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은 음란하고 부도덕했을까(요4:1-42)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마리아 여인은 음란하고 부도덕했을까(요4:1-42)

 

 

당시 이혼은 남자들만의 권리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과연 도덕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인의 이야기일까요?

일부는 이 여인을 여성 해방적인 주도권을 가진 여인으로 보기까지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다섯 번 결혼한 여인이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동거인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복잡한 혼인 관계와 동거는 오늘날 이혼율이 최고로 높은 미국 사회에서조차도 드뭅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사회라 할지라도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시각입니다.

 

첫째, 그녀가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여인이라는 사실이 성립되려면 먼저 그녀가 이혼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어야만 하지만, 당시 철두철미하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이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문화에서 여성에게는 이혼의 권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를 생각해 보시면 엇비슷한 상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소박당하는 여인은 있어도 남편을 버릴 수 있는 권리가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사회였지요. 고대 유대 문화에서 여성은 남자와 같은 이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동물보다 나은 재산으로 취급당했습니다. 당시 여성은 대체로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처럼 취급당했고 그녀는 보호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상상입니다만 그녀의 모든 남편이 그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계속 과부가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계대 결혼의 경우 그러합니다. 계대 결혼이란 자녀 없이 죽은 자기 형제의 대를 이어 주기 위해 친형제나 친척 중 하나가 그의 부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 주는 풍습을 말합니다(막 10:2~12; 고전 7:15~16).

물론 남편 다섯이 모두 죽은 계대 결혼이란 매우 비현실적일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녀가 무척 장수했어야만 합니다. 본문은 그녀의 나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젊은 여인인지 노년의 여인인지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노년의 남자들은 젊은 과부를 쉽게 첩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과부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폭이 좁았기 때문에 그녀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매춘하든지 혹은 나이 많은 사람의 부인이나 첩으로 사는 것은 허다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과도하게 짧았던 당시에 과부들은 많았고 여러 번의 재혼은 흔한 일이었답니다. 문화인류학적인 연구는 당시 로마제국의 평균수명이 만으로 29세에서 31세 사이라 추정합니다. 이는 당시의 것으로 발견된 공동묘지의 수많은 묘비에 쓰인 생일과 사망일을 근거로 추정해 낸 나이입니다. 이는 병균의 존재조차 몰랐고 위생 개념이 약했으며 의학이 원시적이었고 사람들의 영양 상태가 안 좋은 탓이었답니다.

 

혹시 그녀는 음란한 창녀 같은 여자가 아니라 피해자는 아니었을까요?

신명기 24장 1절은 부인에게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할 때 이혼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물론 본문에 명시된 것과 같이 이는 남자들의 권리였지요.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이혼율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사마리아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수치 되는 일'에 관한 해석은 다양했습니다. 유대인의 경우 보수적인 샴마이학파는 오직 간통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했지만, 더욱 급진적인 힐렐학파는 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외간 남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저녁 식사를 망친 경우, 개한테 물린 상처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더욱 매력적인 여인을 만난 경우도(아마 아내의 부족함이 원인이라 생각되어) '수치 되는 일'로 간주하여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대 유대 문헌이나 사마리아 문헌에서 여성의 이혼 권리를 논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남성들에게 여러 여자를 거느릴 권리로 일부다처제라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던 남자들을 위해서도 이혼 권리를 통해 부인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법이 지지해 주었지요.

 

그렇다면 5명의 남편 모두 그녀에게서 이혼의 이유가 되는 '수치스러운 부분'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전 남편들은 그녀보다 더 젊고 매력적인 여인을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더는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매력적이지 않거나, 즉 그들의 욕망을 위해 부적당하다고 여겨 그녀를 버리는 일을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서슴지 않게 행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 사회는 법적으로 남자의 편에서 남자를 보호하고, 부인된 여성을 학대하고 버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답니다. 그녀는 결혼의 실패, 여성에 대한 사회 경제적 압제, 빈곤의 희생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버림받은 여인'이라는 증거 역시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녀를 음탕한 창녀 같은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둘째, 우물물을 길어 간 시간을 놓고 그녀가 소외당하던 부정한 여인이었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녀는 제6시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했는데 이를 유대인의 시간으로 보면 정오입니다. 로마 시간 법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방식이고 유대 시간은 낮을 열두 시간으로, 밤을 4경(1경은 약 3시간)으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로마제국이 통일된 시간을 사용하기 전에 나라마다 고유한 시간 법이 있었습니다.

해가 중천인 이 시간에는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자신의 부도덕한 과거와 삶으로 말미암아 남들의 눈을 피해 그 시간에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요한복음의 시간이 로마 시각이 아니라 유대 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일 요한복음의 시간이 그냥 평범한 로마 시각이라면 그녀는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물 길러 오는 시간에 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남들의 눈을 피해 정오에 물을 길러 왔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시선은 정당한가요? 이미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통 받는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사람들의 시선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속에 끝까지 무명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그녀를 그냥 사마리아 여인으로만 기억합니다. 사마리아라는 표현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혹은 유대인의 원수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계속 생리 중에 있는 여자'로 낙인찍었을 것입니다(m.Nid 4:1). 이 말은 율법에 따라 영원히 불경하고 더러운, 가까이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없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를 대하는 예수님과 상반된 태도입니다. 물론 그녀가 성녀였다거나 의인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해도 근거 없이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만드는 것은 참으로 생사람 잡는 일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왜 영생의 물인 생수를 구하는 그녀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모리스(Morris)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 하신 말씀이 여인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Morris, John, 234). 그러나 예수는 그녀를 꾸짖으신 적이 없고 죄에 대한 인정이나 회개를 촉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실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상담학적인 접근입니다. 그녀가 살기 위해 의지했던 것, 그것은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매번 실패를 경험합니다. 어느 남자에게도 그녀가 원했던 안정되고 지속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그녀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자신이 영생의 생수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생을 교리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요한 문헌에서 영생은 참사랑에 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영생을 미래에 얻을 것으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요 5:28~29; 6:27; 12:25)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현재 실현될 수 있는 삶으로 소개합니다(요 5:24). 죽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망을 겪습니다.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보면 삶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더 삶을 힘들게 하는 고독과 삶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서, 아니 이미 죽음보다 더한 상태에 처한 것이지요. 실제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망, 그것은 사랑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만나는 남편마다 버림받은 그녀는 사실 사망보다 더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그녀를 참된 생명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녀 삶의 희망은 남자들이 아닌 이제 예수님이 되는 것이지요. 나가는 말 사마리아 여인이 필요했고 갈급하였던 생명과 삶의 안전은 남편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수, 즉 영생의 삶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안전은 불안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만이 참사랑, 불멸하는 행복을 보장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사마리아 여인을 부도덕한 여성으로 보는 것은 근거 없는 선입관으로 현대적 시각을 당시 문화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여성학자인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는 그녀를 음탕한 여자로 보는 것이 성경이 아닌 가부장제도에 맹종하는 것으로 여성들을 그들의 성(性)에 가두어 놓고, 그리고 그들의 성 자체를 비도덕으로 치부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Women in the Fourth Gospel and the Role of Women in the Contemporary Church." Biblical Theological Bulletin 12, 1982, 35~45).

 

그녀가 음탕하고 부정한 여자라는 증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그녀를 성적 죄의 포로로 산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꾸짖거나 회개를 촉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가 5번이나 결혼하고 또 지금은 동거까지 하는 이유에 대하여 본문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는 이혼할 결정권이 없었고 동거한 것조차도 그녀가 원해서라기보다는 그녀와 함께 사는 동거남의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녀는 오히려 남성 중심의 사회의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대 설교자들이여! 정확한 근거도 없이 그녀를 음란하고 도덕적으로 부정한 여인으로 만들어 그녀를 두 번 죽이지 맙시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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