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역사(歷史)를 만들게 되면 그 역사를 만든 본인의 관점은 그 만들어진 역사 안에 있을까 아니면 역사 밖에 있을까?
역사 밖에 있다면 본인 자체가 역사에 초월해있는 그야말로 신적 존재가 되어 요지부동, 세월이 가도, 환경이 바뀌어도 달라짐이 없는 절대자로 군림한다. 반면에 역사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 자신이 만들었다는 역사 속에 부분으로 섞여있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를 만들었다'는 거짓말을 자행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 가족은 전부 거짓말장이다"고 했을 때, 본인마저 거짓말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본인만 빼고 나머지 가족이 거짓말한다는 말인가?
본인만 뺀다면 자기만의 역사 따로 있고 자기 뻰 나머지 역사가 따로 생기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포함하고 있는 그 진정한 역사는 도저히 본인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고 따라서 "나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말해야 맞고, 반면에 본인이 포함해서 자기 가족이 거짓말장이들이라면, 그런 말은 한 그 본인의 주장도 스스로 "나는 방금 구라쳤습니다"고 고백하는 셈이 되어 자기 주장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소위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는 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해야한다고 주장을 한다. 이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런 자기만의 역사만들기에서 야기된 대상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예를 들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 그는 선지자로 확실한 계시를 하나님에게 받았다. 쉽게 말해서 그는 충분히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완벽하고 해석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막상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고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계시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죽여주세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은혜로시다'는 속성과 선지자 본인의 자살 요구가 선지자 내에서는 모순없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선지자의 계시수용은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 내부에 주체적으로 수용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형식에 의해서 수용된 계시내용이 실제로 하나님이 실시한 계시 적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는 그 모순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지워버릴려고 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본인만의 절대적인 해석을 따로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가 없었고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해야 했는데 그 해석력이 바로 오류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를 초월하는 묵시의 자리에 인간이 끼어들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이 절대적 안목을 독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요나를 왜 자기 계시 작업에 참여 시키시는가? 그것은 역사의 진정한 진행에 있어 요나가 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어떤 인간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서 역사를 초월적으로 볼 입장에 못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계시를 받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역사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이다. 즉 죄인으로서 역사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아담의 길고 긴 시간 죄의 체인 속에는 죄만이 있다. 그 죄가 무슨 죄인가 하는 것은 역사 속에 합류하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어떠한 죄로 인하여 살해당했는가, 그 살해의 자리로서만 근거를 갖고 해석된다.
바로 바리새인들이나 사울(사도 이전의 사울) '다른 신'을 근거로 예수님의 신되심을 거부하고 제거하셨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울은 구약의 계시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기에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참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관을 내비치게 되었는가?
그들은 인간의 본성 안에 담겨 있는 시간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충분히 이해하고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계시를 내려주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말씀의 해석과 이해성만큼은 죄로 물들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죄가 바로 인간을 둘러싸지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기본 자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신학이라는 학문을 허락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학과 성경이해를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그 지식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내기 위함이라는 것이 바리새인이나 사울이나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자들의 생각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것이 거짓되다"는 로마서 3:4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만의 의는 자신의 말씀 이해력에 준해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이해력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을 빼고서 역사를 구상한다. 그 상된 역사는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진행된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정한 해석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 현장에서 피어난다. 즉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맞아죽으신 분으로 성경이 해석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또 죽이는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자기 의로움 위주로 그 성경해석이 역사적 가치를 띠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바로 그런 의식이 예수님을 죽게 하신 죄임을 통고해주신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졸지에 불평하면서 죽게해달라는 요나가 된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되고 그리고 사울이 된다. 즉 죽어 마땅한 저주받을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서 본인들의 모든 생각들이 본인 중심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내는 본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따라서 뭘해도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의 본색들이 그 역사의 길이만큼 펼쳐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는 현상이다. 자기 교회 사랑, 자기 가족 사랑, 자기 종교 사랑, 자기 목숨 사랑, 자신의 과거와 남은 여생에 대한 집요한 애정과 집착, 이 모든 것이 역사적 형식으로 상상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자기를 위하여'는 서술이 붙어있는 채로 나오는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곧 탐심이 우상숭배였던 것이다.(골 3:5)
복음을 듣는 척하다가 복음을 버린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왜 그럴까? 그들은 역사 밖에서 자기만의 역사를 초월적으로 조정하려는 악마의 얼굴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본인이 본인에게 우상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고 신이 된다. 느부갓네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이 모아져서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금신상으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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