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신앙을 소유했던 인물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 참 성도는 세상을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우뚝 서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성도는 부르심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운동력 있게 살아 현존하시는 삶속에서 그분의 소원을 알고 날마다 그분과 영적으로 연합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바알세불"을 섬기는 교인들이 생각하는 부르심이란 성령체험과 같은 특별함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계시의 수준이란 은사와 같은 "기적"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성도의 영에 다운로드 되어 그분의 일을 이루어가시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도 자신만이 알고 성도는 그분과의 연합만으로도 즐거워할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성도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부르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먼저 죽이고나서 부르시면 좋겠지만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박이 되어요. 먼저 죽고나면 누구나 부름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 신자와 거짓신자가 분간이 됩니다.
이미 심판을 받은자는 "불러 놓고 왜 죽여!" 하면서 "산지옥"이든 영원한 불못이든 지옥만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이 소망된 성도는 "부르셨으니 마땅히 죽이옵소서"라고 나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아들 게르솜의 할례를 미루자 모세를 죽이시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아내 십보라가 양피를 베어 피를 내자 모세가 죽임을 당하지 않아요.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러 주실때는 언제고 그것도 피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죽이려 하시다니 이게 웬 모순입니까. 결국 할례를(피보임) 모세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 여기셨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그 당시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었으니 마땅히 피의 제사를 드려야 되는것까진 맞는데 이게 부르심과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하면 부르심을 당한 자들은 죽음으로 초청된다는 데 있어요. 그러니까 부르심을 당한 자들은(할례 당한 자) "나는 부름을 받았다"해서 자화자찬으로 배부른 것이 아니라 되레 세상과는 단절되는 소위 "육적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안의 고갈을 맛보기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가 고갈되니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갈증만 일어나고 하나님외엔 아무것으로도 안되니까 사방을 보아도 공허함만이 밀려옵니다. 인간이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원래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죗성 때문이에요. 사람이 이런 공허함만으로 가득차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말이 없어집니다. 여전히 그 안이 "자기'로 가득한 사람은 할말이 많은 법이지만 하나님 때문에 공허해진 사람은 말수가 적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유구무언해집니다.
삼라만상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심판을 목적으로 숨어 계시니 불신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살고 거짓신자는 소위 "인간교"라는 것을 만들어 날마다 우상숭배하면서 무지한대로 살고 성도는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이렇게 날마다 죽임 당하며 삽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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