 지방에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에베소, 서머나가 그 중심이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복음이 소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4) 빌립보, 데살로니가 - 마게도냐 지방 전도의 중심지
(5)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다음으로 기독교가 흥왕한 곳이었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3세기에는 성경의 애굽어(콥트) 번역도 이루어졌으며 신학교도 세워졌다. 또한 그노시스파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6) 고린도, 아덴 - 헬라(그리스) 지방의 복음 전파의 거점 도시였다. 아테네에서도 변증자들과 순교자들이 나왔다.
(7) 로마 - 서유럽 전도의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각처에 교회가 있었고 북은 갈리아, 남은 북부 아프리카, 서는 스페인에 이르렀다.
2.성장의 요인
(1) 성령의 충만한 역사
(2) 신자들의 비상한 전도열 -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
(3) 왕과 상류 계급이 교회로 들어옴
(4)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들에 대한 구제 - 소외되고 고난당하던 하류층들이 대거 교회로 들어오게 됨
(5) 봉사와 상부상조 - 신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도움으로써 박해 중에서도 신자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함
(6) 고상한 도덕적 생활 - 이것이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불러일으킴
(7) 박해에 대한 인내
3.박해
1.원인
A.간접적 원인
(1) 오해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자들이다 - 동굴 속에 남녀가 모여 음행한다 (숨어서 집회를 가지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 불의한 자들이다 - 자식을 잡아 먹는다 (성찬식에서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2) 미신
. 기독교인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하여 천재 지변이 일어난다고 생각함
B.직접적 원인
(1) 사상의 부조화(不調和)
로마인들은 국가를 최고의 선(가치),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였으므로 국가는 모든 일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최고 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평소에는 국가에 충성하지만 국가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신본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제국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고 생각함
로마인들은 가장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으므로 가장의 종교가 온 식구들의 종교가 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그의 종교에 따르지 않음
(2) 사회 생활의 부조화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겨 참여하지 않음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뒤엎고 개조하려는 것으로 봄
(3) 로마의 정책과 맞지 않음
로마 지도자들은 제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황제 예배를 강요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에 반대하고 호응하지 않음
로마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비밀 단체 결성과 회집을 금지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모임을 계속 가졌기 때문에 충돌이 생김
또 기독교인은 침략 전쟁에 나가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군 복무 문제로 충돌이 생김
2.박해의 방법
(1) 기독교를 포기한다는 증거로 성경과 교회 기물을 버리게 하거나 파괴하도록 만듬
(2) 직업을 갖는 것을 방해하거나 재산 몰수, 공직 박탈 등을 통해 신자들을 직간접적으로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함
(3) 폭력과 방화를 행사함 - 화형에 처하거나 십자가 형벌을 가했으며 맹수와 결투를 시켜 죽게 함
(4) 기독교에 반대하는 많은 사상을 내세워 교리적 사상적으로 압박을 가함
(5) 이러한 박해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3.박해의 결과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하고 확대되고 강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 보다는 고난 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박해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결과 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구주이심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껴서 신약 정경(Canon)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핍박과 그것을 사랑과 진리와 무저항으로 이겨낸 성도들 간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유명해지게 만들고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특히 사도들과 교부들의 순교는 기독교가 생명있는 그 무엇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가에 융합되지 않으려 한 교회의 태도는 훗날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가 서로 뒤섞일 수 없으며 반드시 구분되어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명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4.이 시대의 10대 박해
일 세기에 일어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잔인한 박해는 주로 개인적인 원한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치적인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디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서 기독교를 완전히 섬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지만 그 외 여덟 번의 박해는 특정 도시나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1.네로(54-68)의 박해
로마시의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지워 박해함
2.도미티아누스(81-96)의 박해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로 박해함. 이로 인해 카타콤에서의 비밀 집회가 생겨남
3.트라야누스(97-117)의 박해
비밀 결사를 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사회 생활 부조화를 이유로 박해를 가함. 황제상에 절할 것을 강요함.
4.하드리아누스(117-138)의 박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박해함. 기독교를 불법화함
5.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161-180)의 박해
가정교사의 사상적 영향(스토아사상)으로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박해함. 177년 리용과 비인에서 특히 심한 박해가 있었다.
6.셉티무스 세르베루스(205-211)의 박해
열심있는 이교도였던 부인의 영향으로 교회를 핍박함. 특히 전도 금지령을 내려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함
7.막시미누스(235-238)의 박해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박멸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함. 이 시기에는 사형은 하지 않았고 투옥과 유형으로 박해를 함
8.디키우스(249-251)의 박해
로마가 옛 신들을 섬겼을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해졌다고 믿고 칙령을 내려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디키우스는 원칙에 따라 작심하고 박해했기 때문에 이 때의 박해가 가장 심했다. 그의 목적은 신자들을 죽여서 순교자를 내는 것보다 악형과 감금과 공갈로 우상을 숭배케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산시키는데 있었다.
9.바렐리아누스(253-260)의 박해
기독교인들로 인해 질병과 흉년이 생겼다고 믿고 257년과 258년에 큰 박해를 했다. 신자의 집회를 엄금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주요 신자들을 유형보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기독교와 같이 다루기 어렵고 강력한 조직체가 제국 내에 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기독교를 박해함. 그도 조직적인 박해를 했는데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성직자 투옥, 악형에 처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는 등 핍박을 했는데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한 제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디키우스 때처럼 순교자도 많이 나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민중들이 이전처럼 적대하지는 않았다.
4.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1.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
루키아누스는 120년 수리아에서 출생했고 200년에 헬라 또는 애굽에서 사망했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풍자와 조소의 문장으로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풍습을 비방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죽음>(De Morte Peregrini)이라는 책을 180년경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65년 올림피아 경기 때 키니크 학자 페레그리누스(Peregrini)가 불속에 투신 자살했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페레그리누스는 부모를 죽이고 간음한 자였는데 후에 예수 믿고 목사까지 되었고 나중에 악행이 탄로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도움으로 출옥했다. 출옥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추방되어 키니크 학파에 가입했으나 허망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기독교인과 키니크학파를 조롱할 목적으로 이 소설을 지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2.켈수스(Celsus)
루키아누스의 뒤를 잇는 기독교 비판자는 켈수스인데 그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인이며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다. 저서 {참 말}(참 강론)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 책에 반박하게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박함}이라는 책을 지었다.
180년경에 쓴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년 뒤에 쓰여진 오리게네스의 저서 {켈수스를 반박함} 안에서 상당 부분이 실려 보존되고 있다.
오리겐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켈수스는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 상식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리 깊지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 나올 정도로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매우 격렬하고 신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과 식인을 저지른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표라고 했다.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하셨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는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다른 사람들뿐이다. 켈수스는 제자들의 증언이 예수 생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꾸며 기록에 삽입했을 것으로 보았다.
3.신플라톤 학파 (Neo-Platonsism)
1.발생 원인
여덟 번째의 데키우스 황제와 아홉 번째의 발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시행된 박해는 로마의 기존 여러 신들을 끌어들여 로마 제국을 다양한 외적들로부터 보호해 보려고 하는 중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고 박해자인 발레리우스가 260년에 페르시아 원정 중에 생포된 다음에 새로 왕위에 오른 갈리에누스 (Gallienus)는 261년에 사실상 박해 정책을 포기하고 관용을 베푸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갈레리우스가 전임자처럼 물리적 힘으로 기독교를 누르려고 한 군인이 아니라 철학으로 기독교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신플라톤학파는 출발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생겨난 종파였다.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자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의 재래 종교들이 없어질까 하여 이런 철학적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비평만 하는 것을 표방하지 않고 아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 종교를 표방하였다.
신플라톤학파는 재래의 철학사상에다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을 구성한 것이다. 시조는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음)였는데 부모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옛 종교로 돌아간 자이다. 이 학파의 중요 학자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이다.
2.플로티누스 (Plotinus)
신플라톤 학파의 최고 지도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인데 삭카스의 제자였다. 그는 208년 애굽에서 출생하여 244년경부터 270년까지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영혼이 감각에 속한 것들(물질)로부터 해방되어 그 근원인 신께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배척함은 물론 영지주의적 기독교도 배척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영(Spirit)과 마음(Soul)과 물질(Body)의 삼 단계로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귀하기 위해서는 첫째, 덕을 쌓아야 하고, 둘째, 신과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에로스(쾌락적 애정)를 통해서 엑시타시 현상에 이름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3.포르피리우스(Porphyrius)
플로티누스의 제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타락, 성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고 박해 기간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서를 썼다. 그는 다신교의 옹호자로서 무려 15권의 저서를 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비방했다. 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사후에 주님의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철학으로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한 신플라톤 학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그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敎祖가 없었다. 신앙이나 추종의 대상이 될 분명한 인격적 신이나 교주가 없었으므로 철학적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둘째,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축복과 평안을 어떻게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5.교부들의 신앙 세계
1.교부의 정의
교부들이란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의 건설과 진리의 체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권위를 떨친 인물들을 일컫는다. 특히 교부의 자격 중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리에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정통적이지 못하면 교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첫 교부는 1세기 말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를 꼽고 마지막 교부로는 동방교회에 있어서는 다메섹의 요한(725년 사망)을, 서방교회에 있어서는 그레고리 1세(604년 사망)을 꼽는다.
교부는 시대에 따라서 니케아회의 이전의 교부와 그 후의 교부로 크게 나누어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동서로 구별한다. 즉 ①속사도교부 또는 사도적교부(Apostolic Fathers) ②변증가 (Apologists) ③헬라교부(Greek Fathers) ④라틴교부(Latin Fathers)로 나눈다.
2.주요 속사도 교부들
1.로마의 클레멘스 (Clements of Rome)
클레멘트 또는 클레멘스는 1세기 말에 로마에서 사역한 유명한 장로이다. 그의 저서로는 <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그의 저서에는 구약 인용이 많아서 분의 1이나 된다. 그는 바울의 정신을 많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야고보와 같이 윤리적 가르침을 많이 베풀었다. 클레멘스의 관심사는 바울과 같이 진리를 세우고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기 보다는 교회 형제들의 선행과 덕행을 격려하는데 있었다. 그는 신앙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2.이그나티우스 (Ignatius)
안디옥 감독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은 교회의 통일,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 등이다.
그의 저서로는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쓴 7통의 서신이 있다. 이중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라리아> <로마인에게>는 서머나에서 집필한 것이고 <빌라델피아> <서머나> < 폴리카르푸스에게>는 드로아에서 집필한 것이다. 그는 이 서신에서 대속 문제, 성육신 문제(주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이단인 假現說者들을 취급하면서), 유대주의자들 문제, 감독직의 권위 문제를 취급했다.
3.폴리캅(Polycarp)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폴리캅은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이그나티우스 친구였으며 후일 이레네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폴리캅은 155년에 서머나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 한 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바울 서신들과 베드로서, 요한일서 등이 인용되어 있다.
4.파피아스(Papias)
브프리기아(브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서 150년 경에 버가모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는 다섯 권으로 된 <주의 가르침의 설명>이 있다. 이 책은 사도들과 사도들의 제자들이 전한 것을 한 데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단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속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파피아스는 열정적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3.교부들의 신학
1.기독론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논쟁당누 논쟁은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신성을 더 강조한 편이었다.
①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②이그나티우스 (Ignatius) : 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③헤르마스 (Hermas) : 그리스도의 선재설(先在說)을 믿었다.
2.삼일신(3 1神)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교리는 이 시대에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희미하나마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하다.
①이그나티우스 : 신자는 건축재(돌)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을 끌어올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기계로, 성령님은 밧줄로 비유함
②클레멘스 : 사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충분한 확신을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되고, 성령님의 보증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복음을 듣고 이것을 전하러 나아갔다"고 말했다.
3.속죄론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열고자 피를 흘리셨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以信得義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철저하지 못했고 이신칭의의 근거에 대해서도 구약 말씀들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4.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게서 천년간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신다고 가르쳤으며 파피아스는 상상력을 크게 활용하여 천년 시대의 상태를 묘사하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크게 강조한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주의가 교회 안에서 만연되게 된 데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 철학 사상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이 컸다.
6. 변증가들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이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교리화하고 신조화하는 데와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증가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가장 탁월한 변증가였다.
1.헬라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1.유스티누스 (Justinus)
그는 125년에 사마리아에서 출생하여 166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핍박 때 죽었다. 그는 헬라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는 중에 진리를 찾아보려고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 등을 전전하며 사숙하였으며 플라톤 학파의 학설에 깊이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가 플라톤 철학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거의 철학의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특별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날 해변을 산보할 때 한 노인을 만난 것이다. 그 노인은 유스티누스에게 구약 성경을 주면서 이 책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되었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노인을 만난 후 유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노인의 충고에 따라 구약을 연구하였고 또한 신약을 연구하는 중에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하신 것을 발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는 <대 변증서>와 <소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이 중 대변증서는 황제와 원로원, 로마 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터무니없고 상투적인 비난 곧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며 국가에 반대하고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등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기독교의 참된 신앙 됨과 고상한 도덕적 종교임을 변증하며 이방 종교에 비교할 때 기독교가 매우 우월한 종교라는 것을 강조했다.
2.아리스티데스 (Aristides)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 사람인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 글은 시내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참 신의 성질을 설명했고 이교의 신화를 공격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삶에 대해 설명했다.
3.콰드라투스 (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그는 126년 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변증서 제출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자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4.타티아누스 (Tatianus, 110-170)
앗시리아인으로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였다. 철학자인 그는 로마에 거주했는데 나중에는 그노시스 종파에 들어갔다고 한다. 저서에는 헬라인의 신화를 반박한 {헬라인에 대한 담론},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한 {디아테사론}(傳記)} 등이 있다. 디아테사론은 가장 오래된 예수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160-170년 경에 요한복음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증명된 것이다.
5.아테나고라스 (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 경에 쓴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에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이론가였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철학적으로 변호한 첫 그리스도인이다.
6.멜리토 (Melito)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 감독이었으며 당시 유명한 대작가였으나 전해오는 저서는 없다. 힐라 신화를 비판한 글을 많이 썼다. 최근 {주의 수난}이라는 논문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존중하여 주님을 '본질상 神 人'이라고 칭했다.
2.라틴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1.미누키우스 펠릭스 (Minucius Felix)
원래 유명한 로마의 법률가로서 230년 경에 활동했고 저서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된 <옥타비우스>라고 하는 글이 있다.
2.아르노비우스 (Arnobius)
아프리카에서 수사학 교사를 지낸 아르노비우스는 주님을 믿은 후 세례받기 전에 (주후 303년 경) 7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은 다신교의 불합리성을 공격하고 기독교의 장점을 칭찬한 것이다.
3.락탄티우스 (Lactantius)
아르노비우스의 제자로서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며 그리스찬 키케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는데 이 책은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당시의 변증론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3.변증의 정신과 내용
1.정신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주는 편지> 1절을 보면 변증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
①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②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③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육체를 사랑하며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다.
2.내용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비난의 내용 >
①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
②정부를 엎고 세상에 별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함
③그리스도인은 부도덕한 자
④예수는 마술사
< 변증의 내용 >
①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만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일 뿐이며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한 참 유신론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②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음.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③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함
④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신)이다. 그가 신기한 표적을 행한 것은 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것이다.
변증가들은 변증을 위해서 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 기독교와 세상 철학들의 관계에 대해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변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신의 유일성과 기독교 도덕의 초월성이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은 구약 성경 중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의 감화력과 결과를 들어서 증거로 삼는 일도 많아졌다.
7.헬라 교부들
1.소아시아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 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도 변증서가 계속 나오는 등 변증의 열심이 완전히 식어진 것은 아니나 교회는 점점 내부의 충실에 열중하였으며 신학교를 건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이 무렵 헬라 신학자와 라틴 신학자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지방과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로 사상의 경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1.이레네우스 (Irenaeus)
이레네우스는 가장 뛰어난 초대교회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제자인 히폴리투스와 함께 초기 카톨릭 논쟁자들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데오도레투스로부터 [서방교회의 빛]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그는 대략 115-140년 경 사이에 소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서머나 지방에 거하는 동안 폴리캅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고올(프랑스)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그곳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정통 교리의 옹호에 힘썼다. 이레네우스는 성질이 온순하고 사상이 순수한 것이 장점이며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헬라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책에 정통하며 반대자들의 사상을 잘 알아보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에레네우스는 헬라의 신학자였지만 활동한 장소는 서유럽으로서 라틴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주후 177년에 리용과 비인의 교회 박해시에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그곳의 모든 시민이 신자가 되게 하는 등 전도에 크게 성공하였다.
이레네우스는 변증가들과는 달리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을 막기 위해 싸웠다. 그는 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신약을 충분히 활용한 교부들 중 일인자로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보여주었으며 사복음과 거의 모든 서신을 이단자 말시온의 성경과 대조하여 논증하는데 인용하였다. 그가 주로 논쟁한 상대는 이단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였다.
그의 사상은 변증가들이 사상처럼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지 않고 사도 이래의 전통을 존중하고 신앙의 표준을 중히 여겼다. 그는 특히 사도들에 의해 보존된 로마 교회의 신앙과 사상이 모든 교회의 신앙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관(神觀)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자유 의지로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였고 신의 피조물인 우주(물질) 역시 선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로고스이며 그의 독생자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 대해 순종하는 위치에 서서며 성자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으로 본 것은 그의 순종이었다. 인류는 바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로서 주님은 인류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포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대해 힘써 증거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이미 로고스가 아니고 성육신과 속죄에 있었다. 오랫동안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신학은 이레네우스에 의해 다시 상기되었다.
2.히폴리투스 (Hippolytus)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인데 170년에 태어나서 235년 죽었다. 그는 주석과 연대기와 부활절 계산, 변증가, 이단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는 로마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하여 당시 등장한 두 가지 단일신론(Monarchian) 주장(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시키는 養子論的 단일신론과 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시키는 樣態論的 단일신론)에 크게 반대하여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는 < 모든 이단을 논박함(Against All Heresies) > 이다.
2.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철학과 古文學의 소양이 풍부하였다. 그들은 이단을 반대하여 참 진리를 세우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으나 그 자유로운 연구 태도와 사상 자체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이 파의 대표자들이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유력한 교회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학교(학파)는 처음에 판테누스에 의해 지도되었다. 판테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에 이르러 이 학파는 최고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1.클레멘스
150년 경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180년 경 판테누스를 만나 수학하였고 189년부터 12년간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202년 셉테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안디옥으로 피하여 거기서 저술과 설교에 종사했으며 후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213년 경에 죽었다. 클레멘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명상적인 사람으로서 논쟁의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폭넓은 교양과 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철학과 기독교 간에는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철학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옛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사상의 좋은 점들을 모아 크리스찬 영지주의를 낳았다. 클레멘스는 이러한 활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방 종교의 헛됨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권면>과 기독교인의 생활론으로 당시의 풍속, 습관, 도덕을 설명한 3권 짜리 책 <교육자>와 순서 없이 모은 철학, 종교, 신학의 비망록인 <잡설> 등이 있다.
2.오리겐(오리게네스)
18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거룩한 삶을 향한 오리겐의 열망과 금욕적인 경향은 스승인 클레멘스보다 훨씬 더 하였다. 그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사람 중 하나였으며 아무 소유도 없었다. 그는 211년 경에 로마로 갔으며 215년에는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였으며 230년 경에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이스 등지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의 비난과 고소로 인해 추방당했고 가이사랴에 가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오리겐은 244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두로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다방면에서 석학이었으나 구약 본문 비판, 주석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저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에 관한 것으로서, 본문 비평과 주석이 있다. 비평서로서는 {헥사플라}(Hexapla; 6가지 번역 성경)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나온 기독교 학자들의 모든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역시 신 구약 전체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리상의 저서로서, {제1원리}(De Principis)라는 큰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인데 오늘날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변증적인 저술로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다. 이것은 8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전부 전해지고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필로와 같이 성경을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하여 구약 해석을 함에 있어서 풍유적 또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 해석법은 헬라 철학자들이 신화와 신에 관한 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오리겐은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뜻만 찾지 않고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찾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자적인 뜻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도덕적인 뜻이란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을 말하며, 영적인 뜻이란 성경 말씀 안에 포함된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항상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조화시키고 철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우화적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던 것도 바로 성경에서 철학적인 뜻을 찾기 위해서였다. 헬라 사상에 의한 기독교 해석법은 오리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은 철학과 윤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리겐의 작업은 기독교의 과학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바탕은 신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진 플라톤 스토아 철학이었다.
교회, 사도적 전승 위에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웠는데, 우선 그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다. 로고스(아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이지만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영혼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유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어서 깨끗하게 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의 구원관은 만인구원설이어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도 일정한 사후의 시련을 통해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리겐의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 곧 현세의 영적 실재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영혼은 그 세상에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우리를 타락시켰다. 그래서 구속 얻은 자들만 거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리겐은 바울 이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속죄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만인에게 미쳐서 성도뿐 아니라 악인들까지도 마침내 구원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마귀들까지 구원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대학자로서 그의 정신 세계의 규모와 수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모든 이론들이 다 참된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세상이 보다 열등한 주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와 아울러 물질 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플라톤주의적)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점에더 오리겐은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 영혼의 선재라든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을 주장한 것을 놓고 보면 그의 사상이 기독교의 정통 사상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겐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 이전까지의 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로서 이후 동방 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대의 기독론 논쟁에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그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 회의(399-400년)와 유스티누스 황제 회의(543년), 제5차 교회 대회(553년)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
8.라틴 교부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1.터툴리안 (Tertullianus)
터툴리안은 신학을 라틴 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근거하는 계시와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터툴리안은 160년 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생했으며 40세에 회심하였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에 대해 많이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서}(Apolpgy)였다. 이 책에서 그는 탁월한 법률가로서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취급해 본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단호하며 우울하고 열정적인 그는 중년에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계속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불공정하고 광신적이었다. 그는 년에 죽었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후에도 계속 교리적 오류(이단)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무렵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은 {프락세아스를 대항함}(Against Praxeas)이다.
신학 발전에 대한 터툴리안의 최대 기여는 속죄론의 기초가 되는 죄악론을 주장한 데 있다. 시조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미 이레네우스가 가르친 것이었지만 그는 아담의 죄와 지금 우리의 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사람의 영혼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는 유전설을 주장하면서 죄도 함께 유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죄는 육체에 있지 않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터툴리안이 독창적으로 주장한 원죄설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삼일신(三一神) 사상을 최초로 내놓았다. 이것은 삼위일체 사상보다는 조잡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프락세아스를 대항함'에서) 또 그는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이것은 세례 후의 범죄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오직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철학적 관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가(성경적 관심)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며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2.키프리안 (Cyprianus)
스스로를 터툴리안의 제자라고 일컬은 키프리안은 3세기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자 교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200년 경 카르타고의 부자집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훌륭한 헬라 교육을 받아 나중에 저명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문학, 수사학, 법률 및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이로 인해 248년에 가르타고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248년 그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어 많은 일을 했으며, 250년 디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사막으로 피난하여 교회에 서신을 보냄으로써 그가 없을 동안이라도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는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를 만나 사막으로 다시 귀양을 갔다가 258년 참수당하여 순교했다.
키프리안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터툴리안은 人性(人間)의 부패를 말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비해 키프리안은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자는 타인이며 俗人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카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영적 공동체'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외적 조직과 제도를 갖는 가시적(可視的) 공동체로 보았으며, 그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말씀}보다는 보이는 {사람}(감독들)에 의해 확실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카톨릭교회 곧 可見的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카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핍박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던 당시의 사정에서는 이런 주장을 할 필요성이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이나,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신약 교회의 특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인간의 제도에 근거하여 교회를 유지하려고 의도한 키프리안의 신학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잘못된 신학이며 훗날 나타나게 될 교황 제도를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교회를 크게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9.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이런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축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던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런 수찬 정지는 구원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징계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완화해 주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회하는 죄인을 받아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게 되자 음행과 간음한 자 및 배교를 한 자들까지 교회가 받아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서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217-222)는 어떤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해준다는 성명을 내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배교자는 제외했으나 박해로 인해 무수한 배교자가 속출하자 그것도 결국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넘어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 엄격파들은 그 입장을 거부하고 로마의 신학자 노바티안을 따름으로 분열하였다. 대다수인 나머지는 관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로마 회의(251년), 카르타고 회의(252년)에서 다수파인 관용파가 승리하여 교회는 회개한 배교자들의 교회 가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들은 배교자 등 죄인들의 죄책 등급을 다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등급에 따른 고해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햇수(年數)가 결정되었다. 고해(告解; penance) 개념은 세례의 속편(續篇)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고해로써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므로 반복할 수 없었고 세례는 세례 받기 전까지의 죄만 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후의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구제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와 같이 생각했다. 곧 순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이 순교를 그렇게 갈망하고 그것을 자청했던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고해였다. 이런 사상은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에 나타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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