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의 치명적인 오류는?
아마추어들은(평신도) 알지 못한다. 왜 목사들이 개혁주의를 부르짖는지를!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이다. “형님, 나도 밥 좀 빌어먹고 삽시다”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구조는 이러하다.
성경을 전체로 체제를 잡는 것이다. 즉 ‘성경⇒신학체계’가 된다. 이 와중에서 아마추어들(평신도)들은 배제된다. 전문적으로 신학교에서 수업료 납부해가면서 억지로라도 귀동냥해 가며 들어왔던 그 수업시간이 ‘성경⇒신학체계’로 이끈다. 이렇게 되면 ‘신학체계’가 성경을 대신하기에 아마추어들(평신도)은 여전히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아마추어 티를 내지만 소위 신학교 물을 먹은 프로들은 ‘신학체계’를 만지작거리면서 여유만만하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아마추어는 성경을 공부해도 돈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는 성경을 가지고 ‘신학체계’로 전환시켜주는 재주가 있기에 이 틈바구니에서 합법적으로 돈을 요구할 수 있고 돈이 건네진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공부하면 돈이 안 생기지만 신학체제를 연구한 자는 돈이 생긴다. 그것도 정당하게! 그렇다면 이런 점과 개혁주의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의 완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먼 미래까지, 아니 역사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신학은 진보되고 발전되고 진화되고 진리에 가깝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그 깊이와 폭을 넓혀나가리라고 본다. 신학체제 다듬기에 완료가 없다는 말은 곧 그 완료를 계속 시행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전문가(목사나 신학자)에게 돈이 투입되는 것이 정당하고 마땅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개그를 하는 개그계에서 선후배 질서가 엄격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선배가 모든 프로그램이나 코너를 다 독차지하면 후배는 필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님, 저희들도 밥 좀 빌어먹고 삽시다” 즉 앞으로 개그의 발전을 무궁무진하게 이어가려면 저희 후배들을 , 그리고 인기 없는 자들에게도 생계수단이 되도록 조치해주어야 이 바닥이 고갈되지 않고 계속해서 돈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개그계는 더욱더 진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면은 비단 개그계뿐만 아니다. 의료계, 공무원사회, 학술계, 군대사회, 음악, 미술, 연극 및 예술계, 산업계, 유통업계, 체육계, 심지어 조폭의 사회 등등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 없는 곳이 없다. 그 업종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평생에 몸담고자 하는 후배를 계속 키워나가고 그 업종에 종사하는 자들이 보다 많이 양성해 놓아야 지속적으로 돈을 흘러 들어와서 힘을 비축하게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예수님 자신이 혹은 성경 자체가 신학계나 교계도 이들 세계와 같기를 원하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스스로 묻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세상의 모든 업종은 죽기 위한 업종들이 아니다. 살기 위한 열심이들 발전을 외치면서 종사하는 업종들이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과학계나 철학계도 말할 것도 없다. “형님, 어떻게 교수 자리는 형님 계열 사람들만 계속 추천해서 자리 마련해주십니까? 저에게도 기회 주십시오. 저는 이 분야의 전문지식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독일에서 박사 학위 취득했습니다. 저도 제발 밥 좀 빌어먹고 살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진리를 위하여 진리 탐구하려 먼 외국에 나가 학위를 따려 간 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함’이 곧 자신의 생존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성경을 공부하는 자들에게 이런 의도를 용납했느냐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신학, 모든 구석구석에는 다음과 같은 요구가 숨어있다.
“복음만을 전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야 지만 우리가 이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가로 떳떳하게 밥 빌어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가 너무나도 인간적인 종교 형태가 판을 칩니다. 우리는 이런 교계를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전환시키고 개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이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가로서 떳떳하게 밥 빌어먹고 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에 평생에 매진하는 본인들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내용을 개혁주의 신학 자체에서 발굴해 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복음을 연구하는 자만을 살리고 나머지는 죽을 죄인들에 해당함을 분명히 해두는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주장하는 거짓 복음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니엘을 연구하면서, 다니엘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는 점을 밝혀내지 못하는 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개혁주의 신학에서 다니엘이 ‘마땅히 죽을 죄인’인 것을 밝혀낸다면 이는 그 다니엘 선지자 계열에 속한 본인들도 덩달아 ‘마땅히 죽을 죄인’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취지를 가지고 신학 작업을 차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훌륭하다’를 부각하는 신학을 전개해야 자신들을 마치 그 다니엘 선지자와 같은 계열에 놓여 있다면 자신들도 마땅히 ‘살아야 하는 훌륭한 자들’로 부각이 될 것이 뻔하고 뿐만 아니라 ‘자신만’ 훌륭해지고 아마추어들을 훌륭하지 못한 게 된다. 당연히 이 프로다운 프로인 자신들과 아마추어 사이에는 성경 실력의 격차만 생기는 것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인과 죄인’을 가름하는 모델이 되는데 문제가 심각해진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목사들이 ‘죄’를 거론하면서, “여러분, 거짓말이 죄입니다”고 설교했을 때, 필히 목사 본인의 죄를 거론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을, 담임목사가 ‘거짓말이 죄’라는 것을 거론했을 경우에는 목사 본인만큼은 거짓말은 안 하며 살고 있다는 뉘앙스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목사 본인이 계속해서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목사 본인이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자신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기 위한 설교를 하는 셈이 되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만약에 교인들이 ‘목사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음’을 아는 날에는 목사의 권위나 체면이 묵사발 될 것이 뻔하다. 따라서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죄 항목만 골라서 교인들에게 훈계하듯이 설교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교인들은 ‘목사님은 죄와 무관한 초월적인 존재’로 부각됨과 동시에 ‘목사=의인’, 그리고 ‘교인=죄인’이라는 구조가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 간격만큼 돈이 들어온다는 것은 기본적인 노림수다. 즉 죄인이 의인에게 돈을 뇌물이라는 성격으로서 건네지므로 서 교인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의인이신 목사님께서 눈감아주면 곧장 정상적인 사람으로 원상회복이 되어지고, 이 편리함 때문에 교인들은 죄를 아무리 지어도 교회 안에서 ‘흐지부지 죄가 사라질 죄인’에 불과하기에 세상에 나가 목사 믿고 마음 놓고 죄지으면서 살게 된다. 아니, 죄짓는 재미로 살게 된다. 아니, 더 짜릿한 죄를 발굴하는 재미로 여생을 살게 된다. 이 죄인(=교인)과 의인(=목사)의 구조가 계속 교회 내에서 형성되어야지만 목사는 합법적으로 교인보다 더 의인이라는 자격자로서 죄인들인 교인에게 등쳐먹을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아마추어들인 평교인들이 성경을 보는 것이 자신의 죄 용서와 아무런 상관없이 오로지 의인되시는 목사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목사에게 밉상 보였다? 그렇다면 그 날짜로 그 아마추어는 천하의 몹쓸 죄인으로 낙인찍히면서 이 낙인찍힌 죄인이 발생해야 그런 판결을 내린 목사의 의인됨과 성스러움과 권위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성향은, 신학을 연구한 자기네들의 파워를 강화하고, 그 지식사회를 단단히 구축해서 아마추아와의 격차를 늘여나가 교회 내에서 의인/죄인의 구조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다. 쉽게 말해서,
교인입장의 구호는 이렇다. “죄 지어서 얻은 수입, 목사에게 양도하여, 내 영혼이 구원 받세!”이다.
목사 입장의 구호는 이렇다. “프로답게 의인되어, 당당하게 수입 챙겨 우리들도 밥 빌어먹자”이다.
그렇다면 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복음을 모르는가? 그것은 십자가 복음이, 십자가를 연구하거나 성경을 가지고 신학체계를 구축하려고 다가오는 모든 것들의 주체에 저주를 던지면서 복음이 시작된다는 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를 마땅히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십자가 앞에서 만큼은 통하지 않고 이유도 없이 악한 짓이 되는 것이다. 즉 “나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저주받아 마땅한 마음가짐”이 되는 것이다.
이 공식은 성령이 와야 알게 된다.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신학을 연구하면 아무래도 밝혀지지 않는다. 성령이 오게 되면, 사람 손에 직접 죽으신 분의 영으로 다가오기에,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다시금 인간들로 하여금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 앞에서 ‘인간의 이름’이란 자동적으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성령님이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성경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쓰여졌기에 그 모든 말씀을 다 동원해서 신학체계를 세워놓아도 그 체계는 항상 십자가 복음만 남기고 쓰려지게 되어 있다. 즉 ‘개혁주의 신학’ 자체를 증거하는 것은 구원의 능력도 아니요 성령의 능력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등장한 모든 신학 가운데 가장 건전하고 성경과 합치된다”고 증거하는 것은 육에서 나온 발상이며, 구원의 능력도 되지를 못한다.
참으로 성령을 받은 자는 이렇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 자신이 친히 못 박히신 그 십자가의 피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피를 대신할 신학은 영원히 없습니다.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피만이 죄인을 구원하십니다.”고 말이다. 이런 고백이 나오려면 모든 신학을 피 앞에서 부정해야 한다. 이는 곧 성령님에 의한 자기 부인이다.
"형님, 나도 밥 먹고 삽시다."를 형님보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령받은 자라면 십자가 앞에서 외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들도 오랫동안 신학했습니다. 밥 좀 빌어먹게 해주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도 이 세상에서 일찍 죽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증거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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