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점 같다. 새까만 점같다. 그 안에 힘이 응축되어 있다. 자체적인 힘으로 무장되어 있는데 이 힘으로 세상에 나서면 세상은 당구대가 된다. 서로 힘이 부딪치고 구석진 곳으로 밀리고, 다시 중앙 진출을 시도하고 그러다가 깨어져 해체되고, 분할되고, 다시 응집을 시도하기를 반복한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돈이 모여야 힘을 채워나갈 수가 있는데 이 일이 예전처럼 수월치 않아서 탄식들을 한다. 당구공이 전보다 더 딴딴하지 못해서 언제 파괴될지 몰라 불안하다는 뜻이다.
전에 이런 당구공들이 모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더 큰 당구공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었다. 그러나 이 큰 당구공도 경제가 어려워지니 언제 내부적으로 와해될지 아슬아슬하다. 그동안 이 교회라는 이름의 당구공도 실험에 실험을 거듭해 왔다.
“내가 꼭 돈 안내어도 교회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외치는 교회는 그 복음을 봐서라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어떤 식으로 채워주신다. 이 믿음을 갖자!”라는 주장을 하는 쪽이 신앙의 모범자로 자처하면서 큰 소리쳐왔다.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무책임한 신앙티만 낸 객기였다. 헌금 잔고를 곁눈질 하면서 허풍스럽게 큰 소리쳐 온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다음과 같은 주장이 이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복음 전한다고 하나님께서 교회 유지케 하시는 것이 아니다. 실은 그동안 ‘나 혼자 손해 보면 되지’라는 마음을 품고 다른 교인의 푼돈 헌금에는 눈 지그시 감고 안 못척하면서 ‘참자, 참아’라는 심정으로 희생과 희생으로 헌금해 온 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그 여력조차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오직 복음으로 교회된다’는 ‘교회 실험’은 끝났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그만두자. 각자 가정이라는 당구공이 시급한데 언제 교회라는 이름의 큰 당구공까지 챙기겠는가. 교회가 와해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해서 그동안 쉬쉬하면서 복음이라는 명분하에 은근히 힘들게 감추어두었던 진짜 폭탄인 헌금 문제를 공론화시키자. 그래서 헌금 강요하면 더 이상 이 교회 안 나온다는 사람을 편하게 떠나 보내드리자. 그리고 나머지 사람으로 교회라는 당구공을 작게 구조조정하자. 연봉이 오를 만큼 오른 목사는 내어보내고 이제는 헌금 강조도 서슴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그런 현실적인 설교자를 구하되 단 갗 결혼해서 생활비가 얼마 들지 않는 설교자를 찾자. 왜냐하면 생활비를 적게 책정해 주어도 우리 교인들이 덜 미안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도로 살림을 꾸려나가되 나중에 다시 경제가 다시 좋아지는 날이 오면 오직 복음만을 외치는 설교자를 다시 모시자.
사실 헌금 강조 안하고 복음만 외쳐서 큰 당구공인 교회의 둥근 모양새를 언제까지 유지 할지 불안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큰 당구공인 교회를 하자고 모인 그들이 실은 자들이 따로 각자 단단한 당구공들을 꾸리고 때문이다. 즉 자체적으로 힘을 응축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요, 그들 나름대로 ‘가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당구공들이 깨어지지 않기 위해 정신들이 없다. 가정 깨어지는 마당에 교회라는 큰 당구공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겠는가.
솔직하게 말해서 언제 우리가 교회 때문에 살았는가. 나는 나 때문에 살아오지 않았던가! 소나기가 오면 맞지 말고 피해가는 것이 요령이다. 경제 파탄이라는 큰 소나기가 왔기에 이제는 교회도 접고, 하나님도 접고, 예수도 접고, 성경도 접고, 십자가 피도 접자.
목사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순교하시도록 해드리자. 우리 같은 죄인은 너무 믿음이 없고 죄가 많기에 자진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조금 더 고생하다가 뒤따라가겠노라고 눈물로서 위로해 드리자.”
그런데 이런 인간들의 주장을 무색케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복음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란 오직 용서로만 생겨난다. 즉 용서가 주어지면 교회가 생겨나고 용서를 잊으면 어느새 교회도 사라진다. 돈 힘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매달릴 것이냐가 교회냐 아니냐의 관권이다.
용서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보이셨다. 그 피로 나타난 용서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여전히 교회요, 그렇지 않고 자신을 힘의 응축으로만 살겠다는 당구공 인생이라면 그 사람은 교회가 아니요 그 사람이 다니는 교회도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이 당구공처럼 생각하는 교회는 애초부터 실패작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큰 당구공으로 여기는 것은 본인들이 ‘힘의 응축’으로 버티는 단단한 당구공으로 자아 이미지를 만들고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회에는 실패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따라서 교회도 실패도 없다. 우리는 실패 없는 교회 안에 속하자. 거기에는 오직 피 복음에서 나오는 용서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의 집합일 뿐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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