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왜 왕따가 있게 되는가요?<왕따의 중심인 중…

세상에는 왜 왕따가 있게 되는가요?<왕따의 중심인 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이 근 호 목사

저   자 : 르네 지라르(Rene Girard)
번   역 : 김진식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5)


신화의 본질을 과연 신화 자체로만 분석이 가능할까? 저자는 그동안 신화가 합리화적인 인식으로 인해 상당히 핍박을 받아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병행해서 기독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성경의 내용까지 신화에 불과하다는 시선으로 인해 매도당했다고 보았다.

저자는 성경이 매도되는 것으로 인해서만 가슴 아픈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화의 핵심을 파헤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풍부한 성경적 신화가 이성의 합리적으로 인해 천시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못하겠다고 나서서 본 책을 저술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동안 합리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 혼잡스럽기 짝이 없는 미신으로 치부되는 것에서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건져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의 핵심을 건져내면 놀랍게도 흔히 냉정하고 치밀하고 합리적 이성체제로 다져진 오늘날의 정치, 행정, 종교 체제도 사실 모두 신화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신화 체제임이 폭로되는 것이 한마디로 말해서 신화가 품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를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류 사회의 제도보다 종교 의례가 우선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한다. 고대든 현대든 정치 제도란, 종교적 의식에서 비롯된 갈등들을 수습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들 사이에 은밀한 공모가 개입하고 작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은밀한 공모’이지 실제로는 지금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심적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자는 ‘모방’이라고 보고 있다. 모방은 타인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는데 문제는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타인에 대한 존경심(특히 가까운 이웃에 대한 존경심)은 곧장 증오심이나 질투심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존경심에서 곧장 증오심으로 변환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조장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그것은 ‘사탄’이라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사탄’의 개념을 둘로 나누고 있다. 즉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입장에 서서 판단하는 사탄과 세상에서 말하는 사탄, 이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사탄의 세상은 이 세상에서 정치적인 갈증 해소 전략상 사탄 개념을 거론한다는 것이다. 이 사탄의 세상도 자기네들 세계에서 악한 세력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 비록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저자의 견해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탄이지만)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군중들의 ‘모방 경쟁’ 심리를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 사회는 혼돈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에 어떤 수를 사용하든지간에 혼돈에서 질서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데 그 방안을 위해서 그들도 사탄이라는 개념이 지닌 종교적 취지를 활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혼돈된 사회를 평화롭게 안정된 사회로 전환 시킬 수 있는가?

그 방식은 선한 힘과 악한 힘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힘을 한쪽에 쓸어 모으되 단 한 명의 희생자가 등장할 때까지 심리적 분위기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우선 희생물이 되는 자가 드러나는 극단적인 경우는 군중들 내부에 왠지 불길한 징조가 퍼질 때이다. 전염병이 횡횡한다든지, 기근이나 지진이나 일식이나 전쟁의 소식 같이 평화로운 질서가 와해되는 경우에는 자기네 집단 내에서 누구 하나를 이 불길한 사태를 유발시킨 장본인으로 지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집단 왕따’를 모든 군중들이 만장일치로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각가지 신화를 분석으로 하면서 참으로 신기해하는 점은, 어떤 희생물 된 자를 재판하는데 있어 희한하게도 ‘만장일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기네들에게 집단 폭력을 당하는 그 희생자에게는 나중에 도로 자신들에게 보복한 능력이 없다는 점이 가해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심보는 인간들의 이성을 능가하는 분명 악한 세력이 이 인간 세계를 움직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사회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 참으로 어질고 착하고 어리숙하게 생긴 걸인 하나를 광장에서 불러 세워놓고, 불길한 질서를 회복시킬 책임을 맡은 예언자가 과감하게 군중들에게 그 죄 없어 보이는 거지에게 무참하게 돌을 던질 것을 명령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춤주춤하다가 일단 어느 누가 돌을 던지게 되면, 이유도 없이 난데없이 린치를 당하는 그 거지를 생물학적인 본능이 발동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진 자에게 반항심으로 드러내면서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면 선동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외친다.

“여러분 보시기에 이 자가 그냥 착한 거지인 줄 알았지요. 자 이제는 똑똑히 저 자의 얼굴을 보세요. 사실은 저자가 바로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한 사탄이었습니다. 자 주저하지 말고 그 자를 즉시 즉사시켜 돌무덤 속으로 묻히게 합시다”라고 말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신화적 종교의식은 오늘날 정치 사회에 실시되는 일반적 법행정에 대한 국민들의 전반적인 호응도와 정당성 확보하는 신화적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신화는 바로 이러한 희생물을 즉사시켜 놓고서는 그 희생자를 도리어 선한 신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을 잊지 않는다. 사탄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다시 질서가 잡히면 위대한 신이 강림한 것이라고 추앙하게 된다. ‘위기→희생→신격화’라는 종교적 절차로 형식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화들의 이러한 보편성을 놓고서 대부분의 합리주의자들은 이런 신화성을 그대로 기독교를 분석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에 있어 기독교란 기껏 고대 신화의 노선을 이어받은 미신의 일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런 고대신화의 내용과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내용과 차이성을 부각하면서 오늘날의 합리적 인식이 품고 있는 악마적인 양상을 질타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고대 신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고대 신화에서는 희생자를 공격할 때는 자신들의 판단력이 확실함을 보이기 위해 그 희생자를 죄를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희생자는 그 어디에는 죄라는 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인에게 맞아죽은 아벨이 그러하고, 형제들에게 밉상 받은 요셉이 그러하고, 친구들에게 오해받은 욥이 그러하고, 세례요한이 그러하고 예수님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요셉의 경우,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자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도리어 순하게 그들이 주는 고통을 수용하므로서 그들로 하여금 죄인으로 규정할 여지를 주지 아니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애매하게 맥없이 희생물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가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는 희생당하는 길로 곱게 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의 내용과 차이나는 점이라는 것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경우, 본인이 최초의 살인자이면서도 가인 본인은 타인에 대해서 살인금지법을 제정하여 보복의 반복 고리를 끊어 후대 사회의 질서를 안정시키고자 한다. 바로 이런 법집행이 최초의 문명국가인 가인의 후예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보아, 현대 문명국가란 최초의 희생자를 신으로 승격시키고자 하는 신화 구조 위에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도, 그 당시 권세자들이나 군중들은 하나 같이 예수님을 희생물로 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적극 협조하고 동조했는데, 이는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식의 질서 잡는 법 외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 지 못합니다”라고 하늘의 하나님에 기도한 바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는 이러한 자신들의 바탕을 신화적 미신의 범주에다 집어넣고 애써 부인하고자 한다. ‘까닭 없이 희생양을 미워한다’(시 35:16) 이러한 인간 사회의 허세와 왜곡과 거짓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들통 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은 죽자마자 곧장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사흘이라는 갭을 가지고 부활하므로 말미암아 기존의 신화 체계와는 달리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된 뜻에 의해서 부할 했다는 것이다.

이 부활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존의 모든 신화 체제를 사탄성을 참으로 사탄적인 짓임을 꾸짖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것을 저자는 ‘스캔들’ 즉 죄악이라고 보고 있다. 죄악이란(스캔들이란), 예수님이 제시한 ‘신화 모방’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즉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지 않고, 기존의 이웃의 욕망을 닮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도 자기네 모방 욕망을 정당화해줄 희생물을 찾기 위해 지금도 분주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노예, 외국인 노동자, 여성, 어린이들을 박해하므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들을 통해서 오늘날 전개된다는 사실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최후의 희생양은 기독교 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유일하게 사회를 비난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독교를 한물간 세대의 신화에 불과하느냐 이 사탄의 자식들아.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저자는 격노하고 있다.


평 가

저자는 왜 사람들이 주님과 주님에게 속한 자녀들을 미워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현상에서 성경으로 접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결코 인간들의 집단 따돌림에 의해서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분만을 독특하게 하나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싫어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그들 심성과는 전혀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질적인 요소가 ‘선택’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란 인간들에게 호응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배제’를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배제'가 인간들의 '주체 존재 확장 시도'에 어떤 작용을 남기는지 저자는 모른다. 그것은 십자가에 담긴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십자가 의미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언약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니 오늘날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기독교 자체가 이단이 되어 세속 권세와 같이 힘을 모으는 정치성향에 대해서 저자는 입을 다문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희생양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 복음 안에서 선택자라는 성경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는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희생양들은 늘 ‘자기 부인’을 하게 마련이며, 결코 사회의 악함을 사회 현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해주신 주님의 확고한 언약의 결과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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