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신칭의의 교리는 신학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Martin Luther는 이신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시편 130편 4절을 주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구절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비추는 태양이다. 왜냐하면 이 조항이 서면 교회가 서며, 이 조항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Martin Luther,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A], vol. 40, III (Weimar: Verlag Herman Böhlaus Nachfolger, 1930), 352. 한글 번역은 필자의 것임]
실제 Luther는 시편 130편 전체를 칭의 교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시편 130편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 이 시편이 칭의 교리를 진술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이 시편(130편)은 가장 탁월하고 가장 중요한 시편들에 속하는데, 우리 교리의 중심이 되는 자리(locus), 즉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유인즉 여러분은 그렇게 들었으며 그리고 종종 그렇게 선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단일한 자리(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칭의 교리)이 상실되면 그리스도와 교회가 상실 되는 것이다” [Ibid., 335].
Luther가 이렇게 제시한 이신칭의 교리는 그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핵심 교리였으며 이 교리에 그들은 교회의 사활을 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영적 생명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James I. Packer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믿음을 통한 칭의는 종교 개혁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내에서 모든 부흥 운동과 영적 대각성에서 설교의 중심적 주제가 되어왔다. 모든 진정한 부흥에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성령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실재를 진리로서 뿐만 아니라 생생한 경험으로서 교회에 새롭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부흥의 기록들로부터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
부흥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바른 정의가 될 것이다. 즉 이전(부흥 이전)에 교회들이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공식적인 고백에서는 일탈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최소한 그것(이신칭의)에 대한 생생한 이해(living apprehension)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사역(칭의의 실재를 새롭게 가르치는 것)을 하시는 것이 부흥이다"[ James I. Packer, “Introductory Essa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retypeset ed., James Buchanan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2016), viii. 필자 번역]
제임스 패커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한 칭의 교리에 대한 인식(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에 대한 바른 인식)이 바로 부흥과 직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핵심 주제로서 개신 교회의 교리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종교 개혁의 시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오고 있다. 이미 루터 당대에 이신칭의의 교리를 남용하고 왜곡한 사람들로 인해서 반율법주의 혹은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한 행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주장하는 흐름도 나타났다[원종천, 「성화의 부진과 칭의의 고민」 (용인: 킹덤북스, 2017), 137-56].
2. 현대에 이르러 Albert Schweitzer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핵심 주제가 아니며, 그의 이신칭의 교리는 윤리를 도출할 수 없다[Albert Schweitzer,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조남홍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12), 284-5].
고 주장함으로써, 이신칭의 교리를 평가절하였다.
아울러 Krister Stendahl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아니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백성이 되는 것과 관련된 교회론적이고 사회학적인 주제라고 주장하면서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진시켰다[ Krister Stendahl,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hiladelphia: Fortress, 1976), 23-40, 78-96]
이로써 Stendahl은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을 구원론적 주제에 두는 전통적인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에 반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대적 배경 속에서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이하 새 관점으로 지칭한다) 역시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이해에 대해서 반발하며, 유대적 맥락 속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 관점은 마지막 심판에 있을 최종 칭의를 주장하면서, 신자가 믿은 후에 삶아 온 삶에 따라 최종 칭의를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칭의론의 핵심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임을 역설하였다[원종천, 「성화의 부진과 칭의의 고민」, 302-4. 새 관점의 배경과 다양한 주창자들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참고하려면 Guy 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Phillipsburg: P&R, 2004)를 보라]
결국 새 관점은 최종 칭의에 있어서 행위가 필연적 조건임을 나타냄으로써 그 어떤 행위도 칭의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원종천이 자신의 노작(laborious work), 「성화의 부진과 칭의의 고민」에서 설득력 있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 역사 속에서 대중들의 몰이해와 남용으로 “성화의 부진”을 초래했으며, “성화의 부진”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그 반작용으로 행함을 어떤 식으로든 칭의 속에 포함 시키려는 시도를 해왔다[원종천, 「성화의 부진과 칭의의 고민」, 92-355].
이러한 원종천의 지적은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와 신자들의 총체적인 도덕적 부패는 현재 일종의 임계점(critical point)에 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화의 부진”에 대항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는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이다.
둘째, “의의 전가”이다.
셋째,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공로사상”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이다[근광현, “N. T. Wright의 칭의관,” 「복음과 실천」 51집 (2013 봄): 55].
학자들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비판을 잠시 살펴 보자.
예를 들어, 임태수는 한국 개신교회가 쇠퇴한 것에 관한 신학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신학적인 이유 중 가장 큰 이유, 근본적인 이유는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만’의 신학은 윤리와 도덕, 사회봉사 등 행함을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배제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와 한국 교회를 오늘의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것이다[임태수, “한국 교회의 위기와 제2종교개혁,”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 교회」, 제2종교개혁연구소 편, (서울: 기독교문사, 2015), 305]
임태수는 소위 행위를 강조하는 마태복음 7장 15-27절을 분석하여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한다. 그는 특히 22-23절을 주해하며 “여기서도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있다. 그들(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은 가지고 있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행함이 결여된 사람들이어서 구원에서 제외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Ibid., 312].
김득중도 임태수와 유사한 취지로 한국 교회에 대해서 진단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김득중,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성서신학적 반성,”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 교회」, 제2종교개혁연구소 편, 274-303].
김득중은 한국 교회의 도덕적 불감증을 지적하며 그 근본원인 중 하나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의 신앙 전통임을 언급하며 특히 Luther의 오류를 강조하고 있다. 루터의 “신앙 지상주의” 혹은 “바울 지상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Ibid., 276-81].
결국 김득중은 바울서신에 나타나 있는 “오직 믿음”에 대한 반발이 기독교 정경 속에서 특히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들 문서들이 바울서신들과 대립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Ibid., 287-301].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경의 문서들이 서로 대립적이라면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모순성을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관계는 조화 관계로 보는 것이 성경 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선택이다.
김득중은 결론적으로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바울의 약점과 루터의 오류에 기반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 사회적인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Ibid., 301-3].
그러나 바울은 행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라면 믿음의 열매인 행함을 바울이 얼마나 강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바울 신학자 김세윤도 한국 교회의 도덕적 실패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복음의 왜곡과 관련하여 한국 교회가 바울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칭의를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관계론적 측면이 칭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칭의의 개념에 무죄 선언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에 진입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이다[김세윤, “한국교회 문제의 근원, 신학적 빈곤,” 강영안 외 20인, 「한국 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19].
결국 김세윤에 의하면, 한국 교회는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윤리의 부재를 초래했다는 것이다[Ibid., 20-3].
김세윤의 칭의론은 그의 최근 저술인 「칭의와 성화」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신자는 처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지만 신자의 최종 칭의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며, 이 최종 칭의를 얻으려면 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 (서울: 두란노, 2013), 78-84].
결국 김세윤의 칭의론에서는 행함이 최종 구원의 조건이 된다.
일단의 한국 신학자들이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이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하여 N. T. Wright의 칭의론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Wright의 대중적 인기는 한국에서도 위력을 떨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Wright 관련 서적은 한글로 번역 된 것이 50권이 넘는다[임덕규, 「개혁 교회를 무너뜨리는 톰 라이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6), 246-56을 참고하라].
주목할 만한 것은 Wright가 일반 평신도를 위해 집필한 신약 주석 전집인 For Everyone Commentary Library가 한글로 2015년 12월 계시록을 끝으로 완간 된 점이다. 이러한 Wright의 다양한 한국어 번역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의 저작들이 한국 교회의 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전가교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칭의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Wright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선언 받는 것이다[N. T. Wright, Roma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Commentary, vol. 9, ed. Leander Keck (Nashville: Abingdon, 2015), 396; N. T. 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최현만 역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1), 208, 215; N. T. Wright,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1), 155].
또한 그는 현재의 칭의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215; Wright,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255; N. T. Wright,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권, 박문재 역 (파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624].
그러나 미래의 칭의는 행함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Wright, Romans, 354, 357; Wright,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215; Wright,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권, 494-6, 6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Wright는 이러한 행함은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가 아니며 은혜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으므로 믿음으로 인한 현재적 칭의와 행함으로 인한 미래적 칭의는 서로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Wright,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250-60, 304-24, 340-1].
그러나 Wright의 주장은 행함을 최종 칭의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어떤 행위라 할지라도 칭의의 근거로 삼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하신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칭의의 토대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칭의론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Luther와 Calvin 등의 종교개혁가들의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는 학자들로부터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신칭의 교리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이런 문제들이 신자들의 윤리적 실패와 방종을 초래하는가?
최덕성은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에는 문제가 없음을 역설하며, 한국교회의 도덕적 문제는 오히려 “구원 진리”와 전통적인 이신칭의론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덕성,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고경태 외 9인, 「현대 칭의론 논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25-37.]
이오갑도 최덕성과 유사한 취지로 종교개혁적 이신칭의 교리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한국교회의 도덕적 부패는 종교개혁적 칭의론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며,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지적한다[이오갑, “한국 교회의 문제는 칭의론 때문일까?,”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0집 (2016): 163-88.]
이성호도 위와 비슷한 취지로 소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종교개혁의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의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이 문제이다. 아울러 “종교 개혁 신학”은 신자들에게 선행에 힘쓰도록 이끈다고 지적하였다[이성호, “선행교리에 대한 개혁신학의 변증,” 「한국개혁신학」 26권 (2009): 273-300].
박영돈도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옹호하며 문제는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무지와 왜곡이며,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위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박영돈, “바로 알아야 할 개혁 교회 유산, 칭의의 복음,” 「목회와 신학」, 2014년 11월, 54-61.].
이윤석도 김세윤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이신칭의론 자체에 문제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이윤석,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 비판,” 고경태 외 9인, 「현대 칭의론 논쟁」, 277-303].
전통적인 칭의 교리의 대안으로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이나 Wright의 칭의론 혹은 다른 칭의론이 추구되어야 하는가? 16세기 Luther와 Calvin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가들의 전통적인 칭의론은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밀하게 바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보배로운 유산이자 성경적 진리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교리를 견지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 교회의 칭의론으로 회귀하고 말 것이다.
최철영 목사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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