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3.오순절 사건과 성령세례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앞에서 이야기했던 중생과의 관계,그리고 후에 이야기 할 성령충만과의 관계가 결정된다.과연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가 첫번째 체험이냐,아니면 중생 후의 두번째 체험이냐를 논하게 될텐데 앞의 내용과 반복을 피하는 방향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1)오순절과 성령세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세례요한의 메세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세례요한의 사역과 오순절이 연관되어지는 것은 예언과 성취로 나타난다.세례요한에 의하면 메시야의 성령의 사역은 종말론적인 것이다.세례요한의 예언는 오순절에 성취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성취하신 사역의 대표로서 주어진 것이다.베드로의 설교(행2장)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예수의 죽음,부활,승천,성령세례 사건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이것은 예수의 죽음,부활,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세례 사건도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개인 성도의 경험의 한 모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해야 한다.  고전15:45에서 바울사도가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말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살려주는 영은 곧 성령을 말함이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구절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하며 오순절 사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베드로는 요엘서의 "그후에"를 "말세에"로 고쳐 오순절 사건이 종말론적 사건임을 명백히 하였다(행2:14-21).둘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강조하고 오순절 사건과의 관계를 설명한다(행2:22-36).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약의 예언과 세례요한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보내주심의 약속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말하자면 성령께서 인격으로 강림하여 모든 사람위에 임하여 오심으로 구속사의 전경륜이 이제 단번에 성취된 것이다.  (2)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에서 그 신학적 중심을 찾는다.그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첫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방언으로 말하게 한 것을 의미한다.  오순절주의에 있어서 오순절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반드시 사도행전2:4절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를 의미한다.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하면 오순절은 근본적으로 특별한 방법으로의 성령체험이다.회개 이후에 성령충만하게 되고 그 증거로서 처음에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나타나며 절대 복종과 믿음이라는 충만 조건을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이렇게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은 체험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방언만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라고 한다.윌리암 콜드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때에 우리들의 혀를 지배하고 있다는 표시로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우리 지체 가운데 가장 지배하기 어려운 혀를 지배하시게 된다면 우리들의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오순절 성령세례에 대해 말할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성령을 충만하게 영접하는 것이다.오순절 신학자 스킵스텔은 성령세례는 "한 개인이 초자연적으로,체험적으로,그리고 완전한 의식 속에서 성령의 능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고 정의했다.이 말에서 보듯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분명히 본인이 알 수 있는 체험으로써 초월적 존재인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고(고후1:21),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며(엡1:13), 성령세례의 목적은 영생을 위한 중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성령세례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견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첫째,일반적으로 오순절 사건은 중생과 분명히 다른 것이며 중생 이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둘째,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징조가 우선 나타난다는 것이다.세째로,성령세례를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후속적인 성령세례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7개의 성경본문들 - 행2:1-4,2:38,8:4-25,9:1-19,10:-11:,19:1-7;막1:9-11 - 은 중생에 뒤이어 일어나거나,중생과는 다른 체험으로서의 오순절 성령세례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경의 바르지 못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가장 중요한 귀절인 행19장의 에베소 사건과 행8장의 사마리아 사건을 보기로 하자.  먼저 행19장의 에베소 사건은 에베소 교인들이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지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세례요한이 예언한 대로(눅3:16)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일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따라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바울의 질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해하듯이 믿고 난 뒤에 둘째번 축복이 있는데 그 축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은 완벽히 믿는데 실패해서 믿기만 하고 성령세례를 못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냐 하는 그런 질문이 아닌 것이다.  행 8장의 사마리아 사건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견해자들에 의하면 사마리아 교인들이 믿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나 이 사건은 중생한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이 사건은 유대기독교인과 사마리아 기독교인 사이의 무서운 분쟁을 막기 위하여 사도의 안수로써 그들의 회심이 순수함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의   물을 주는 것을 보류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일정한 전제조건이 충족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한다.그 대표적인 것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     스킵스텔 |        콘 |  릭  스 |+--------------------+--------------------+-----------+| 예  배 | 죄로부터의 분리 | 중    생 || 즐거운 믿음 | 회개와 세례 | 복    종 || 열렬한 기대 | 믿음의 들음 | 기    도 || 찬양과 감사 | 복  종 | || 무조건적 복종 | 강렬한 소망 | || 하나됨 | 하나님께 간구 | || 인  내 | | |+--------------------+--------------------+-----------+|     펄    만 |     바 우 어 |  기  이 |+--------------------+--------------------+-----------+| 바른 태도 | 기  도 | 회    개 || 크리스챤사역자들의 | 신  앙 | 세    례 || 기도 | 죄로부터의 분리 | 믿    음 || 교회의 단합된 기도 | 죄인들로부터의 | || 믿  음 | 분배상과 반환문제 | || 정결케 됨 | | || 개인지도 | | |+--------------------+--------------------+-----------+  (3)개혁주의자들의 견해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달리 오순절 성령세례를 "첫번째 체험"으로 보고 있다.그래서 여기서는 오순절 성령세례를 두번째 체험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인,오순절 세례전에 중생한 제자들의 문제를 주로 다루기로 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세례를 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구절은 고전12:13인데, 이 구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기에 넘어가기로 한다.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존 스토트는 중생후에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때문이었다고 말한다.이미 중생한 120명과,비신자로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은 3000명의 두 집단이 있는데 오늘날의 기준은 3000명의 집단이고,120명의 체험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며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은 오래전에 끝났다고 말한다.즉 오순절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승천의 결과로서의 성령강림이며 예수의 구속을 위한 삶의 마지막 사건이라고 말한다.  엉거 교수는 제자들의 문제를 '시대전환적 현상'으로 설명한다.즉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과한 구약의 성도들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이러한 시대전환적 현상은 오늘날에는 일어날 수 없으며 그 당시에만 일어났던 과도기적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성경과 두 견해를 통해 볼 때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이 문제는 그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오순절 사건은 구약(욜2:28;겔36:26)의 성취인 것이다.  둘째,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성령의 부어주심은 단순한 충만의 사건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 이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새롭게 열릴 성령시대,교회시대의 출발점인 것이다.                       Ⅳ. 성 령 충 만  1.성령충만의 의미  성령충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정의해 보아야 하겠다.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많은 성경 본문들이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될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에 대하여 말한다면 편의상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있는 사실"로도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성령임재의 특징을 알아보면 첫째로,구약에서는 성령이 특별한 사람,즉 거의가 지도자들과 예언자들,한정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둘째로,구약에서 성령임재는 일반적으로 봉사를 위한 능력이었다.대부분 성령의 임재는 지혜와 특별한 기술과 큰 육체적 힘을 주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오순절날에 함께 모인 모든 사람들의 성령체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말로 기록되었다.'성령의 충만'의 표현이 사도행전의 오순절과 그 이후부터 여러번 나타난다(행2:4,4:31,7:55,13:52).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실제로 사람이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성령충만은 예수믿은 후의 성도들이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그러므로 불신자와 성령충만은 무관한 것이다.  이제 성령충만이 성경에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성령충만은 사람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행6:10;7:55;11:24).  둘째,성령충만은 어떤 특별한 사역을 성취하게 하시기 위해 일시적인 경험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행2:4,14-16;4:8,31;13:6-11).이 구절들에서 "충만"은 동작의 단회성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단순과거형으로 나타난다.  세째,성령충만이 계속적인 경험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성경은 증거한다. 행13:52;엡5:18은 성령충만을 묘사하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시상과 현재시상으로 되어있다.이는 성령충만의 계속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위의 세가지를 종합해 볼 때,결국 성령충만은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성령에 굴복된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2.성령충만의 실제성  (1)성령충만의 실제  성령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지배는 성령에 대하여 믿는 자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순응하느냐에 달려있다.즉 이말은 믿는 자는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받기위한 조건으로는,  첫째,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될 수 있도록 내맡기면 되는 것이다.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성령 충만해지지 못한것을 고백하여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둘째,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바라고 구해야 한다(요7:37-39).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충만함은,참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과,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받는 것이 필요하여 다른 모든것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세째,우리는 우리 전체를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권세에 바쳐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주여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당신께 바칩니다.내가 치루어야 할 댓가를 치루어 성령으로 충만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의 세가지 조건을 실행하면 곧 성령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우리의 심령이 충만해 지려면 우리가 걸어야 할 중요한 첫단계는 믿어야 한다.이것과 관련해서 우리의 믿음이 걸어야 할 다음의 세단계에서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다.먼저,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먼저 그를 믿고 모든 일에 그를 바라보기를 요구하신다.둘째로,우리의 주의가 한번 예수그리스도에 집중되면 그는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신다.세째로,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2)성령충만의 결과  검고 찬 쇳덩어리라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굉장한 열로서 붉게 달아오르는데 이와같이 우리의 존재도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예리해지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충만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몇가지 축복을 말해 보자.  첫째,성화의 삶이다.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며 성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그가 우리의 심령속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때에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는 것이다.  둘째,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과 기쁨,화평과 절제 등을 통해서 성령의 지배를 보여준다.이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좋은 기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시는 초인간적인 성령충만의 열매들로써 성품과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풍성히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세째,관계의 변화이다.먼저,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한다.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그리고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며,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엡5:22-28).또한 엡6:1-4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며 마지막으로 엡6:5-9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네째,전도이다.성령충만의 결과는 다른 방면에도 많이 나타나겠으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한다.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그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그들의 영혼들의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섯째,은사의 체험이다.행2:38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한 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주심을 의미한다.은사주심은 성령님의 주관적 역사이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Ⅴ.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1.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하게 보는 견해  오순절주의자들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개종과 회개를 뒤이어 오는 경험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을 하는 신자는 성령을 전적으로 받아서 주를 위한 사역에 능력을 얻는다고 한다.그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된 체험으로 보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시한다.  고전12:13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추가적 은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사건이다.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12:13절 후반의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를 신자 안에서 후속적 사건으로서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령세례는 성도의 구원경험에 있어 단회적인 경험이요,예수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이며 성령충만은 예수믿은 후의 성도들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구별되는 제이차적인 세례로 보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신자들을 "완성된 신자"와 "미완성 신자"로 나누어 신자들간에 화합과 일치를 깨뜨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염려와 위험성이 크다.  R.A. Torrey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로 똑같은 것인데 두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Torrey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충만하다"는 말이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성령에 의해 사용되어진 성경의 요어를 불확실하게 사용하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곳은 없다.하지만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은 나타난다.  2.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3000명에게 성령이 임했다.그들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인 것이다.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고,단하나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며,반복도 상실도 없다.하지만 성령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며,계속적이고 영속적인 결과와 규범을 뜻하며,반복도 상실도 가능한 것이다.결국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충만은 반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충만에 관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엡5:18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해야 한다는 명령이 나온다.여기 나오는 동사의 네가지 유의점을 알아보자.  첫째,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즉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느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다.이 글은 전 기독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즉,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세째,그 동사는 수동태이다.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중요한 조건은 무조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네째,그 동사는 현재시제이다.헬라어에서는 명령법이 현재형이면 그 행동은 계속적인 것이다.즉 계속적인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성령세례는 일회적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둘째,성령세례는 체험적으로 느낄 수 없으나 성령충만은 원할 때에 주시는 체험이다.  세째,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명령이 없으나 성령충만의 명령은 나온다.  네째,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성령충만은 그렇지 않다.성령충만의 명령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이다.  다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지체가 되게 하지만(롬6:3-4;고전12:13) 성령충만은 말씀 증거와 봉사를 힘있게 하도록 한다.  여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조건이 전혀 다르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나 받으나 성령충만은 개인적 죄에서 떠나 성령에게 전적으로 맡겨질 때 이루어진다.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은혜의 사역이요 성령충만은 은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의 증거로 보아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Ⅵ.결      론  솔직히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비록 글의 방법이  전통적인 견해 즉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견해 역시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보면,  첫째로,체험을 너무 무시한다.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오순절로부터도 가정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세째로,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네째로,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이것을 Stott와 홍정길 목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설명한다.물론 완전하게 인정은 안하지만 은근히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개혁주의의 견해에 몇몇 모순점이 발견되지만 따르게 되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크기 때문이다.물론 오순절운동이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을 깨트렸고,타락되는 교회를 갱생시켰으며 기존 교단의 침체와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뒤따른다.  첫째,오랜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소위 성령세례적 은사와 방언에 의해서 유지된 적은 없다.그것은 방언과 은사가 아닌 보혜사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둘째,삼위일체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세째,체험을 너무 강조하므로 유치하고 천박하다.  네째,체험을 강조하지만 자기네 것만 내세운다.  다섯째,성령충만을 감격 일색으로 대치하려 한다.  어느 쪽의 견해가 옳으냐 하는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자면 많은 연구의 땀을 퍼붓는 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왜냐하면 이 문제의 답은 '연구'보다는 '시간'에 달려있을테니까.아니 어쩌면 주님이 오실 그 때까지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게 굳이 한 쪽의 견해를 택하라고 한다면 내 좁은 지식으로 바라보고 연구한 결과 성경에 비추어 볼 때,비록 모순점은 있지만,좀더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견해 즉 성령세례는 곧 중생이며 성령충만과는 구별되어진다는 성령론을 택하면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 참 고 문 헌 *1.국내 서적김은종, [문답식 성령론]. 서울 : 목회자료사, 1981.박윤선, [사도행전]. 서울 : 영음사, 1974.      , [성령신학]. 서울 : 영음사, 1984.박형용, [사도행전]. 서울 : 성광문화사, 1984.신성종, [신약신학].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옥한흠편, [한국교회와 성령운동]. 서울 : 정음문화사, 1984.        ,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서울 : 정음문화사, 1984.이상근, [고린도전서 주해]. 서울 : 예장총회교육부, 1981.조용기, [성령론]. 서울 : 서울서적, 1989.황승룡편, [신학적 성령론]. 서울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1989.윌리엄 A.콜드웰, [오순절 성령세례]. 서울 : 영산출판사, 1976.2.외국 서적Berkhof Hendrik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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