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LFIA(사울피아), 영어자막 하나 던지고서는 영화는 곧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으로 관객들을 데려다가 못 빠져나가게 가두어버린다. 강렬한 소음이 시작된다. 트럭 바퀴소리, 발자욱소리, 각종 소리들이 먼지같이 날리면서 과도하게 현실성 있게 자극한다. 포로수용자와 더불어 관객은 짜증스러운 소음에 가두어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느긋한 간접 체험은 없다. 영화는 직접 체험으로 데려간다. 현장감 있는 소음으로 영화는 끝까지 관객을 괴롭힌다.
이 소음으로 인한 괴로움이야말로 수용소가 가장 강렬한 고통 효과다. 생각할 이유도 없고 그럴 틈도 없다. 그것이 진정한 죽음의 수용소이다. 이 안에서 사상이나 철학도 사치다. 그저 이 소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체로서 직접 느끼는 고통의 체험이 곧 수용소 체험이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 안에는 학대하는 짐승 같은 인간을 탓할 필요도 없고 학대받는 짐승 같은 인간을 동정할 필요도 없다.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따로 없고, 모두다 오로지 소음에만 지독하게 시달뿐이다. 이유로 모르면서 쫓기듯이 계속 날아오는 말, 말, 말들. 시도 때도 없이 재촉 받는 시체를 처리 작업과 관련된 잔소리와 지시와 명령이 주는 소음을 관객들도 가장 가까음으로 내내 시달려야 한다. 어느새 관객들도 고상한 인간성을 날아가 버리고 신체적인 존재로 변모되어 소음의 학대를 받아야 한다.
(내 좌석 옆에, 옆에, 옆에, 옆에 앉은 여성 관객은 영화가 너무 짜증스럽든지 휴대폰을 열고 메시지를 오랫동안 곧 주면서 불빛을 발산하다가 나한테 지적받았다)
주인공 사울은 ‘존더코만도’라고 불리는 ‘비밀운반자’이다. 같은 헝가리 유대인이 되어서 수용소에 잡혀 왔지만 수용자를 가스실에 처리하고 소각로에서 시체를 태우고, 태운 그 뼈를 강물에 버리는 부역자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역하고 난 뒤, 몇 개월 후가 되면 그도 같은 신세가 된다.
사울은 시체를 처리하다가 자기 아들이 생체실험용으로 시신이 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주인공 사울이 다른 수용자와 다른 점이 이것부터이다. 그는 지금 자신 존재 목적을 새롭게 갖게 된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소음 중에서도 인간다운 목적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아들의 시신을 땅에 묻어주기를 위하여 동서분주하게 수용소 질서의 빈틈을 찾아 움직인다.
수용소로 잡혀온 자 중에서 랍비를 찾아내어 자기 아들만큼은 제대로 유대교식으로 장례 치러주고 싶어 해서 거기에 집착한다. 다른 동료들이 말리고 심지어 랍비도 말린다. “여기서는 모두 다 간단한 기도로 시신을 보낸다.” 하지만 주인공 사울의 귀에는 그런 충고가 들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눈빛은 본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다.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해줄 도리를 다 해주기 위해 남은 시간을 다 바치는 눈빛이다.
즉 모든 게 죽음에 굴복하는 지경에서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들아, 내가 제대로 장례 치러주마”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교 신학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사적 교리요 본인이 세상을 대하는 진리다.
수용소에 작은 폭동이 일어나고 그 틈을 노려 열 명 남짓 수용자들이 이웃한 강을 건너 탈출을 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주인공은 아들의 시신을 강물에서 놓쳐버린다. 근처 작은 숲 속 쉼터에서 탈주자들이 숨을 고르고 있는데 웬 동네 꼬마 하나가 입구를 기웃거리며 살펴보다가 주인공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게 된다. 주인공은 만족한다. 죽은 자기 아들을 대리할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은 무사히 하나님의 품으로 귀환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탈주자들을 쫓던 독일병사들이 기이어 따라와서 숲 속 쉼터에서 쉬고 있는 탈주자를 다 죽이는 차가운 총소리가 들린다. 물론 주인공도 예외 없이 죽었을 것이다. 이게 관객들이 영화에서 마지막 듣게 되는 소음이다.
(영화 주제)
인간 세상이란 죽음만 유발하는 인위적 소음들의 집합. 이 죽음의 소음 속에서 작용하는 그 어떤 인위적 권력도 인간의 진정성은 혈연의 정을 끝까지 소멸시킬 수는 없다. 아니, 더나아가서 죽음마저 인간의 가치를 끝까지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복음적 평)
소각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인생들, 도살한 양 같은 신세로 대열 지워져 움직이는 이 세계에 대해서 영화는 인간성으로 끝을 넘고자 한다. 본인들이 죽음을 낳고, 심판을 낳고, 저주를 낳는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그 본인의 혈연을 계속 살리려 한다. 살아생전에 노선 변경이 일어나야 한다. 육에서 영으로의 언약 변경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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