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심을 본받아
죽으심을 본받아
빌립보서 3:10-12
죽으심을 본받아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모든 인간의 모든 요소가 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주장과 내세움과 활동은 모두 죽음으로 쏠립니다. 마치 싱크대에서 물을 부으면 한 구멍을 통해 다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빠지는 물은 구정물입니다. 다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더러운 겁니다. 죽음으로 쏠린다는 말은 그 어떤 것도 틀렸고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추하고 죄스러운 겁니다. 이처럼 더러운 것들끼리 놓고 서로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것이 다소 착하고 의롭고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착오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신세계가 똑바른 것이라고 우기게 되면 예수님마저 이용해서 자신의 행위를 의로운 행위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죄 값으로 안 죽어도 되는 내가 되기’를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주장합니다. “그냥 곱게 죽어라!”입니다.
“군소리 말고 죽어라!”입니다. 옆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데려다가 상대적 선함을 강변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죄인인줄 알아야 죽게 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죽으면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인생이란 그냥 소극적으로 곱게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죽으심에 적극적으로 참예한 인생이다는 겁니다.
‘살다보면 죽겠지’가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의 죽음의 징후를 나타나게 되면 거기에 합류하는 인생이고 싶어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죽음’은 성도만을 찾기 위해 널직한 바다같은 현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조보트 같은 것입니다.
징후란 이 세상에서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일어납니다. 한 번만 구조보트에 올라탔다고 해서 그다음부터 평온한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지 않고 쉬지않고 구조보트는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구조보트는 주님에 의해 붙잡힌 바 된 구조보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