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의 성
장래의 성
히브리서 11:9-10
장래의 성집은 나를 보호하는 거처입니다. 자연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집은 작고 자연은 크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욥기 1:19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가정에 그동안 하나님의 보호가 깨어졌습니다.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보호가 사라졌을 때, 욥은 다른 보호를 요청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대자연보다도 더 크신 분이 보호한다면 기존의 시-공건에서도 버틸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마저도 이 세상의 삶을 장막에서 시작하신다는 겁니다.
이동용 거처입니다. 이때 거치를 머물거나 이용하는 원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시-공간’이 작용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기존은 ‘나’를 지켜주는 시-공간은 이제 시효가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장막집이 이 땅의 미래를 고려해 볼 때 이 시-공간 안에서는 적합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육신의 쇠락과 자연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처지를 묘사하는데 장막집의 삶이 적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시간 속에 미리 미래의 시공간이 꽂히는 현상입니다. 현재와 더불어 미래도 함께 합니다. 자연과 함께 썩어가는 육신이라도 장차의 시-공간에서는 부활의 재료가 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자손은 복음이 이끄는 대로 가서 복음의 최종점으로 인도받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은 장막집과 동행하면서 기존의 시-공간 안에서 움직입니다. 낡고 뜯겨도 상관없는 상관없는 집이 새로운 시-공간을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