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탄) 어느 목사님의 질의

(5탄) 어느 목사님의 질의

(질의)

최근에 설교하신 5계명(부모공경)에 대한 설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새로운 부모, 새로운 자녀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5계명과 관련해서

조금 쉽게, 조금 길게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답변)

제가 그 설교를 요약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말은 ‘만인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명칭이 붙여주는 순간에 아브라함에게는 정실 부인에게 나온 자식이 없습니다. 종에서 나온 자식은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은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만인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그 ‘아버지’의 위상이 아브라함에게 유효하기 위해 그 위상에 합치되는 자식이 새롭게 주어진다는 것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삭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자, 그렇다면 ‘부모공경’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의외로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죽입니다.

즉 자식이란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하는 그 와중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즉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란, 아버지가 비록 자식을 잡아 죽여도 자식은 군소리 없이 받아드릴 때, 비로소 제대로 ‘공경’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즉 제대로 된 자식과 그 공경을 통해서 제대로 된 아버지가 구현된다는 겁니다.

이는 이 인간 세상에서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자식이란 자기 주체성에서 새로이 조립하는 부모상을 지니게 됩니다. 즉 본인이 보다 훌륭한 자식으로 포장하기 위해 거기에 부합되는 조건을 부모존재에다 붙이게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로 구성된 언약 관계에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부모공경의 원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언약적으로 다루시느냐를 지상을 통해서 미리 재연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내용이 인간의 육적 부모 관계에서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숨겨진 하나님과 독생자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즉 혈육적 인간들 사이에는 불가능한 내용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십계명에서 요구하는 부모 공경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독생자되시는 예수님께서 해내시므로서 십계명은 완성이 되고 그 의로움에 성도가 참여됩니다. 믿음으로 참여되는데 그 믿음의 내용은 주님의 아버지에 대한 공경 앞에서 인간들의 부모 공경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므로서 성사됩니다. 언약 공식이 '죄+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의 완성은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고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즉 부모 공경에 대해서 우리가 실패를 자인하고 무능력자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단 예수님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 살해는 '부모 공경'의 개시를 보여줍니다. 그 완수는 수풀에 준비된 수양의 존재와 희생을 통해서 부모공경의 진정한 본질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를 내용하지 않는 부모 공경은 가찌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라면 자식이라도 잡겠나이다"라는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기꺼이 희생되어주는 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질의)

목사님. 평안하시죠? ^^

잠30장 아굴의 기도 30:7-9 말씀을 해석좀 부탁드릴까요?

조금 길게 부탁을 드릴까요?

잠언은 율법의 정신을 확대한 것으로, 그리스도 지혜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아굴의 기도 또한 이 부분을 드러내지 싶은데,

목사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답변)

구약에서 ‘나’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에게 대입하시면 됩니다. 예수 안에는 구원될 자들의 죄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은 주변 환경과 사투를 벌립니다. 아담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투 안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 그려지고 만들어집니다. 이는 곧 나름대로의 법과 같이 조성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지상에서 버티고 있음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의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현장으로 변모시키십니다. 즉 사람들은 목숨이 부지되고 이어지는 것으로 생명을 규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생존에 불과합니다. 이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생명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에 몰라보게 됩니다. 자기 생존이 곧 생명이라고 오해하는 마당에서 “나와 함께 죽자!”라는 언명은 무슨 말인지 못알아먹기 마련이요 도리어 자신을 해치려 온 사단이라고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이 지상에서 꿈틀거리면서 순간순간 토해놓는 현상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기도 내용 속에 담아챙기시는 겁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기도마저 생명이 주어지는 기도로 변모시키는 필수적인 중간 절차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하나님 저는 하나님에게 누가 되는 않는 식으로 저의 생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너무 가난해서 본의 아니기 죄를 짓거나 너무 부유하여 교만해서 죄를 짓게 되면 저의 목숨(생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누가 되는 것이 싫사오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생존의 환경을 허락하소서”라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십자가 앞에서 이런 기도마저 의로운 기도가 되지 못할 정도로 죄는 인간의 생존현장 전체를 계속 짓누리게 됩니다. 바로 과정을 성도는 필히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잠언을 통해서 미리 알려 주는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가 아는 것이 신약의 어린아이보다 못한 겁니다. (마 11:11)

(질의)

목사님. 먼저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한곳만 더 여쭤봅니다.

출18장에 보면 이드로가 모세에게 제도(천부장 및 )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 일을 하라고권하자 모세는 바로 시행합니다.

이 본문은 성경중심사상의 글(목사님 글)에서는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와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을 보다 체계 있는 정치형태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정치형태는 이미 이방나라에서 시도해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가 되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국가는 그런 형식으로 정해지지 아니한다. 언약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고 쓰여져있습니다. 저 또한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18장의 제도 관한 본문을 설교하려면 이방나라에서 시도해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정도의 본문은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18:13-27을 언약의 관점에서 좀 길게 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언약 안에는 행정제도 자체가 없습니다. 제사장 제도는 행정체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언약은 이방민족의 힘에 대해서 공격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형식적 제도를 통해서 인간의 지혜와 힘을 집결하는 체제는 모든 인간들의 머리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일상적으로 운용되는 행정 체계는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의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개입은 바로 행정체제를 의지하는 인간들의 의도 속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와 거룩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이 모두의 이유요 근거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체제나 예배법이나 절기법이나 그리고 교회법이나 삼위일체 이론이나 조직신학까지 모두 다 이방인들이 자체적인 힘을 집결하기 위한 ‘비-언약’적 취지에서 유발된 현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질의)

목사님 평안하시죠?

전에 한번 여쭈어보았기도 합니다.

창3:5-7을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죄지은 인간에게 있어서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는 것과

창3:22에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죄인이 스스로 선악을 아는 것(벗은 것을 봄)과

하나님이 인간이 판단할 때에 선악을 아는 것의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목사님 바쁘시겠지만, 성경전체를 풀어서 좀 길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자기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자기가 자신 입장을 변호하는 낯선 인식체제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변환된 환경에 대해 자기를 피해서 타인 탓으로 돌리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바로 인간의 정신 세계가 ‘독자적 의미’를 정립하는 안목의 개시를 나타냅니다. 자아나 타자(他者)를 구별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기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어떻게 바뀌어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순순히 협조하고 있는가는 창세기 3장의 주 내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이 달라진 정신세계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시느냐가 주 내용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해석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아담의 동의를 의도적으로 이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우리’는 요한복음 14:23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성령이라는 처소에서 ‘하나’가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그 수준에 아담 내외가 동감했다고 여기면 곤란합니다. 아담과 하와와 같은 인간 수준에서 기껏해야 매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하면서 생존에 몰두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상을 ‘약속’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하는 몫은 ‘우리(아버지+아들)’의 몫입니다. 곧 순차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이 약속과 더불어 아담과 하와 가정을 통해 실현되게 될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자식의 출생)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평가에 얼마나 동의해서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 했느냐 하는 문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취지와 다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되 하나님의 일방적 평가에 준해서 실시했다는 사실을 신앙인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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