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란 절대적으로 절대자여야 한다. 절대자가 아니면 이미 신이 아니다. 전통적인 신관은 항상 절대자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신관을 가지고 이 절대적 신관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아무리 외쳐본들 절대적인 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죽은 것은 니체이지 신이 아니다. 표현이 센세이셔널하든 아니든 무엇이 문제인가? 실제로 인간이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사실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신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신이 없다면 전통적이던 현대적이던, 절대적이던 상대적이든, 잘못된 신관이든 무신론이든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신론이다. 그 다음이 잘못된 신관이다.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가진 신관이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는 꼴 밖에 안 된다. 신관에 있어서 우열은 없다. 절대적 신인가 아닌가, 절대적 신관이 아니라면 나머지 모든 신관은 아무리 그 내용이 심오하고 고상해도 그 전부가 동일하다. 인간의 관점에서라면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 절대적 신이 우리를 볼 때는 말이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에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1¡4).
기원전 586년 바빌론 포로로 끌려 간 유대인들이 바빌론 여러 강변에 앉아 고향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바빌론 사람들이 그들에게 흘러간 노래를 불러 보라고 청하지만 그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 없었다. 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까? 지금까지 '승리의 신(triumphalist God)'으로 철석같이 믿고 모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과의 파워게임에 져 포로 신세로 전락하게 됨으로, 이전에 갖고 있던 그 신관이 바뀌었기에 부르지 못했을까? 아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한 까닭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못하고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4절에서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라고 한 것이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에게 졌으므로 유대인들이 여호와가 바벨론 사람들 앞에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이 싫거나 여호와 신앙을 포기했기 때문에 부를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여호와의 노래를 감히 어찌 이방인들 앞에서 부를 수 있는가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은 비유로서 내가 예루살렘을 잊는 것은 내 오른 손이 자기 재주(특별한 기술보다는 오른 손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인 일)를 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오른 손이 밥 숟가락을 드는 것은 평생가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예루살렘 성전과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7절과 8절에서도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고 했다. 이것이 어찌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변화된 자가 할 수 있는 말인가? 그 반대로 믿음이 더 굳어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간구다.
유대인들은 알다시피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출 3: 14)을 인간의 입으로 감히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의 별칭 여호와를 따로 정해 대신 불렀고, 성경을 필사 하다가 그 이름이 나오면 옷을 가다듬고 붓을 다시 씻어 썼다. 이런 이들이 어찌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 하나님을 조롱거리로 삼으려고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에 응할 수 있었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족신관의 변화 때문에 그 노래를 못 불렀다고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생각과 사상을 강요하기 위해 성경을 반동적인 문자해석 한 것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신과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변화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계시하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하나의 초점을 향해 나아간다. 그 초점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계시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오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때로는 무자비한 신, 혹은 이방신에게조차 패배하는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변함이 없으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으로부터 찬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도 새 노래로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으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하나님을 자기 부족만을 위한 신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 2,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을 위해 역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부족신관(tribal God)'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 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 중동에서 팔레스타인과 죽기 살기로 복수극을 벌리고 있는 이유도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지켜 보호해서 반드시 승리케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출애굽기·예레미야¡¤AI≫c¾ß¼ μi ¸ðμc ¼º°æA≫ 시온주의로 해석했었고, 그래서 아직도 새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 가나안을 진멸하는 하나님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 하나님이나, 수난받고 조롱당하는 하나님이나,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새 노래는 시대에 따라 세계관·신관·가치관·성경관¡¤예수관이 바뀌어서 옛날의 생각을 버리고 새 생각으로 스스로 해석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다. 새 노래와 옛 노래의 차이는 시대 년도 수나, 가치관의 심오함과 고급함이나, 본인의 깨달음과 무지나, 전통적 해석의 유지 혹은 포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다. 아무리 전세계에 새롭게 유행하고 지금 교계의 주된 흐름이 된 신학으로 작사·작곡되었더라도 십자가를 배제하고 부르는 찬양은 새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목소리 크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다.
우리에게 새 노래를 지어줄 사람이 누구인가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 새로운 신학자가 새 노래를 지어주는 것도 아니요, 어느 날 자신이 명상을 하며 성경을 보다 새 깨우침으로 새 노래를 자진해서 부르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새 노래를 지어 주셨다. 예수님이 지어 준 노래를 부르면 아무리 그 노래가 오래되어도 바로 그것이 새 노래고 그렇지 않으면 헌 노래다. 성경에서 새 노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3¡7).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성경이 가리켜 기록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누구인가? 비록 다윗이 이 찬양을 할 때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겠지만,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한 것이다. 12, 13절에도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분명히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다윗은 이 새 노래를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당시에 성경을 새롭게 해석했던 어떤 선각자에게 들었는가, 아니면 본인이 스스로 그 역할을 감당한 것인가? 그래서 우리 또한 새 노래를 지어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다윗은 새 노래를 자기가 짓지도 않았고 선각자에게 들은 것도 아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고 했다. 성령이 그에게 들려주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성경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면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사와 곡조가 떠오르며 기쁨으로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 진정으로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새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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