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누구나 불신자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옛적에 살던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신자는 죽어도 신자를 이해 못한다. 모든 행함을 죄라고 규정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오로지 자기 행함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자들인데 그 모든 행함을 결국 죄라고 규정나면 ‘나’만의 가치를 찾을 길 없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나만의 가치’가 될 만한 것은 있는 대로 다 찾아다닌다. 마치 가족의 해골을 화장터의 잿더미 속에서 수습하여 ‘유골함 단지’ 안에 고이 담아두는 식이다. 마치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성도는 자신을 해골로 간주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보시기에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다. 인자(人子)와 해골의 만남, 이것이 에스겔 37장에서 예언된 약속된 이스라엘의 위상이요 에스겔의 실존이다.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겔 37:5)
불신자들이 겁내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비참과 처참으로 처리되고 마감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땀 흘린 대가를 얻기 위해서이다. 청춘을 다 바쳐 노력한 그 결과를 어떤 식으로도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결실이 비참함과 처참함으로 마감된다면? 차라리 일찍 죽고 싶을 것이다. 어떤 교인이 어려서부터 자기가 다녔던 교회가 지옥으로 방류되도록 잠시 모아둔 저수지라면 기가 막힐 것이다. 지금이라도 안 것이 한편으로 다행스럽지만 그동안 부어넣은 십일조 적금은 찾을 길이 없다. 마치 부도난 ‘부산저축은행’ 꼴이다. 행함을 강조하면서 사기를 쳤던 목사 멱살 붙들고 흔들어봤자 목사는 일그러진 미소만 지을 뿐이다. “당신도 ‘나의 행함이 나를 구원하리라’고 그 때 믿었잖아. 행함으로 신앙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주위의 눈치를 살폈잖아. 당신도 혹시나 하나님이 축복 줄줄 알고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행동했잖아. 이제 와서 남의 영업소에 와서 장사 방해하지 말고 나가소!”
비참함과 처참함, 실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장만하신 접견장소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나의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계 2:4) 이 세상에서 오셔서 어느 누구보다 더 처참하고 비참하게 망가져버린 그 망가진 장소,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만 주님은 만나 주신다.(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8) 성령께서 그렇게 도우신다.
처음 사랑이란 더 이상 자기 행함에 기대하지 않게 하는 자리다. 아무리 처참과 비참한 결말이 찾아오더라도 복음의 눈부신 광채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사랑이다. 영원히 함께 가는 사랑이요 해골로서, 이미 죽은 자로서 예수님 기다리는 십자가 속에만 만나지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성령의 사라짐과 더불어 사라지면 그 때부터 행함이 눈에 들어오고, 행함이 눈에 들어오면 이 때부터 비참과 처참에서 벗어나려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내거야 내 교인이요 내 교회야. 내 신학이야. 내 인생이야 건들지 마!” 귀신 들린 자가 따로 없다. 이런 자의 아비가 마귀다.(요 8:44) 성도는 불신자의 이런 모습을 이해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해 왔던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이요 지금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추어진 자신의 죄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서 재생하듯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