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성령과 종말론
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 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구약은 말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 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게르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그가 성령의 사역의 우주적 보편성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모든 각 개인 안에 지금 거주하고 있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윤리적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과 신자들의 양자됨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로마서 8:3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다.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알려 주신다.
신약 시대에 목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가축에 인을 찍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구별을 지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상은 동시에 종말론적인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성령을 인으로서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 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긴장은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투쟁은 현재의 생활 전영역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자화상(self-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소유했으며 동시에 아직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완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비록 긴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성장으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은 새로운 자아는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자아이다.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되어 있다.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는 완전히 불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평가하는 것이 못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구속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가 만드신 것들을 파괴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로부터 깨끗게 하사 완전케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땅이 영광스럽게 새로워진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상급과 기쁨의 언어로 신약이 묘사하고 있는 연속성이 있다(참조. 고전 3:34; 마 25:21,23).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중생치 못한 자들이 만든 산물들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완전한 기독교 문화가 달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단지 완성에 가까이 가려 하는 추구의 땀일 뿐이다.
다가올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다가올 세계의 영광이 현 세계의 영광보다 훨씬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승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 중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왕국으로 들어가시며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룬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 죄, 죽음에 대하여 과거에 이미 결정적 승리를 얻으셨기 때문에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시작된 구속적 과정의 완성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은 이 마지막 날들에 발생하고 있는 것의 완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11)
제7장 육체의 죽음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 보자.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는가?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몇몇 기독교의 스승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인 수도승인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된 펠라기우스의 제자 젤레스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 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은 셀레스티우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칼 바르트도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죽음의 심판이란 측면과 자연적 죽음의 측면을 구별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본다.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왜 성경은 철저하게 죄와 죽음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가? 만일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요 죽음이 자연적 귀결이라면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 했던 바와 같이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신자와 불신자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다. 창세기 2:36~17을 보면,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서로 별도의 분리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 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 지고 있다. 로마서 5:12에서는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 신자는 아직도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3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제8장 영혼 불멸론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그에 대한 종교적 상대역인 유신론의 시대였던 18세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혼불멸 개념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때까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심지어 칸트도 실천이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선결조건으로서의 영혼불멸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던 것이다.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여러 형태로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희랍 등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다. 플라톤(P1ato, BC 427-347)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적 옷을 입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은 두 개의 구별되는 특징적인 본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견해에 있어서 영혼불멸 사상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불멸한 본체로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athanasia와 aphtharsia가 일반적으로 immortality(영혼불멸)로 번역되고 있는데, 신약은 athanasia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는 “오직 죽지 아니함을 갖고 있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ahtanasia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재림 시 일어날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다가 변화될 사람이나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은 신자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관해서 일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이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소유물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어지게 될 수여물이다. 불멸은 단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 아니라 전인으로서 인간이 갖는 특성이다. 영혼의 불멸을 나타내는 어떠한 시사도 없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다. 몇몇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이란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하면서 변호해 왔다.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불멸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 벌코프는 “영혼불멸의 사상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상당히 신중하다. 그는 “성경은 많은 말로 영혼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교리를 세워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서로 상반된 견해들이 제시되야 하는가?
1)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은 “영혼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 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해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적용된 일이 없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보다 더 높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갖고 있고 파괴될 수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신성한 본체라고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 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다. 인간속에는 피조되지 않은 영혼이란 없다.
3)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애매케 하는 혹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하는 식의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며 경고하고 있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이란 영혼이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성경은 육체도 영혼만큼 실질적이다. 육체가 영혼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떠나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신자들의 미래적 축복은 그들의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최상의 풍요한 상태로서의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불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영혼이 불멸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은 성경의 강조점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에 반대적 사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제9장 중간상태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취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견해가 계속 가르쳐져 왔으며 특히 연옥에 관한 교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루터보다 이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반대하면서도 중간상태의 교리는 계속 지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교인들(Anabaptists)은, 영혼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란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 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이후로 중간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반영되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이라고 불리우는 죽음의 영역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 래드는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 방법이다”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올은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데 상징적으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스올은 때때로 무덤이라고 번역되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는 스올이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 형벌의 장소 혹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구절들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구절들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약의 가르침을 보완하고 확장하고 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은 인간은 사망시에 멸절되지 않고 음부(하데스)나 락원 또는 아브라함의 가슴이라고 불리는 축복의 장소 중 어느 한 곳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데스는 스올의 70인경의 번역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음부(하데스)의 의미는 구약에서 의 음부(스올)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스올의 개념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중간기 동안의 랍비 문헌들이나 몇몇 묵시문학적 작품들에는 지하세계에서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사이에는 공간적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몇 신구약 중간 시대의 작품들 속에는 하데스(음부)란 단어는 지하세계에서 불경건한 영혼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데스”란 단어의 신약성경의 사용은 어느 정도 이런 개념의 발전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7,31에서 이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그가(그리스도) 음부(하데스)에 버림되지 않았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데스(음부)는 시편 16:30에 나타난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단지 죽은자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즉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았다. 하데스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1) 인간은 사후에 완전히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간다. 2) “죽은 자들의 영역” 속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사망이 목자가 될 것이며, 사망의 돌봄 아래 그들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신약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은 후와 부활 전 사망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영역에 내버림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들이 스올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불경건한 자들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9은 중간상태 기간 동안에 불경건한 자들이 어떤 상태 제 놓여 있게 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NIV).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1) 우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낙원이란 단어(고후 12:4; 계 2:7)를 보자. 고린도후서 12:4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환상 중에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낙원은 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7에서는 하나님의 낙원 속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여기서도 낙원은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바로 그날 하늘의 무한한 축복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그의 왕국에 들어가게 될 때인 그의 재림 시에 그가 강도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히려 그날, 즉 그가 죽는 날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게 되는가에 관하여 간단하나마 설명해 주고 있다. 영혼이 잠잔다는 사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중간상태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구절은 빌립보서 1:21-23이다. 사후에서는 영혼이 수면을 취하거나 혼이 전혀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간상태에 관한 세번째 중요한 구절은 고후 5:6-8이다. “중간상태”와 “부활육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모두”의 관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비록 부활이란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눠지지만 신자의 미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양쪽의 국면들은 모두 하늘의 영광이라는 경험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준다. 고린도후서 5:6-8이 보여주는 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실제로는 남과는 떨어져 있는 일종의 순례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다.
제10장 재림의 기대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며, 이러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 전체를 두루 다니며 복음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복음전도 여행이 끝마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며 종말론적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자들이 전도사역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것이 첫번째 “재림의 지연”이며, 예수께서는 그가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예수님은 이 경우에 마저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착각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덜 진보적인 최근의 어떤 신학자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조속한 재림을 예언함에 있어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오스카 쿨만이 이 그룹에 속한다. 그는 재림이 가까왔다는 초대교회의 기대는 “그 전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결정적인 전쟁이 이미 발발했다는 확신이 일단 있게 되면 그 전쟁은 그 전쟁의 종식 날짜를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자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은,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될 제자들의 미래적 활동들에 관계된 교훈들과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일이 있는 예언적 원근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으로 이 구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논의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들”은 주님 당시의 사람들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재림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경성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그의 재림의 징조들을 제시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을 위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이런 징조들에 대해서도 정신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깨어 경성한다는 것은 준비함을 의미한다. 즉 항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래드는 ‘주의하라’(watch)는 단어는 ‘...을 찾는다, 기다린다’ 는 뜻이 아니라 깨어 있다’ 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사상에는 어떠한 변천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는 그는 곧 다가올, 지연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즉 너무나도 빨리 올 재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것이다. 후기 서신들에서는 그가 이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그 재림을 대비한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를 희망했다고 말하는 것과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의 죽음 이전에 일어나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추정하려는 어떠한 흔적이 전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명심해야 한다.”(리덜보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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