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한 웨슬리의 구원론 /이용남 목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요한 웨슬리의 구원론 목 차
Ⅰ. 서 론 Ⅱ. 구원론의 역사신학적 배경 1. 루터적 배경 1) 루터의 구원론 2) 웨슬리의 루터 비판 2. 칼빈적 배경 1) 칼빈의 구원론 2) 웨슬리의 칼빈 비판 3. 알미니우스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2) 은총의 낙관주의 4. 동방교회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2) 신앙과 선행 3) 점진적 성화 4) 완전 5. 어거스틴적 배경 1) 선재적 은총 2) 은총의 양면성 6.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적 배경 7. 뮌쳐적 배경 1) 뮌쳐의 구원론 2) 웨슬리와 뮌쳐의 구원론 비교 8. 역사신학적 배경에 관한 종합과 분석 Ⅰ. 서론 웨슬리는 종교개혁가 루터, 칼빈, 뮌쳐의 구원론의 요소들을 모두 종합적으로 수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만 모무르지 아니하고 동방 교부들, 알미니우스주의, 어거스틴, 성공회, 로마 천주교회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으로 체형화함으로,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종합적이며 가장 에큐메니칼적인 구원론을 만듦으로써 종교개혁 구원론을 완성한 신학적 대가임을 본 연구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웨슬리 신학 저술들이 대부분 조종남 교수나 한영태 교수 같은 조직신학자들에 의해서 씌어졌기에 웨슬리 사상의 역사 신학적 배경과 역사신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웨슬리 신학의 진면목은 역사신학적 배경 속에서 드러난다. 루터와 갈빈과 어거스틴과 비교할 때에 비로소 웨슬리 사상의 독특함과 위대함이 잘 나타날 수 있다. 필자의 전공 분야가 역사신학이고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이기에 역사신학적 배경,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사상적 배경 속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적 업적과 공헌을 제대로 밝혀 그의 구원론과 신학 사상이 역사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증명하고자 한다. Ⅱ. 구원론의 역사신학적 배경 1. 루터적 배경 1) 루터의 구원론 루터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본문이 롬 1:17이다. 그 구절 전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iustitia)는 능동적인 의(active rigtheousness), 곧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의로만 생각하였다. 그 무서운 심판 앞에 죄인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큰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Drankeit zum Tode)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 죄인을 무서운 공포와 절망에 빠뜨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능동적인 의(active righteousness)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passive righteousness), 곧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루터의 서재가 ‘탑의 경험’(Tumerlebnis) 이라고도 부른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남 용서의 은총ㅇ르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ustitia)에서 그리고 바울의 롬 1:17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그의 라틴어 저술 편집 서문에서 고백한다. 그래서 롬 1:17을 전에는 가장 미워하였는데 이제는 가장 사랑하게 되었으며 파라다이스(paradise)의 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사변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 뿐이다”(crux est sola nostra theologia)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임을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십자가의 은총-성령의 역사-은 말씀 안에서(in the Word), 말씀을 통하여(through the Word), 말씀과 함께(with the Word) 우리에게 다가온다. 말씀 이외의 신비적 체험, 곧 꿈과 환상을 통하여 오지 않는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의 다미선교회와 같은 주관적 신비적 체험 중심의 신앙 운동을 비판받아야 한다. 루터는 바로 십자가 신앙을 통해 중세인을 자유하게 하였다. 율법과 선행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였다. 고해성사의 짐에서 자유하게 하여 모든 평신도도 제사장으로서 직접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게 하였고, 신부만 떡과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고 하여 평신도는 떡만을 먹게 하였던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모든 평신도도 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해방시켰다. 그리스도의 피가 평신도들의 죄를 위해서도 흘려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둘 모두를 주셨으니 당연히 둘 모두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라틴어 예배 의식의 노예에서 벗어나 평신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 예배 의식으로 바꾸었고, 미사에서 자유하여 설교를 듣는 청각적 예배로 개혁하였다. 또한 신부만 성경을 라틴어로 읽던 모든 모순에서 평신도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신도 성경 읽기의 해방 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평신도도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직자들도, 결혼할 수 없었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켜 수도사와 수녀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소개하기도 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수녀를 남자들에게 소개하다가 상대자가 없자 자신이 결혼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 운동은 철저히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에 기초하여 미신과 타부와 맹종과 형식과 율법과 고행과 금욕에서 중세인을 해방시킨 것이다. 루터는 그 유명한 “기독자의 자유”에서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를 중요하게 여긴다. 복음을 믿음으로 얻은 자유는 방종과 향락의 기회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성령의 노예가 되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한다. 변증법적 성격으로 크리스천의 본성을 루터는 설명한다. 루터는 롬 8: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를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짐을 지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주장한다. 참 신학자는 책을 읽고 명상하고 사변하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고 삶과 죽음, 비난당함과 고난 당함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루터는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1519) 이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어직 십자가만을 붙잡과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본 회퍼는 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라고 풀이한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안일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수도사적 경건(cheap grace)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원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한 것은 값비싼 은혜의 결단이라고 이해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축복과 형통-만을 추구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값비싼 은혜를 무시하고 있다. 또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ㅈ러규 속에서도 침묵하시고, 외면하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Hidden God: Deus Absconditus)은 숨어 계시는 방법으로 현존하신다(Hidden presence of god: Deus Revelatus in Deus A- bsconditus). 십자가라는 옷을 입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현존하신다. R. Regin Prenter는 “모든 선한 것들은 십자가 안에 그리고 십자가 아래 숨어 있다”(omnia bona in cruce et sub cruce abscondita sunt)고 루터를 해석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의존적으로 계시된다. 하나님의 분노와 자비가 동시에 계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벌의 분노(ira severitas)와 자비의 분노(ira misericordiae)이다. 십자가는 자비의 분노다. 다만 신앙만이 계시된 분노를 나타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식별한다.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이성-중세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theologi- agloriae)-은 이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형벌의 분노와 자비의 분노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영광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강함과 영광과 능력 속에서만 계시되기를 원하고, 십자가 안에서의 포기와 패배-궁극적으로 승리하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루터는 또다른 변증볍적 해석으로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속성에 낮선 행위’(opus alienum)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행위’(opus proprium) 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에서는 도저히 분노하고 정죄 하실 것 같지 아니하나, 그렇게 정죄하고 분노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답지 않은 행위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부당하게 정죄 당하고, 연약하게 창피 당하고, 어리석게 패배 당하고, 철저히 죽음을 당하셨다. 바로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스캔들 속에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과 구원이 숨어 있는 방법으로 계시되었다.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이 끝장나는 십자가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루터는 “마리아 찬양”(Magnificat) 주석에서 눌린 자, 겸손한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를 낮추시고, 심판하신다고 해석한다. 여인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혁명적 선포가 외쳐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인간의 강함이 끝나는 곳에, 하나님의 강함이 시작된다. 억눌림이 끝날 때, 위대한 강함이 약함 아래 숨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바로 이 루터의 해석에서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을 전개한다. 몰트만은 엘리비젤의 “밤”에 나타난, 숨어 계신 하나님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연결짓는다. 원인 모르게 죽어가는 유태인의 죽음 속에서 지금도 신음하고 계신느 삼위일체 하나님을 해석한다. 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국회로 가는 루터의 결단의 클라이막스에 십자가의 신학(Theollgia Crucis)이 서 있다고 몰트만은 해석한다. 2) 웨슬리의 루터 비판 웨슬리는 바로 이러한 루터의 의인화와 십자가 신학을 그의 신학의 기본적 전제로 삼는다. 실상 웨슬리를 변화시킨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사건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었다. 이 체험 이후로 웨슬리도 루터처럼 신뢰하는 믿음(fiducia)으로 바뀌었으나, 이 체험 이전에는 웨슬리도 종교개혁 신앙 이전의 루터처럼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assentia)으로 구원 얻기를 열망하였다. 또한 회심 이전의 웨슬리는 종교개혁 신앙 이전의 루터처럼 많은 선행과 공적을 쌓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기를 열망하다가 루터처럼 철저히 절망하게 되었다. 옥스퍼드 신성구락부 시절 1723년 4월부터 클레이튼(Mr. Clayton)의 제안에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하고, 몰간(Mr. Morgan)의 제안에 따라 일주일에 1~2회씩 감옥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사람들을 방문하여 구제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오직 한 책의 사람”으로 성경을 사랑하였고, 신성구락부는 “성경벌레” 혹은 “성경 크리스천”(Bible Christians)이란 별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런 열심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하기보다 좌절에 빠졌고. 신성구락부의 핵심 회원인 몰간이 지나친 열심히 정신 질환을 일으켜 죽음으로써 “슬픔의 아들들”이란 비난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항해와 영국으로 돌아오는 항해에서 두 번씩이나 풍랑을 만났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 자신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으나 찬송과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모라비안 평신도들의 신앙 자세에 크게 자극 받았다. 그의 모라비안 친구 목사 스팡겐버그(Gottlieb Spangenberg)가 웨슬리에게 “당신은 예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인류의 구세주”라고 대답했다. 다시 스팡겐버그가 “당신의 구세주임을 믿느냐?”고 물을 때, 웨슬리는 “제발 나의 구세주이기를 바란다”(may be)라고 확신이 없이 불확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합키(Sophy Hopkey)와의 사랑에도 실패하였다. 그런 절망과 좌절의 상황 속에서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날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움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악들을 제거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 이성이나 선행의 공적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로 이런 루터적 신앙 체험이 일어나게 될 때, 홀랜드(William Holland)-웨슬리와 뵐러가 중심이 되어 만든 페터 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의 창립 회원-로 주측되는 모라비안 청년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마음 속에서 역사 하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웨슬리의 회심은 영국 성공회적인 회심이라고도 해석하고, 청교도적인 회심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나타난 사실에 있어서나, 고백에 있어서나 그의 회심은 루터적. 모라비안적 회심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구원론의 출발은 철저히 루터적. 종교개혁적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 사상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더욱 발전시킨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 ‘의로워진 죄인’ ‘용서받고 의로워졌으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은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imputation(extra nos) 뿐 아니라 impartation(in nobis)까지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고 법적인(forensic)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마저도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야 한다. 따라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루터에게 선생은 의로워진 크리스천에게 자동으로 나타나는 좋은 열매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좋은 나무에서 저절로 선행의 열매가 맺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따라서 루터는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는 평가 절상하고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서도 중요시 하였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얻은 것이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인정받은 것-야고보서가 주장하는 대로-은 100세 때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의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비판한 것은 믿음 이전의 행함이라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웨슬리는 루터적 모라비안주의를 공격하는 그의 논문, “Thought 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전가하시는 의는 전혀 어떤 성결도 요구하시지 않고, 욕망과 온갖 부정결함을 제거하는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런 교리는 율법폐기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두려워했다. 웨슬리의 논적이었던 허비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래 어떤 성도도 율법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웨스리는 이러한 율법폐기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 죄 짓게 만드는 분-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완전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이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는 말했다: "당신의 완전한 본성의 파트너로 나를 당신 안에 있게 하소서. 새로운 죄 없는 피조물로...”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확신시켜 준다. 웨슬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선행은 구원의 풍성함을 위해 필요하다. 선행을 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말한다: "선한 생활은 사랑에 의해 역사하는 참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웨슬리는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처럼 “신앙은 선행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믿자마자 그는 선행으로 존경받게 될 것이다”고 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사랑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과 Joseph Ben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성령의 열매의 풍성함을 크리스천의 완전과 동일시한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준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우리를 신적 본성의 참여자로 만든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고,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증거해 준다.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증거로부터 솟아 나온다. 최고의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예수의 영적 신부로 성화 시킨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On the God's Vineyard)에서 한편으로 로마 천주교회가 성화를 강조한 반면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또 한편으로 루터는 의인화를 강조한 반면 성화에는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한다. 힐데브란트는 이렇게 웨슬리가 루터와 루터주의자들을 비판한 자료들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특히 웨슬리는 평생 모라비안주의자들과 논쟁하였다. 모라비안의 센터인 헤른후트를 방문한 후 그들의 정숙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모라비안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 레인 신도회에서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진젠돌프와 웨슬리 사이에 완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진젠도르프는 루터의 ‘simul justus et peccator'에 입각하여 죽기전에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는 완전(ingerent and imparted righteousness)이 불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완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근거하여 죽기 전에도 가능함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완전이 아니라 모든 성도도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뿐 아니라 성도 자신의 본성 안에서도 거룩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진젠도르프는 성화는 의인화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순간적으로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화된다고 하였다. 또한 모라비안 목사로 페터 레인 신도회에 와서 일했던 몰더 목사와 웨슬리 사이에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거룩함‘(imputation)과 ’능동적으로 본성이 실제적으로 변화되는 거룩함’(impartation)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몰더는 성례전은 믿는자들만을 위한 성만찬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믿는 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이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몰더는 거룩함은 수동적으로 전가됨으로 다가오기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imputation 될 뿐 아니라 impartation되어지기에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pursuit of holiness)고, 다시 말해서 순간적으로 부어질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진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만찬 뿐 아니라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 등도 은총의 수단이 됨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다음에는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신앙의인화 이전에도 성만찬,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가 신앙의인화 은총을 받는 수단이 된다. 선재적 은총으로 이런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열심을 내듯이 이런 열심히 마음의 문을 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열심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디까지나 은총으로 다가오는 선물이다. 이 선물인 믿음의 은총이 오기까지 가만히 정숙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사모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믿음 이전의 행동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은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라비안주의나 루터 신학은 이를 거부한다. 신앙의인화의 은총이나 성화의 은총을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라비안주의를 웨슬리는 그의 설교들 “The Means of Grace," "The Spirit of Bondage and Adoption"에서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뵐러를 중심으로 하는 모라비안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 레인 신도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을 데리고 나와 런던에서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를 따로 1740년에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