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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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나 '마음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2004년 5월 12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특강에서 한 말이다. 이날 조용기 목사의 강연 내용이 동아일보, 국민일보, 뉴스앤조이 등 언론에 알려지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상시 한국의 보수교회를 대표하는 조용기 목사가 뜻밖에도, 매우 진보적인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날 강연 후에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도, 조 목사는 "불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 중 똑같은 것이 매우 많다"며 "일부 목회자들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자비나 예수님의 사랑이 다 같은 것이다"라고 말해서 참석한 스님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조용기 목사의 이와 같은 발언이 과연 타종교에 대한 정치적인 제스처인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오늘날 다른 종교와 협력하며 살아야 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불교의 행사에 참가한 교계 지도자가 이 정도의 이야기는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쪽과,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기독교와 불교가 같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쪽이 서로 나뉘어져 있다. 과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은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이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은 바로 이 말씀을 통해 명시적으로, 천하 모든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기독교회는 바로 이 말씀을 따라 지난 2천 년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 왔다. 또한 이 말씀을 따라, 과거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었고, 불 속으로 던져졌고, 칼로 목 베임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말씀을 의지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직 예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땅 끝 오지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물결 속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발언에서 나타났듯이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기독교 내부에서도 들리기 시작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미 1960년대 초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기점으로 다른 종교들 속에도 ‘성스러운 어떤 것’, ‘진리를 반영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선언을 한 바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정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제 그러한 기독교의 입장들을 다음의 몇 가지 모델을 통해 검토해 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타 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들
1)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 : 배타주의 - 자연계시는 없다.
타종교의 구원 문제를 말할 때 가장 논점이 되는 것이 계시의 문제이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계시는 곧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은 한마디로 이러한 계시가 자연이나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자연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자연계시(일반계시, 보편계시)를 철저히 거부한다. 물론 우리 안에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말씀처럼 사람들이 그것을 좇아간 결과는 언제나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롬 1:19-23).
롬 1:19-23)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자연계시에 의존하는 여타 종교는 아무 것도 정당화되거나 참된 것이 될 수 없다. 이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따라서 이를 믿고 따라가는 자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좇는 것 자체가 죄이고 불신앙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는가? 오직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라고 하는 특별계시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로 계시된 말씀, 즉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둘째로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 그리고 셋째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시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요, 참된 종교요, 구원을 가져오는 종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부르는 종교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에는 무시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이 모델은 너무나 배타적이라서 오늘날 다원주의 시대에서 타 종교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화를 좌절시킨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자유와 정의, 인권과 평화, 환경보호 등 많은 중요한 일들을 위해 다른 종교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다. 이를 위해 다른 종교와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정죄하고, 그들과 대화하기보다는 오직 개종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자칫 다른 종교들에게 반감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을 역선교로 무장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최근 기독교의 일방적 선교에 대해 세계 여러 곳에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타 종교권이 깨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기독교 세계를 향해 활발히 선교를 하고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35년간 인도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65세에 은퇴 하여 고향인 영국에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그 사이에 영국이 급속히 이슬람화, 힌두화, 불교화가 되어서 이제는 영국이 세계 어느 선교지 못지않은 훌륭한 선교지가 되어있다고 밝힌 바 있다. 오래 된 한국의 불교는 제외로 하고, 이제는 한국이 더 이상 이슬람의 사각지대가 아니다. 한국이슬람중앙회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한국 이슬람 신자의 수는 15만 명인데, 이중 한국인 이슬람 신자가 5만 명이라고 한다. 이러다간 자칫 기독교가 세상을 구원할 힘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기독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도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 신복음주의 모델 : 배타주의 - 계시는 긍정하지만 구원은 부정
그런 점에서 두 번째의 신복음주의 모델은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과는 달리,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라든가 판넨베르크(Wolhfart Pannenberg) 와 같은 신학자들은 말씀계시 뿐 아니라 자연계시도 긍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므로(딤전 2:4), 인류에게 자연계시를 통한 구원의 통찰을 당연히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가령 불교 중에는 '아미타' 불교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불교는 계율을 지킴으로 열반, 즉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일반 불교와는 달리, 계율 없이도 단지 아미타불에 귀의함으로써, 즉 '나무아미타불' 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 바로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기독교의 복음과 같은 통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종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신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복음주의 모델은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신복음주의 모델이 비록 말씀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특별계시 외에 자연계시를 긍정하고 있지만, 자연계시를 통한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연계시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이고 불충분한 통찰의 수단이며, 구원을 예비하는 그것도 부정적인 준비에 머물 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복음주의 모델과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은 모두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후계자들이다. 결국 신복음주의 모델은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과 대화를 위해 자연계시를 인정한다고 하는 점 외에는 본질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과 차이가 없다. 이런 이유로 신복음주의 역시 타 종교의 불만을 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대화의 중요성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는 점에서 신복음주의 모델은 분명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을 능가하고 있다.
3) 가톨릭 모델 : 포용주의 - 피라미드식 구원
주후 3세기 이후,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Cyprian)의 구원론을 따랐다. 이것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매우 보수적인 구원론이다. 그러나 가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은 더 이상 교회만이 유일의 구원의 기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회를 안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포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류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은총에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 중에도 이미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당수의 선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이러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이처럼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라너는 다른 모든 종교와는 구분되는 기독교만의 절대성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그 어떤 종교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는 절대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고, 상당한 부분 어둠에 싸여 있어서,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구든지 가톨릭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절대적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의하면 선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구원의 단계로 끌어 올리는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라너는 구원의 피라밋을 만들고 가장 꼭대기에 절대적인 종교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치시키고, 그 아래에는 그보다 못한 개신교회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유대교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여타 고등종교들을 위치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결국 라너는 모든 종교의 정점에 로마 가톨릭을 올려놓는 철저한 가톨릭 중심의 신학을 전개한 셈이다. 이러한 이론을 따르고 있는 오늘날의 가톨릭이 자기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타 종교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입장을 유지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과연 성경의 진리에 부합되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4) 다원주의 모델 : 정상에 이르는 많은 길들
이제 가톨릭의 포용주의마저 넘어서는 다원주의 모델을 알아볼 차례이다.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다른 종교의 구원에 대해 배타적인 복음주의 모델은 물론, 매우 포용적인 가톨릭 모델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볼 때에는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그리스도교의 절대주의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힉(J. Hick)이나 라이문도 파니카(R. Panikkar), 폴 니터(P. Knitter)와 같은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아주 이상하게 해석한다. 가령 니터에 의하면 사도행전 4:12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는 말씀은 결코 우리가 언제든지 믿고 따라야 하는 보편적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말씀이 단지 당시의 압제 상황 속에 처해있었던 기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고백의 언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오직 그리스도’ 라고 하는 그리스도 유일성의 문제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마치 남편들이 세상에 수많은 여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내를 향해 “내게는 오직 당신만이 유일한 여인이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주의 모델은 이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지 않는다. 한편 파니카는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수가 있을 수 있듯이 구원의 길도 다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따라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되며, ‘부처’이든 ‘라마’이든 ‘크리슈나’이든, ‘민중’이든 수많은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산의 비유’를 말하지 않고 ‘문의 비유’(마 7:13-14)를 말한다.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3. 포용주의 및 다원주의의 문제점
오늘날 다원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전통적으로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 입장을 지닌 기독교는, 가톨릭의 포용주의나 종교다원주의 모델로부터 배워야할 점이 분명히 있다. 그동안 기독교는 타 종교의 문화를 마귀시하고, 그것을 박멸시키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선교와 일치시키는 잘못을 범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가 타 종교 사상 속에 들어 있는 윤리와 자비와 생명 사랑 등과 같은 선한 가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평화의 증진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면, 무엇보다 교회가 이를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항상 포용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더 나아가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1) 제 1 계명과의 충돌
무엇보다 기독교는 성경의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의 토속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접신이나, 영매, 초혼 등의 행위를 철저히 금하고 있다.
출 20:2-3)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신 18:10-11)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를 추종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토속종교의 복술과, 초혼, 영매, 무속 등과 관련된 행위를 기독교 정신과 접합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 행위이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결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창조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당시 타 종교에서 모두 신적인 존재로 여기던 태양, 달, 별, 바다의 큰 괴물 같은 것들을 모두 피조물로 격하시켜서 기록했다. 성경 기자들에게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발타자르(H. U. Balthasar)는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비판하면서 만약 이 이론이 정당하다면 순교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한편으로 순교자들을 위한 책으로 주어진 것이다.
계 2:10)...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선교의 절박성이 사라짐
또한 선교는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위임 받은 가장 본질적인 과제이다.
마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의 일생은 복음 전파를 위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사도적인 교회가 되기 원한다면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 받고 일생을 바친 사도들의 삶에 동참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포용주의는 이러한 선교의 절박성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급진적인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사실상 선교를 불필요하거나 아예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교회의 선교란 “불교를 도와서 불교가 더욱 좋은 불교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3) 흐려지는 십자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부활
성경에는 율법적인 일반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의 세계가 나타나 있다. 거기서는 세리와 창기가 오히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용서를 받으며, 원수가 이웃이 되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십자가 사건이 있다. 기독교의 계시의 또 하나의 결정적인 핵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죽어 무덤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썩지 않는 종교요 생명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세계의 보편 종교의 틀 속에서, 성경에 계시된 십자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기독교의 유일무이성 까지도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구호로 묵살해 버린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고 있는 성경과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코란을 하나의 책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치하지 않더라도 정직한 것보다, 정직하지 않더라도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온 세상에 “이슬람의 알라(Allah) 신이 알려지고 찬양되며, 힌두교의 크리슈나(Lord Krishna)신이 세계 안에서 행동할 것이며, 불교의 각(覺)이 그 지평을 더하면서 보다 심화되어,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되고 도모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혼합주의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위적인 혼합주의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4) 타 종교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하나님은 선교사의 등을 타고 비로소 한국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오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 민족 속에 활동하고 계셨다는 말을 하곤 한다. 맞다. 5천 년 한국 민족의 역사 속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이 땅이 수많은 거짓되고 왜곡된 사상에 뒤덮여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한국인의 심신은 조상의 묘자리가 후손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는 풍수와 미신과, 무당의 굿과 점괘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와 같이 혼탁한 한국인의 영적 세계는 상당 부분 전통종교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주의 및 다원주의는 이를 긍정적인 하나님의 자연계시로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이를 증거 하는 성경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섬기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다원주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일 수 있다.
4. 맺는 말
하나님의 은총은 세상 도처에 빛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해를 비춰주시기 때문에(마 6:45),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 속에 존재하고 있는 선한 것들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한 이 선한 것들이 비록 온전하지는 못할지라도 부분적이나마 참된 진리를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이 무한한 긍정으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낙관주의는 잘못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 속에 존재하는 영적 지식의 심각한 왜곡과 오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속에는 선한 것과 함께 적그리스도적인 요소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성경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계시를 상대화시키는 종교다원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는 타종교와 문화를 멸시하는 배타적인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오직 대화와 협력과 섬김과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서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에게도 분명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작성자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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