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 
 

어느 TV 토크쇼가 있었다. (타이라 쇼)

딸을 매춘부로 시킨 포주 아버지와 매춘부가 되어야만 딸이 함께 나왔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포주 아버지는 말한다. “네가 하고 싶다 해서 내가 제모까지 해주면서 인도해주었잖아” 그렇게 말하자 딸이 반발한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세계에 아버지가 강제로 나를 밀어 넣었잖아요.”

사회자(타이라)도 흥분해서 포주 아버지를 질타하고 공개 쇼에 참석한 참관인들 모두가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런데 거기 참여한 사람 중에는 지금도 매춘으로 살아가는 매춘부 두 사람이 나왔다. 한 사람은 딸의 동료 매춘부이고 또 한 사람은, 딸이 매춘 일을 그만두고 난 뒤 딸의 아버지의 소개로 후임으로 들어간 매춘부였다.

사회자는 동료였던 매춘부보고 물었다. “딸이 매춘하면서 얼마나 힘들어 했습니까?” 그러자 동료 매춘부는 말한다. “매우 만족했고 즐거워했습니다.” 이러한 의외에 반응에 청중들은 당황한다.

이번에는 후임 매춘부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딸이 이처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후임자로서 무슨 느낀 점이 없습니까?” 그러자 그 후임 매춘부는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한다. “이 아저씨 아니었으면 제 인생은 망가졌어요. 제가 남자 친구한테 얻어맞고 결별하면서 인생이 엉망이 되었을 때, 친히 손수건을 꺼내주시고 위로하시면서 이 고마우신 아저씨께서 이 좋은 곳으로 저를 인도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비로소 인생에 행복을 얻게 되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청중석은 얼어붙었다. 사회자로 순간 당황했다. 무엇이 정의요 무엇이 불의인지 분간을 못하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사회자가 할 말을 잊자 마이크를 관객에게 돌려서 위기의 사태를 모면하려 했다. “누구 이 분들에게 좋은 말씀해 줄 없습니까?”라고 구원자를 찾았다.

한 여자 관객이 화가 난 얼굴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아가씨는 한 남자와 결별하는 인생과 여럿 남자를 상대하는 지금의 인생 중에서 어느 인생이 더 망가졌다고 보십니까?” 그러나 후임 매춘부는 말한다. “제가 그냥 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돈을 받는데 뭔가 문제죠?”하고 되레 반문한다. 그러나 더욱 화가 난 그 관객이 또 질문한다. “그렇다면 아가씨. 손님 중에서 전에 남자친구보다 더 험악하게 아가씨를 대하는 손님이 있을 터인데 그래도 전의 인생보다 낫습니까?”라고 묻자, 그 아가씨는 쉽게 답한다. “그런 손님은 안 받고 점잖은 분만 골라 받지요.”

사회자도 뭔가 또다시 패배했다는 느낌에 받고 청중 중에서 또 다른 구원자를 찾는다. 어떤 분이 마이크를 건네받고 다음과 같이 아가씨에 충고한다. “아가씨, 제 말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면서 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 귀한 몸을 스스로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가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하는 말입니다. 보다 귀한 곳에 자기 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지요?” 이런 질문에 후임 매춘부는 멀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즉 “신을 믿지도 않는 나에게 왜 저런 소리를 하지?”라는 투다. 동료 매춘부가 나선다. “매춘은 참으로 정당하고 거짓 없는 직업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몸으로 노동해서 대가를 얻듯이 매춘도 정당한 돈을 받고 정당하게 손님의 요구에 부응해주는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입니다. 이점에 있어 일반 직업과 조금도 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딸이 매춘을 그만둔다고 해서 왜 사람들은 나쁜 구덩이에서 벗어나서 새 사람 되었다고 여깁니까? 이것은 큰 편견입니다. 매춘하다가 그 일을 그만둔 저 따님은 그녀만의 인생이요 그녀만의 자기 결정일 뿐입니다. 지금도 자기 결정으로 매춘에서 인생의 보람과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직업이 남의 직업보다 더 우수하다고 식으로 저를 비롯해서 매춘에 종사하는 분들을 모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20대에 매춘에 빠졌다가 다시 그 세계가 그리워 돌아간 사람들을 취재한 르뽀를 읽은 적이 있다. 매춘을 그만 둘 때에는 질적으로 보다 나은 세계가 자기를 더욱 행복하고 할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세상에 나가보니 그게 아님을 알고 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다시 매춘업에 들어선 여인에 대한 취재 내용이었다. 그 여인은 주장은 이것이었다. “어릴 때는 남 탓했지만 실은 핑계에 불과하고 누구나 자신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인과 매춘부 이 모두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본래의 자리’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의 자리란 반복되는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접근되어지는 자리다. 상실이 도리어 축복이다. 매춘부가 되었던 존경받는 판사나 의사나 일반 주부가 되었던 ‘자신마저 잃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상실과는 반대 방향으로 마음이 쏠린 상태다. 이는 곧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내가 행복해지겠다는 말 밖에 안 된다. 이런 자들이 매춘부를 비난 할 자격 없다. 마찬가지 인생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을 행복의 자리를 얻을 입장이 못된다. 거저 매일같이 ‘행복 자리’라고 여긴 그 자리를 상실하고 잃어야 한다. 그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처우다. 죄인의 본래의 자리는 내가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자리가 아니다. 도리어 ‘나의 자리란 아예 있지도 않음’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추진하는 ‘자기 자리’를 잃게 하신다. 하나님은 십자가 자리를 추천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그 본래의 자리에 도달케 하신다. 순간순간 그 자리의 존재를 감잡히게 하신다. 탕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여기고 살아가라고 하신다. 자신의 자리는 아예 없고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뿐임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십자가 마을’도 이처럼 늘 상실되고 늘 십자가 가 다시 돌출되는 예수님의 몸의 자리이기를 바란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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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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