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현대신학의 해설(요약)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현대 신학 해설

◎ 저자소개(간하배 박사)

  간하배 박사는 미국 칼빈대학,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한 후 제네바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2년간 미국 정통장로교(OPC) 한국 주재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2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가 1999년에 소천 하였는데, 그는 도시선교의 이론을 학문화하고 있다.「현대도시교회의 전망」을 비롯한 12권의 저서와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계간 도시선교 연구지「Urban Mission」편집인으로 사역하였다.

 

   

제1장  1919년 이전

  현대 신학의 창시자는 칼바르트이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현대 신학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근대 신학과 현대 신학의 차이는 차이라기 보다는 강조점의 차이요, 동일한 전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1919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요 이미 200년 전 계몽주의의 왕자인 철인 임마누엘 칸트의 서재에서 비롯하였다. 1919년 이전의 계몽주의 정시과 거기에서 파생된 신학은 다음과 같은 흐름이었다.

 

  새 종교적 전제들이 있어서 현대인의 생각을 형성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항상 자신과 하나님과 세계를 보는 범주를 설정한다. 이 정신은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격체로 거듭나야 할 것이며 자기 사고를 통제하는 어느 제약에서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나아가 인간 중심의 자율 주의가 일어났다.  이 종교적인 태도는 인간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게 두었고 특별히 인간의 이성을 최고 권위로 진리에 대한 궁극적인 척도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칸트에 의하여 하나님은 방음된 지하실에 밀폐되었고, 현상계에는 오직 윤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칸트가 만든 비성경적인 줄로만 연관을 맺게 되었다.

  

  역사적-비평적 방법이 수립되었다. 과거를 탐구함에 있어서 역사가는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용납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방법론적인 억측이 동반되었고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성경은 다른 고문서처럼 취급되어야 하고 다른 고문서처럼 오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신앙과 역사의 분리를 가져왔다. 

 

 

제2장  1919년 이후

  칼바르트의 1919년 로마서 주석은 현대 신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선 그의 신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진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역이 초기 특징이었다. 그의 주석은 그의 이전 스승들을 저버리려 한 것이다. 자유주의는 종교의 문화적 가치를 고양했으나 바르트는 최고의 죄로 정죄하였다. 자유주의는 윤리의 기초 위에 신학을 세웠으나 그는 신학의 기초 위에 윤리를 세웠다. 

 

  그의 1921년 주석은 새로운 계시관을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과 성경과의 관계는 사실적이기는 하나 간접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이 실존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하기까지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거의 계시의 기록이요 미래의 계시의 약속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새롭게 환기시키려 한다. 그는 영원과 시간,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간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주권적인 타자로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만 우리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견해들은 어느 정도 자유주의에 대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근대주의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치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계시관은 순전히 주관적이다. 단순히 책으로서의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구별짓는 요소는 그 책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하나님을 타자라고 강조한 것은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강조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활을 Geschichte의 영역안에서, 즉 사람이 자기 세계의 실존적인 현실과 부딪히는 곳, 인격과 인격 관계의 영역 안에서 참 의미를 갖게 되고 Historie의 영역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므로 기독교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진정한 역사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

 

 

제3장  신정통 주의

  이 운동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이후 그의 추종자들 특히 에밀 부른너 같은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신정통주의 독특성은 계시에 있다. 바르트는 계시는 "위로부터 수직적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는 사건이다. 동시에 계시는 성경과도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한다. 성경과 그 안의 진술은 계시의 증거요 표요 지시표다.  그리고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실상 바르트는 이 점에 대하여 강력히 주장하고 나머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계시도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계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동일한 역사가 되었다. 

 

  보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신정통주의 가운데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선택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또한 택함을 받은 자이다. 예수는 사실 유일한 택함 답은 자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택되었고, 모든 사람이 버림받았다. 바르트는 이중 선택이란 고전적인 개념 곧 개연을 두고 말하는 선택 개념을 부인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지 않으며 설혹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산다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밖에 그러지 못함을 인정한다. 선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신분인 아니다. 선택은 행위며 하나님을 위한 봉사다. 고로 버림받은 데서 선택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은 없다. 있다면 선택에 대한 몰인식과 그에 대한 인식만이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우선 인간이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시는 만남이요, 대면이요, 대화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계시가 아니라 한다. 이로써 계시 자체의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정통신학의 언어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것을 재해석한다. 원죄,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부활, 재림 등을 부룬너는 신화, 바르트는 사화(saga)라 부른다. 이러한 교리들은 일찍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나 상태들이 아니라고 한다. 오직 만민이 항상 처하고 있는 역사적인 상황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별도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어느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보편구원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분명히 일종의 신보편구원설이다. 예수는 만인을 위한 구원사라고 부르면서 구원의 원은 심히 커서 불교도나 유교도나 신도교도들을 포함하며, 선택과 유기간의 분계선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고 한다.

 

 

제4장  양식 비평-불트만의 방법

  디벨리우스가 양식비평이란 이름을 처음 썼고 칼 엘 슈밑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비평적 성경 연구의 선두 주자는 불트만이었다. 양식 비평은 성경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애와 교훈의 신빙성 있는 기사로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무엇보다도 초대 교회의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이 기본 가정이다.

 

  복음 기자들은 신약서가 쓰여지기 전에 교회내에 돌아다니던 여러 가지 독립적이며 서로 상충되는 구전을 합쳐 연결짓기를 꾀하였다.  이 구전들 자체가 완전히 믿을 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양식 비평의 목적은 기록된 복음서들의 배후에 있는 구전들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복음서들의 복음"을 찾으려는 우리의 연구를 위하여 사용하는 원 자료일 뿐이다. 그 원복음를 찾으려고 우선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각각의 구절들은 이적 이야기, 변론적인 교훈, 예언, 명언 등으로 분류된다. 이 각각은 고정된 특유한 형식이 된다. 이것들을 서로 비교하여 시간대별로 순서를 정하여 초기 전승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사건을 연대기별로 수록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인 개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넓은 역사적인 개략의 범위 내에서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 목적에 맞게 자료를 배열하였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기본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여러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상이한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복음서들이 완전히 보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생애의 단일한 구조의 어떤 국면들에 대한 증거라 봐야 한다. 또한 복음서들의 산출 배경에 기독교계가 있는 게 아니다. 교회는 바울이나 그의 동료 사도들과 같이 증인이요 창조자가 아니다.(고전4:1-2) 그리고 초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전승의 수호자로서 사도들의 존재를 무시해선 안된다. 그들은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사실 및 교리들에 관한 권위있는 보도의 출처로서 복음서가 쓰여질 때 사도들과 목격자 중 다수가 생존하고 있었다.

 

 

제5장  비신화화 : 볼트만의 메시지

  비신화화 작업의 중심은 신약에는 두 가지 곧 기독교 복음과 신화적인 성격을 지닌 제1세기 세계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신화의 목적은 세계의 됨됨을 객관적으로 인식을 표현하려는데 있다. 그런데 신화는 인간의 이 자이해의 확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세계로부터 취한 이미지와 용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세계가 신화적인 변형을 겪으므로 예수도 변형되기에 이르렀다고 불트만은 말한다.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는 원시 기독교에서 조만간 신화화하였으므로 인간 예수의 역사적인 지식은 기독교 신앙에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약에 있는 예수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은 모두 역사가 아니요 신화 곧 자신들을 더 잘 이해키 위하여 이런 신화를 창작한 사람들의 사고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약에서 이 신화를 벗겨내고 그 뒤에 있는 원래의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이 과정은 신화를 실존적으로 풀이하는 것, 곧 인간이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식으로 현대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그의 이런 "비신화화"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의 일파에 힘입은바 크다. 그리고 역사에 근거한 기독교의 기초를 파괴한다. 성경의 종교가 신화에 기초한 종교가 된다. 그리고 그에 의해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의 영향으로 날조되었고 고전적인 기독교의 초자연적 주의의 완전 배제를 가져왔다. 그러나 성경은 불트만이 신화라고 부르는 것을 사실이라고 말한다. 끝으로 복음의 적응성이 현대인에게 명백히 되리라는 그의 가상은 인간의 부패를 간과한 것이다. 죄인으로 복음을 보게 하는 것은 성령이지 비신화화가 아니다.

 

 

제6장  구속사

  오스카 쿨만이 대표적 인물로 그의 구속사의 개념은 역사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칼바르트에게서 많은 기본적인 사상을 받았다. 이 파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다. 시간은 사람의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투기장이다. 그러나 역사를 계시의 매개로 강조함은 성경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근거 자료가 아님을 뜻한다. 이 구속사의 중심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서 오신 초림이다.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은 세계적인 드라마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연극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뜻한다. 쿨만에게 종말론은 성육신에서 시작하여 재림으로 종결짓는 모든 구속사건을 모두 총괄한다. 역사의 해석자는 그 역사와 하나가 되어야만 이 역사를 알 수 있다. 만일 이 역사의 탐구자가 이 역사에 신앙으로 참여치 않으면 역사는 역사로 남고 계시가 아니다. 이런 양식 비평은 우선 성경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전적으로 믿을 만한 기사가 아니라고 본다. 궁극적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신정통주의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믿지 아니하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는데서 잘 나타난다. 쿨만은 또 시간과 역사 철학을 그리스도 안에 건설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존재론적인 신성을 부주의하여 부인하며 따라서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영원에 있어서 쿨만은 영원은 다만 끝없는 시간이라 주장한다. 이와같은 논법으로 그는 시간과 영원간의 의미있는 구분을 없애려 한다. 또 시간은 단순히 인간과 창조를 제한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아울러 하나님 자신도 무시간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이 입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제7장  세속화 신학

  이 사상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세상의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주된 관심사라고 본다. 본훼퍼, 죤 로빈슨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어느 생활 영역도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구별된 사회에만 갇혀질 수 없다고 본다. 또 우리의 신학도 이 세속화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교회와 세계의 구별은 철폐되어야 하고 새복음은 정치적인 활동이요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사업이라고 본다. 그리고 초자연주의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려 한다. 예수를 하나님께 가까이 살았던 사람이라 하는 구식의 자유주의 견해가 소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 공학의 업적과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흠모하고 성경이 말하는 현대의 죄의 실재를 간과하고 있다. 또 교회의 독특한 표지를 잊으려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고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없게 만든다. 순전히 기능으로서의 세상에서의 봉사, 세상을 위한 봉사로서 교회가 정의된다. 그리고 장차 오실 나라에 뿌리박고 있는 성경의 종말론을 일관되게 거절한다. 유일한 실재의 나라는 현재 있는 나라라고 본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바르트와  불트만 그리고 쿨만이 사상의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계몽주의 사상체계를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중심이다.

 

 

제8장  상황윤리

  상황 윤리는 종전의 윤리와 비교하여 행위의 지침으로서 옛도덕적 규율과 원칙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처하고 나선다.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가 반 인간주의며, 인간보다도 초자연적 원칙에 우위를 주고 사람은 환경여하를 불구하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공격한다. 새도덕은 그 이름이 표현하듯이 "상황" 곧 현금의 철학자들이 실존적인 실재라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한 행위가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고 상황에 의하여 그릇된다고 한다. 또 행위의 궁극적이요 유일한 표준은 윤리적인 준칙이 아니고 자아가 없는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라 한다. 이 아가페 사랑은 좋아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이웃의 선을 원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기독교 윤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새윤리는 어떤 목적이 있어 정당화 해주지 않으면 아무 행위도 의미없다고 한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계명의 권위와 객관적인 도덕적법칙에서 해방시키므로 이 새도덕은 계속적으로 아가페를 에로스로 전락시키려 한다. 또 윤리적 의무를 순간 순간의 직면과 반용으로 좁힘으로 새도덕은 일관되고 예측할 수 있는 형식의 생활을 기독교가 요구하는 것을 좌절시킨다. 그리고 전 도덕적 의무를 아가페 사랑으로 축소시킴으로 새도덕은 사회정의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을 반영하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새도덕은 윤리 이론을 초자연적인 창조주와 성경의 구속주로부터 분리시킨다. 하나님은 이제는 시비를 가리는 주권자가 아니요 단순히 모든 존재의 근원일 뿐이다. 이 상황 윤리의 하나님은 너무 작고 제한되어 그의 사랑 윤리에 대한 충분한 능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제 9 장  소망의 신학

몰트만이 대표적 신학자이다. 몰트만의 미래의 시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님이 시간의 과정에 굴복한다는 사상이다. 이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일부이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신지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미래에 어떤 분이 되실 것인지를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약속으로만, 소망중에서만 임재하신다. 그의 말하는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는 해석하기를 미래에 대하여 열려진 것이요, 미래의 자유라 한다. 하나님이 이미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초자연적인 영역이란 없다. 미래의 분량은 사람과 하나님에 다 같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게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의 문제는 정당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갈보리로부터 새예루살렘을 쳐다보아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의 무제한한 미래로부터 뒤로 갈릴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 마지막 부활이 예수의 부활의 근거다. 그리고 사회에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범주들은 사회에서 떨쳐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창조시에 주신 일정한 형식이나 구조가 없다. 여기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화목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사상은 바르트주의를 아주 추종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Historie-Geschichte에서 Historie의 "이미"를 부정하고 "아직"에 의하여 삼켜지는 역사관을 내세운다. 바르트가 역사와 신앙간의 진정한 상관성을 파괴하여 버린다면 몰트만은 역사 자체의 가능성마저 파괴한다. 그의 종말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중심의 체계다. 그의 종말론은 미래론에 가깝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와 혁명에 의하여 도입된다. 

 

 

제 10 장 역사의 신학

1950년대 말에 새로운 신학의 경향으로 느껴질만한 것이 독일의 신학잡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첫 단계에서는 "판넨베르그 군"이라 불리더니 차차 "역사의 신학" 또는 "부활의 신학"이라 불리운다. 

1. 몰트만과 같이 판넨베르그는 역사와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기를 주장한다. 신앙은 그 역사적인 기초와 내용에서 분리된 케뤼그마로는 살 수 없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이런 일이 바로 바르트와 몰트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케뤼그마에서 역사를 분리시킴으로, 그들은 신앙이 진리로 이르는 생명선을 제거한다.

2. 판네베르그는 하나님의 계시가 사람에게 이를 때에 직접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계시가 일어나는 이 역사는 신앙으로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구속이 아니라 한다. 오직 역사적인 행동을 통한 간접적 계시만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3. 그리하면 보편적인 역사만이 계시의 매개체가 된다. 역사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나 줄기가 아니라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교사다.

 

4. 역사의 의미는 그 중심에서가 아니요, 그 종국에 가서야만 발견케 된다. 이 강조로 인하여 판넨베르그의 사상을 "부활의 신학"이라 부르게 했다.

 

5. 몰트만과는 달리 판넨베르그는 대체로 부활을 비신화화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부르기를 주저치 않는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를 "보수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로 분류함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리라. 그의 사상체계는 결코 역사적이요, 성경적인 기독교에의 귀환이 아니다. 

1.비록 판넨베르그가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와 불트만의 입장을 공격하지만, 여러 면에서 판넨베르그는 여전히 신정통주의자의 상속자요, 그 적수와는 멀다. 신전통과 한가지로, 그는 실재에 대한 견해를 "칸트의 실천이성의 우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과 실재적으로 동일한 견해를 가진다. 계시가 "설명되어져야 할 행위"로 주어지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은 항상 비롯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2.이 번증법으로 인하여 판네베르그의 전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이론이 나온다. 

3.그의 부활론 역시 몇 가지 중재한 흠을 지닌다. 부활 기사들을 완전히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몸의 부활이 세상의 끝과 모든 믿는 자의 일제 부활과 동시에 일어나리라고 잘못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4.판넨베르그는 신앙을 역사적 탐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역사에만 의존시킴으로 보통 사람은 스스로는 믿을 수 없고 오직 역사가의 권위에 승복하는 때만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따르게 된다. 

5.판넨베르그가 이러한 근거 위에서는 불신의 이유를 만족하게 설명하여 내지 못함을 비평가들은 지적한다. 만일 신앙의 역사의 지식에만 기초한다면 신앙과 보는 것과의 대치점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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