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시장,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말씀의 칼

증권시장,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말씀의 칼

요즘 증권시장이 난리도 아닙니다. 매일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돈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들고 있답니다. 저 역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1분단위로 증권시황판을 들여다 봅니다. 주가가 오를 때면, 마냥 행복하면서도 조금 더 올랐으면 하는 욕심에 시달리고, 떨어지면 미리 팔지 못한 자책과 후회에 시달립니다. 계속 돈을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들키고 또 들킵니다. 그런데 증권시황판 한 가운데를 가르고 들어오는 검이 있습니다. 번쩍 검의 섬광이 비출 때, 아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아주 잠깐 알게 됩니다.


어떤 보험의 광고처럼 아이들이 재롱을 부릴 때면,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방안 가득할 때면, 나에게 다가와 사랑한다고 애교를 부릴 때면, 문득문득 죽기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죽으면 이 귀한 아이들을 누가 돌볼까 걱정도 합니다. 그래서 또 한번 들통납니다. 믿음 없음이.....돈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죄의 종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한 가운데를 가르고 들어오는 검이 있습니다. 이 또한 내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가상현실임을 아주 잠깐 알게 합니다.


이렇게 가상현실을 비집고 들어온 양쪽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섬뜩하게 합니다. 성경은 말씀 자체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섬뜩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위로와 치유와 평안을 느끼고자 합니다. 주가 때문에 혼탁한 마음을 다스리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도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길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성경은 자체적으로 인간을 해부하는 도구로써 말씀의 성격을 공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해부된 자신을 추스려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쓰을  모질게 이용하고 있는 꼴입니다.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한 은혜입니다. 즉,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베어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 구절마다 피가 솟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책이 아니라 피입니다. 그 피가 어떤 피입니까?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려진 죄없으신 분의 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우리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아들의 피를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릴수 밖에 없었는가가 항상 뒤따라 다니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외우고 있는 정답을 입으로 발음해 내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떻게 내 육체를 갈라내고 나도 모르고 있었던 죄를 어떻게 공개하고 있는가와 함께 그 죄를 이미 단번에 영원히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동시에 쏟아내리고 있음을 매일 매일 뒤통수 맞듯이 깜짝 깜짝 놀라도록 조치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와 예수의 피를 목격하고 있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은 십자가와의 단절, 결국 나의 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부활의 삶을 살게 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터져 나오게된 사건을 날마다 확인하고 놀라고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삶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그 죽음은 성도의 죽음이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을 소각하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죽음이 어떻게 영생을 허락하는 부활의 전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부활을 전제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정면으로 충돌해서 발생한 그 죽음만이 참 의미있는 죽음이며 그 죽음이 곧 영생을 얻게하는 부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과 단절된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유발한 죄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만이 끊을 수 있는 강력한 죄의 실체를 날마다 깨닫게 하고 그 죄를 이기신 주님의 피사랑을 날마다 찬양케 하는 힘이 바로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힘들고 외롭고 서러워서 어떻게 한번 주님의 능력을 차용하여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떵떵 거리고 싶은 욕망의 배설물을 닦아내는 휴지 같은 성경 묵상까지 주님의 갈라진 살점이 받아내고 있습니다. 죄를 모르면 은혜도 알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면 의의 종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바로 내 안에 있는 죄를 짜내고 있습니다. 가면을 벗겨내고 윤리와 도덕이라는 화장을 지워내고 나면 그저  자기 몸뚱아리 하나 편하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죄인의 처절한 자기 사랑만 나오게 된다는 것을 세상살이가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세상살이를 통해 참 평안이 예수의 죽음이며 그것이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하는 유일한 능력인 것과 그것이 진짜 현실인 것을 드러내어 주는 주님께서 베푸신 배경색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 죄를 발견케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하신 예수의 피를 발견케 합니다. 두 가지 모두를 놓고서 모든 공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돌아가도록 조처하십니다. 세상살이가 나의 죄를 모두 꺼내 놓을 때 이는 원망하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이 그렇게 많음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의의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 지를 보여주시는 단초들입니다. 주님께서 살아서 여전히 일하고 계신 증거들입니다. 성도의 존재이유입니다.


사도요한은 이제 가상현실을 말씀의 검으로 베시면서 오실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 16)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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