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요한 웨슬리의 구원론 /이용남 목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2. 칼빈적 배경
1) 칼빈의 구원론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의 능력과 뜻-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받을 자의 예정(single predestination)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로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를 읽어보면 예정론보다 성화론이 더욱 강조된다. 역사신학자 제베르그(Reinhold Seeberg) 나 워커(Williston Wagker)도 그렇게 강조한다. 칼빈은 우리의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 열할, 곧 제 3의 용법(tertius usus legis)을 강조한다. 거기에 비해 루터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제 1의 용법)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성도가 율법의 요구에 따라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 직업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인 줄 알고 그 직업 속에서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직업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금욕적 직업 생활은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칼빈주의 신앙이 강한 나라들임을 막스 베버(Max Weber)는 증명하였다(“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빈의 성화는 사회적 성화 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곧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신정정치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개 이름을 “칼빈”이라고 짓기까지 모욕을 당함), 인내를 갖고 사회적 성화 운동을 실천했고, 저속한 노래를 금지시키고 카드놀이도 금지시키며, 76명을 귀양보냈고 58명을 처형시켰다(간음죄, 칼빈 모독죄, 혹은 Michael Servetus의 삼위일체 부인죄 등을 이유로). 루터는 두 왕국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교회)과 왼손 왕국(국가)의 정교 분리를 강조했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독재 권력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칼빈은 교회의 주인도 그리스도요 국가의 주인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곧, 세속국가도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와 국가 속에서 모두 실현되는 역사의 목표를 희망하였다. 정치적 왕국이 단순히 의식주에 관계된 현실 생활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거룩하게 경건하게 존경받을 만하게 살도록 관심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국가가 세워졌기에 국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가 시민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과 정치윤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아주 중요하다.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예외를 칼빈은 주장한다. 첫째로, 최고 통치자(왕) 밑에 있는 관리들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변호하고 백성들을 대변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어긋난 모든 것은 복종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신앙의 문제 뿐 아니라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통치자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를 때 복종새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써 예레미야, 다니엘, 나단, 사무엘, 호세아 등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불의한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국가가 하나님의 말슴대로 발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회적 성화 신앙과 저항 정신은 메리 여왕에게 항거했던 존 녹스, 히틀러 정권에 항거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칼빈의 정신은 한국 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도 계속 살아서 숨쉴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루터식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왔기에 비정치화 하려는 신앙적 입장이 초창기 선교사부터 현대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에게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이런 의식 구조가 칼빈의 정치윤리에 의해서 거듭나고 갱신되어져야 한다. 2) 웨슬리의 칼빈 비판 물론 웨슬리는 칼빈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칼빈의 율법의 제 3의 용법은(tertius usus legis)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칼빈 신학에 기초한 청교도 신앙의 집에서 자란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청교도주의적 교육 방법으로 자녀를 길렀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죽이고 복종하도록, 부모에게 철저히 복종하도록 훈련시켰으며, 다섯 살만 되면 주기도문을 가르치고 규칙적으로 어학을 공부시켰다. 수산나는 이러한 영적, 도덕적, 가정적 훈련(discipline)을 청교도적 정신에서 배운 것이다. 후에 “감리교도”라는 별명도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고 규칙적인 경건 훈련을 힘쓰는 것을 비난하는 데서 나왔을 정도로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평생토록 규칙의 사람, 훈련의 사람이었다. 그는 60년 이상을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한 규칙쟁이였다. 옥스퍼드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시간이 바뀔 때마다 기도하고 시편을 낭송하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하는 규칙쟁이들이었다. 또한 1725년 이후 경건 생활을 점검하기 위해 평생 일기를 쓴 사람이다. 웨슬리는 또한 칼빈의 율법의 제 3이 용법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그의 글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설교 “신앙으로 세워지는 율법” Ⅰ.Ⅱ, 그리고 “본성, 자연, 소유, 그리고 율법 사용”(The Original Mature, Property, and Use of Law)에서 율법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3편에 달하는 그의 산상수훈 강해 설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율법의 교훈이 적극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한다. 셀(George Croft Cell)은 이러한 웨슬리의 칼빈 신학적 수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나 알미니우스주의의 신인협조설을 거부하고 강하게 칼빈적 원죄론과 신앙의인화와 성화에 더 가깝다고 해석한다. 웨슬리가 받아들인 인간의 신앙 체험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서 칼빈적이라고 분석한다. 심지어 셀은 웨슬리의 구원론이 하나님은 모든 것(100%),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0%)으로 집중되어진다고까지 해석한다. 인간의 모든 선행도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셀은 웨슬리가 루터와 칼빈의 신앙의인화와 카톨릭의 성화를 종합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완전 사상을 칼빈적 예정 사상에 예속시킨 것이라고 왜곡되게 해석하였다. 이런 셀의 해석은 웨슬리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카페지(Allan Coppedge)는 그의 책 John Wesley in Theological Debate에서 강조하고 있다. 카페지는 셀이 웨슬리의 예정론 비판을 언급하지 않고, 웨슬리의 신학을 칼빈주의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비판한다. 셀은 웨슬리를 monergistic(하나님 100%, 인간 0%)하게 해석하였다고 카페지는 지적한다. 오히려 웨슬리는 신론적 차원에서는 monergistic하지만 인간론적 차원에서는 synergistic(하나님 100%, 인간 100%)하게 해석하였는데 이것을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개념으로 종합하였다고 카페지는 해석한다.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은총으로 다가오면 인간이 자유의지로 응답할 수 있다는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 rgism)이다. 이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인간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구원을 위한 선행을 실천하면 하나님이 은총으로 찾아오신다는 펠라기우스나 반 펠라기우스와는 다르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본성적 자유의지라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이다. 또한 카페지는 셀이 칼빈의 예정 사상과 웨슬리의 완전 사상의 차이를 전혀 몰랐음을 비판한다. 3. 알미니우스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위에서 칼빈주의와 다른 입장을 취한 알미니우스주의를 살펴본대로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나 중세 천주교의 반 펠라기우스주의의 자유의지론-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남-과 다르다. 웨슬리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 뿐 아니라 양심과 종교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수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원의 은총을 열망하는 열심과 사모하는 마음도 의미한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교회의 Gregory of Nyssa와 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 교회의 Augustine의 영향과 함께 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총론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적 응답과 책임적 결단을 무시하고 거부할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인 자유의지론은 또한 칼빈의 제한된 속죄론을 비판한다. 곧, 제한속죄론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제한된 사람, 예정에 들어 있는 사람만을 위한 속죄의 은총을 부여한다고 보지만,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만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만인속죄론을 강조한다. 또한 칼빈의 무조건적 예정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가 혹은 안 믿는가라는 믿음의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예정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칼빈주의적 견인의 은총을 비판하면서, 성도라 할지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적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서 선재적 은총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도 있고 다윗의 실수처럼 타락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2) 은총의 낙관주의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영향으로 성화의 완성(Perfection 혹은 entire sanctification)이 죽기 전에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크신 은총으로 지상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대적 완전은 죽음 후에 영화(Glorification)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지상의 완전은 의식적인 죄(voluntary sin)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죄(involuntary sin)의 가능성은 남아 있고, 무지(ignorance), 실수(mistake), 유혹(temptation) 연약(weakness)의 상태는 남아 있기에 상대적 완전이다. 그리고 완전은 정착된 상태가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continuous process)속에 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계속 달려가는 것이 완전이다. 4. 동방교회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의 에집트의 수도사 마카리우스(Macarius The Egyptian, 300-390), 닛사의 감독 그레고리(Gregory of Myssa, 330-395), 대설교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등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웨슬리의 동방교회적 배경을 마카리우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에게서 찾는다. 맥코믹(Kelly Steve McCormick)은 웨슬리의 동방교회적 배경을 크리소스톰에게서 찾는다. 그가 동방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복음적 신인협조설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인간 구원이 완성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로 구원이 완성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방교회나 웨슬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의 개념이다. 곧 구원의 이니시어티브를 인간이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은총으로 다가 오시는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동방 교부 크리소스톰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젊은 웨슬리는 아버지의 충고 “성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라”를 받아들인다. 베버리지는 고대 동방교회 문헌을 정리 수집한 Pandectae를 편집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편집을 통하여 크리소스톰을 소개받는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일기에서 크리소스톰을 1726년 초에 읽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의 충고로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였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소스톰의 제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는 크리소스톰의 저서 13권을 직접 읽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통해 구원의 신인협조설적 질서를 배웠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구원의 질서다. 인간의 책임성을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다. 은혜가 먼저 역사하면, 자유의지는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다(엡2:8). 이 점이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다른 점이다.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이요,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첫 은총이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도권 100%와 인간의 응답 100%라는 도식에서는 같다. 또한 자유의지는 인간 본성으로 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다고 보는 점에서 같다. 2) 신앙과 선행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으로부터 믿음으로 구원받되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날 때 풍성한 구원,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을 배운다.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믿음으로 되지만,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은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웨슬리는 동방교회적이다. 동방교회의 전통인 “훈련받는 사랑”(disci- plined love)은 영국 성공회의 전통인 “열망하는 사랑”(spiring love)과 함께 웨슬리의 성화신학을 형성하고 있다. 사랑의 열망과 훈련을 강조한다.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유사성은 믿음과 행함, 곧 사랑의 조화에 있다. 양자는 십자가의 은총은 전가되는 은총으로만 끝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동참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개관적 은총으로 끝날 수 없고, 우리 안에 은혜의 주관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 역사 한다. 때문에 양자 모두 거듭남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주관적 은총이요, 성령이 우리 속에서 사랑의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양자 모두 믿음과 사랑을 동전 앞뒤와 같이 생각한다. 크리소스톰 신학의 주춧돌은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faith filled with the the energy of love)이다. 웨슬리는 이런 개념을 그의 설교들 “에쿠메니칼 정신”(Catholic Spirit), "근본적 본성“(The Original Mature), ”신앙으로 세워지는 율법“(The Law Estab- lished by Faith),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On Working out Our Own Salv- ation) 등에서 재조직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발전시킨다. 크리소스톰의 경우, 신앙은 사랑 속에 삼키어져 있다.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이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사랑의 에너지를 일으킨다. 거룩한 성도의 생활은 사랑에 의해 활기있게 된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개신교의 신앙중심주의와 가톨길의 행위의인화 교리의 제 3의 선택이다. 이 제 3의 방법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암시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웨슬리에게서 확실히 표현되었다. 개신교의 객관적으로 주어진 의(imputed ri- ghteousness)와 카톨릭의 주관적으로 본성화된 의(imparted righteousness) 사이의 암시적 조화가 웨슬리의 분명한 설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양자 사이의 차이점도 있다. 크리소스톰은 사랑을 더욱 강조한 나머지 믿음의 부산물로 사랑이 산출의 요소가 아니라 믿음이 사랑의 요소요 사랑의 심부름꾼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믿음은 종교의 문(door of religion)이요 사랑이 종교 자체(religion itself)라고 보았으나, 사랑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며 믿음을 심부름꾼으로 부리지는 않는다. 결국 크리소스톰과 같은 동방교회 전통은 웨슬리보다 사랑과 행함을 더욱 강조하는 기독교의 도덕적 성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점진적 성화 성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계속 성장되어 가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임음 웨슬리는 동방교회로부터 배웠다. 동방교회로부터 웨슬리는 완전도 정착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임을 배운다. 웨슬리는 동방교회의 성화신학적 전통을 따르기에 순간적이고 정지 상태의 성화, 서방 카톨릭적 영성과 다르다. 또한 정지 상태의 정숙주의를 강조하는 웨슬리 당시의 루터주의나 칼빈주의 영성과도 다르다. 그래서 웨슬리는 평생 카톨릭주의자들, 루터주의자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의 파트너” 혹은 “동참자”라고 성도의 성화를 해석한다. 그레고리는 그의 글 “모세의 생애”(The Life of Moses)에서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과정을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애굽에서의 탈출, 광야에서의 사건들은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출애굽은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세속 죄악의 삶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의 지팡이에 의해 쓴 물이 단물이 된 것은 부활의 신비에 성도가 연합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부활의 신비를 경험한 성도는 전보다 더욱 달콤하고 신선한 삶을 누린다고 주석한다. 외적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미리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그레고리의 성화의 순례는 웨슬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한 순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에 서 있다. 4) 완전 웨슬리의 완전 사상은 동방 교회 뿌리를 가진다. 동방교회에서 말하는 신화는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 혹은 완전 이해로 나타났다. 웨슬리는 그의 완전 교리를 마카리우스에게서 배운다. 웨슬리는 마카리우스의 설교들을 감리교도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목록인 A Christian Library에 넣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들에 대해 설명하는 서문을 붙이기도 하였다. 자이거는 마카리우스의 크리스천 영성의 개념은 닛사의 그레고리에게서 나왔다고 그의 저서 Two Discovered Work of Ancient Christian Literature: Gregory of Myssa and Ma- carius (Leiden, 1954)에서 지적하고 있다. 자이거는 마카리우스의 대부분의 설교들이 닛사의 그레고리에게 빚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닛사의 그레고리의 “성령안에서의 완전에 관하여”(Peri Teleiotetos en Pneumati)에 영향받고 있음을 말한다. 웨슬리는 마카리우스와 고레고리로부터 완전이 크리스천 생활의 목표임을 배웠다. 마카리우스와 그레고리로부터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힘보다도 오히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배웠다. 그레고리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통하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인간의 완전에 관계되는 은혜와 선행의 상호 협조를 주장한다. 그레고리의 중심 주제는 성부와 성령의 동일본질론과 함께 영적 완전이었다. 그레고리에게 있어서 영혼은 성화 완전을 전진하는 지속적인 전진에 개입되어 있다. 성도가 완전의 과정에 높이 이르면 이를수록 참 완전의 목표는 더욱 드러난다. 그레고리는 각 성도는 완전의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5. 어거스틴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서방교회의 신학자 어거스틴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과 은총의 양면성 등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 선재적 은총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을 자신의 사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어거스틴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다.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하나님은 우리의 참여와 더불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 아니하면, 좁은 길을 가지를 힘쓰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이다. 물론, 초기 마니교와의 논쟁 시에 쓴 “자유의지론”에서는 본성적 자유의지론이 강하다. 왜냐하면 타락 이전의 아담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 시에는 선재적 은총으로서의 자유의지 개념이 강하다. 어거스틴에게서 선재적 은총은 의지를 세워주고, 자극하고, 움직이고, 후원하고, 유지시켜 주고, 강화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없이 일하시지만 우리가 의지할 때 우리와 협력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어거스틴은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며, 가벼운 폭력으로 다가옴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는 웨슬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혜는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은총의 양면성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은총의 양면성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의 한 면만을 받아들였다. 맥그레스(Alister McGrath)는 루터가 어거스틴의 주관적 본성적 의(imherent and imparted righteousness)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종교 개혁은 어거스틴의 재발견이요,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도적이었지만 루터는 어거스틴의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전가되고 옷 입혀지는 의만을 이해하였지, 의인으로 화하는 개념을 강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낯선 의’(aliena iustitia Dei)의 개념에서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신앙의인화와 용서받은 죄인을 발전시킨다. 어거스틴의 논문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에서 루터는 전가하시고 옷 입히시는 의(aliena iustitia Dei)만을 발견했으나 웨슬리는 그 위에 우리의 본성마저도 의롭게 변하는 은총을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신앙에 의한 의인화를 배우고 있으나 웨슬리는 의인화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으로부터 사랑에 의한 성화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양면, 의인화와 성화, 전가되는 은총과 속성을 변화시키는 은총을 모두 살린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인간 의지의 참여로 신적 본성에 참여할 수 있고 신적 본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다.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함으로 죄인인 인간이 신성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웨슬리처럼 죽기 전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고,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적 욕망이 죽는 날까지 계속 인간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완전은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고 죽음 이후 천국에서나 죄 짓지 않는 완전 자유가 가능한다고 믿었다. 6.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적 배경 웨슬리는 옥스퍼드 시절에 심취하였던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의 선행의인화(justification by good works)와 성화(sanctification)를 루터의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에 의해 올더스게이트를 체험한 이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비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 그는 신비주의를 비성서적, 비지성적, 비사회적 신앙이라는 점에서 비판한다. 신비주의는 성서의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기에 위험하고 지성적 신앙보다는 감성적 신앙에 치우칠 위험이 있으며, 공동체적 성화보다 고독하고 현실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성화를 추구하기에 위험하다고 웨슬리는 비판한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 중에 “세상의 빛과 소금”에 관한 해석에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고독한 은둔자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속회 공동체를 통해서 사회적 경험과 훈련의 성화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화와 완전 이해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성공회와 천주교의 신비가들의 사상을 다시 끌어들인다.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윌리엄 로우(William Law)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그는 그의 글 “기독자의 완전”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성화 이해와 완전 이해에서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나타난다. 곧 그리스도처럼 본성이 실제로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변한다는 사상(impartation)은 계속 견지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성화 개념은 개신교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이다. 개신교적 신앙의인화에 기초한 객관적 성화의 주입과 가톨릭적 사랑에 의한 주관적 본성 변화의 성화를 변증법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결국 웨슬리는 “성결에 이르도록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by love leading to holiness)을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로부터 배웠다. 웨슬리는 자신을 영국 성공회 목사라고 늘 생각했고 영국 성공회의 성경, 전통, 이성의 세 가지 신학 규범에다 체험을 추가하였다. 또한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조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영국 성공회와의 연합 정신을 염두에 두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란 설교를 하였다(1749). 서로의 차이가 있음에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성서에서 벗어난 교리와 신학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가 에큐메니칼 정신을 갖고 항상 노력하는 가운데, 1794년 50명의 영국 성공회 목사들에게 인쇄된 세 종류의 편지를 보내면서 세 가지 복음적 주장에 기초한 일치를 주장하였다. 첫째는 원죄요, 둘째는 신앙의인화이며, 셋째는 마음과 생활의 성결이었다. 이 호소에 동조하는 목사들은 답장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세 명만이 동조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Richard Hart, Walter Sellon, Vicent Perronet. 웨슬리는 죽는 날까지 자신을 영국 성공회 목사라고 생각하였고 영국 성공회와 연대하려는 노력을 추구하였다. 또한 분열을 막기 위해서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Cociety)라고 이름 붙이면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신도회로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