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다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다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다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란 아주 간단한 문장이 성경 전체, 그러니까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계시록까지 죽 훑어보아도 발견되는 곳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자(글자) 그대로 보자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다 이루었다’가 성경 전체를 다 삼켜버렸기 때문에 성경 속에 그런 간단한 문장이 그렇게도 희귀하게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잘 보지도 않는 성경을 군대 제대 하고 읽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해도 안 되는 그리고 누구도 가르쳐 주지도 않는 신약의 검은 글자를 보면서 무슨 국어책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을 읽는 재미도 없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환자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죄인을 찾아가서 구원을 하고, 바리새인과 언쟁하시고 등의 내용이 제 마음에 그냥 글자와 문장으로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성경 읽는 내내 답답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조금 들어서 어느 정도 익숙한데 나머지 내용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고,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보다는 교회란 곳에 출석해서 사람만나고 청년회에 참여하고 기도원에 가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저 그렇게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면서 지낸 것 같습니다.



다시 본 글의 취지로 돌아와서 ‘다 이루었다’가 기록된 요한복음 19장30절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물론 다른 신약성경에도 그 의미를 담은 ‘다 이루었다’가 있지만...).



(요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기서 ‘가라사대’의 주체는 알다시피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유는 이 문장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니까요. ‘예수님이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그냥 급한 마음에서 읽게 되면 ‘다 이루었다’란 문장의 배후에 깔린 의미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제 같은 경우에는).



그냥 ‘그래, 그래, 맞아, 맞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지!’ ‘야, 신난다!’ ‘이제 내가 구원받은 것도 다 이루었다로 확정 되었네!’ 이렇게 이야기 할 공산이 큽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란 말의 전제가 구약에서 신약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다 삼킨 상태요, 마무리된 시점이요, 성도의 모든 것을 규정짓고 확정짓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요’라고 고백하는 죄인의 생명과 구원 그리고 영원을 그 문장 안에 걸어버릴 수 있는)문장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되어지고 또 자신에게 매일같이 물어봐야 할 것은 ‘다 이루었다’란 문장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다 이루었다’란 문장이 성경에서 의미하고 예수 자신께서 의도하는 것과 맞닿지 않을 때 한 마디로 ‘십자가에 깨어지지 않을 때, 즉 주님과의 피안에서 만남’이 없을 때 이건 지옥과 천국을 갈라내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다 이루었다’란 이야기로 말씀하니까 ‘나도 하면서’ 믿어주는 식의 신앙은 고려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메시야가 아니니까요. 단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확고한 토대위에 우리가 받은 주님의 믿음을 세울 수 있는 그 길은 성경을 통해 서로에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약속의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이루었다’란 말씀을 두고도 여러 갈래의 신앙색깔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직접 들어보면 그 ‘다 이루었다’가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저 자신부터. 나 자신도 사막의 신기루를 잡다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의 자리가 아닌 마실 물이 없어 혀가 타들어가는 그 부자인생의 자리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가고 계실 막다른 지점에서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인 채 그 영혼은 떠나갔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란 것은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과의 창세전 언약(약속)을 죄인을 대신하여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계명, 규례, 제사, 신앙, 사랑, 긍휼, 죄 그 모든 말씀이 창세 전 언약 안에 있던 것이 이 지상에서 마지막 약속의 자손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란 것이 될 것입니다.



(갈 3:19, 개역)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다’입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가 다 이루었지! 뭘 어쩌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 덩어리기 때문에 주체인 ‘예수’를 ‘다 이루었다’란 문장 앞에 세워놓고 자신은 뒤로 빠져나갈 궁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함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 이루었으니까!’ 하면서 자신은 ‘다 이루었다’란 글자(문자)만을 갖고 ‘예수’란 이름으로 또 다시 ‘자기이룸’이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란 말씀 뒤에 갖다 붙이는 유혹을 늘 썩어질 자기 몸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환경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연약한 죄인이니까요.



‘믿음의 주요’라고 하면서 자기가 만든 역사와 믿음만 남고 ‘주의 이름과 다 이루심’는 빠져버리는 우상신앙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를 ‘다 이루어졌다’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에 의해서, 주께로 다 이루어졌다’라고 한다면 죄인이 평생 감추고 싶은 속마음을 사정없이 폭발시키는 피 복음의 심판과 아울러 약속대로 건져내는 말씀으로 작동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주)로 말미암고 그(주)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다 이루었다’의 시작도 예수님의 피에서, ‘다 이루었다’의 성취도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의 마무리도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로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의미론적으로 ‘다 이루어졌다’란 하나의 ‘통’ 안에 완전히 갇혀버린, 이미 끝장난 인생, 어제도 오늘도 미래도 흐르지 않는 영원한 성도로 흠 없는 어린양 되신 분의 피의 감사를 한껏 풍기면서 성령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복음의 영원성 안에 ‘지금이란 이 시간’ 조차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임을 능동이 아닌 수동의 입장에서 성령으로 수용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 이루었다’에서 ‘다 이루어졌다’로 생각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성도가 입고 있는 몸이란 것이 시공간을 늘 의식하고 살더란 것입니다. 늘 역사의 산물을 자기 몸을 통해 이 무너지고 썩어질 지상에 쏟아내면서 살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자는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스스로 벗고자 하니 자살이고 죽음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죽음의 때까지 기다리자니 이 세상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입장이 주님의 거룩 앞에서 죽을 맛이고 말입니다.



마치 축구하는 선수가 상대편 진영에서 찬스를 노리고 골대를 향하여 골을 찼는데 마침 그 골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대 안에 있는 골을 잡고 그 골에다 뽀뽀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골이 들어 간 후 몇 분 후 자신의 실수로 자기 진영의 골대에 그만 자살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골을 밖으로 걷어 차버린 것입니다.



이미 골대 안으로 들어간 주님의 골로 끝장났음에 만족하고 인생 경기 중에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승점과 상관없이 주님의 골 안에서 자족하게 살아야 마땅한데 우리의 몸이 우리를 이미 의식하고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 덩어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날마다 썩어질 것에 집착함이 강렬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고 또한 그런 환경이 우리의 몸에게 강렬하게 요구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에 주님의 은혜가 자신의 속 사람을 덮쳐 와 은혜의 세계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성령 안에 일어나고 말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성도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은 십자가의 피로 가리움(덮힘)을 받은 것 때문에 칭함을 받는 것이지 마치 더러운 걸레를 세탁기에 표백제를 집어넣어서 깨끗하게 그리고 말갛게 때(죄)를 씻은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시 32:1, 개역)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에 ‘다 이루었다’가 ‘다 이루어졌다’란 문자적 전환이 아닌 의미론적 전환으로 성령안에서 넘어올 때 바울의 갈등과 탄식이면서 동시에 성도의 내적 갈등과 탄식이 정리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가리움을 받은 우리의 몸은 여전히 아담의 몸, 곧 옛 사람의 속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주님의 피의 개입으로 매일 같이 확인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입니다. 물론 성도가 그 무엇을 하든 그 앉고 일어섬은 다 새 언약의 피 안에 놓여 져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성령이 믿게 하십니다. 이러나저러나 성도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적인 부분이, ‘다 이루었다’, 육이 요구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전 약속으로 태어난 자라면 주님이 보실 때 사라진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여전히 새 언약의 피 안에서 요동할 뿐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원리와 사실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로 성도 자체를 의미론적으로 덮어버리면 성도는 늘 수동적 인생으로 놓여 진 채, 그러니까 능동으로 행하고자 애쓰는 죄악 된 주체인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채, 능동의 주체이신 주님과 수동의 자리에 성도가 있지만 따져보면 결국은 그 자리에도 여전히 주님이 계심을 통해서 성도 자신의 모든 수고와 섬김과 살아감을 ‘주님께서 다 하셨군요’로 고백하면서 육이란 질긴 일생을 ‘다 이루어졌다’로 마무리하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성령이 그 작업을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성도를 자기처소로 삼아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고와 인식의 전환이 문자, 즉 ‘다 이루었다’가 아닌 성령 안에서 의미적으로, 즉 ‘다 이루어졌다’ 된다면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다 가도 의미 없음을 깨닫고 오로지 능동이시고 여전히 수동의 자리에서 일하시는 주님에게만 죄인의 시선이 머물지 않을까.



* ‘이제 끝났다’ 무엇이? 죄인에게 의미를 둠에. 자신에게 의미를 둠에 아무 소용이 없더라. 처음과 마지막이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성령을 힘입어 시작하시고 마무리하셨으니까. It's finished. 언어적 문법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 하지만 죄인인 인간이 그 어법을 죄인을 위해서 사용하더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교회란 현실 앞에서...‘주님께서 다 이루었으니, 이제 남은 부분은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안다. 그것마저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끝냈음을. ‘나는 “다 이루었다”의 처음과 끝이다.’ (때로는 문자보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 ‘믿음’은 문자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부분이니)



(계 22:13, 개역)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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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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