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앉음

에베소서 2:5-6 하늘에 앉음‘하늘에 앉아있다’는 말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 도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4: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없는 세계에다 처소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에 의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들어설 수 없는 곳이 되기 위함입니다. 즉 천국은 철저하게 숨겨진 세계입니다. 인간이 미리 그 세계를 안다면 사람들은 그

무엇에든지

빌립보서 4:8-9 무엇에든지 인간의 마음은 한 곳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어느 특정 방향을 향하여 관심 갖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한 곳에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집중되는 그곳에서 거꾸로 쏟아져 주어지는 것들로 싸여있는 상태가 곧 성도가 처한 지상의 환경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지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들이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서 우연히 주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무엇이든지’라고 표현되는 그 다양함은 단일한 속성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빛은 그 자체로 색깔이 없지만 유리조각을 만나면 오색 빛깔 무지개로 갈라지는 원리와

지체의 다양함

고린도전서 12:14-17 지체의 다양함‘욕심내지 않는 것’과 ‘태만한 것’을 구분해야 하듯이, ‘개성이 있는 것’과 ‘지체가 여럿’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지체란 한 몸에 예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즉 지체가 많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리어 몸의 하나 됨이 강하게 증거되는 관계가 몸과 지체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러나 개성이란 타인과의 차별성을 가지고 오로지 자신을 독보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말입니다. 이처럼 지체가 개성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체란 타인에 대한 점령이나 지배나 우위를 논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발과 손과 귀

목숨바친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2:5-8 목숨 바친 사랑과도한 사랑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각자도생, 각각 자기만의 인생을 따로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의든 타의든 도움을 받게 되면 언제나 되갚아 주므로서 마음의 빚을 청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누구도부터도 책잡히지 않는 나만의 절대적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즉 자기 의로움 속에 갇혀서 사는 존재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기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12-14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진리의 나타나심

디모데후서 1:10 진리의 나타나심 인간 세상은 인간들끼리만 삽니다. 물론 주변에 동물들과 식물들도 있고요. 그 외에는 ‘산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광물들과 암석들과 바닷물은 ‘산다’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정리한 이 세상에 창조주가 보이지도 않고 더더구나 심판주도 보이지 않습니다. 즉, “누가 감히 인간을 심판해?”라는 투로 살아갑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자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누구에게 죄를 지어서 그 죄로 벌로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설사 절대자인 하나님과

복음의 원천

갈라디아서 1:11-17 복음의 원천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현실화로 적셔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은 그저 한 때 옛적에 살았던 사람들의 그들만의 세상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아이디어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 지식 덩어리로 머물게 됩니다. 즉 ‘그 지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지식의 효력도 임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 유명한 야구선수의 이야기가 기쁨을 줄 리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오직 사람들의 머리에서만

구원과 죽음

고린도후서 5:8-10 구원과 죽음 정통적인 일반 신학에서는 구원론을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택→소명→회개→믿음→중생→칭의→양자→성화→영화’.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이런 절차나 순서나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미 죽었음/이미 살았음’ 뿐입니다. 그 조건도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즉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을 때에 모든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 하시므로서 성도는 ‘이미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활동에 종속된 상황에서 그 열매로서만 존재합니다. 이는 성도에게 일어난 변화가 곧 지금

영적 전쟁

에베소서 6:12 영적 전쟁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어야 하지요? 우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점은, 성도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미 승리가 확정된 가운데 진행되는 전쟁입니다. 즉 성도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승리의 한 양상이라는 겁니다. 성도가 망가지고, 가난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세상적으로 파산 및 파멸이 된다할지라도 성도는 그것마저 예수님의 승리를 드러내는 계기가 여기고 감사하게 됩니다. 로마서 8:35

얼굴 보자

데살로니가전서 3:6-10 얼굴 보자 ‘만나 보자’는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할 말이 많다는 말은 일어났던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입장에서 여러 군데서 성도가 발생되는 것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요 반갑고 그지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자신에게는 직접 주님께서 현현(顯顯)하셨지만, 각처에 있던 성도들은 사도 자신의 말을 듣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은 살아온 과거들이 다들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판단하게 마련입니다. 그동안 구축해온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거에 무너뜨려지지는 않습니다. 설사 사도의 말을 듣

마음의 인도자

데살로니가후서 3:3-5 마음의 인도자 사람들은 일방적 인도자를 귀찮게 여깁니다. 자신들이 아쉬울 경우에만 인도자를 본인들이 고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에게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도자에 대해서 인도받는 자가 수시로 의심을 눈초리로 감시하는 구조가 됩니다. 사람들이 매사가 이런 식인 것은 본인부터가 이미 ‘악한 자’에 속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란 결국 하나님 계신 곳과 합류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악마와 귀신은 이미 하나님 계신 곳에 합류될 수 없는 자로 결정났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런 악마의 운명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악한 자에 대한 규

하늘의 제사장

히브리서 8:3-5 하늘의 제사장하늘과 땅이 차이가 어떠냐 보다 먼저 과연 ‘하늘’, 혹은 ‘하늘나라’기 있느냐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접근은 먼저 인간 자신들이 잘못한 게 있다는 점부터 개시됩니다. 잘못한 것을 처리하는 일을 행하는 자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하늘나라가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은 ‘과연 제사장이 있었느냐’와 관련있습니다. 즉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하늘나라’가 굳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나아가서 ‘내가 여기 있다’가 되면 하늘나라는 없는 것이 되고 ‘죄인이 여기 있다’가 되면 하늘나라가 있는 바가 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자신의 잘못으로

바울을 버린 사람

디모데후서 1:15-18 바울을 버린 사람 바울을 버린다는 것은 주님을 노골적으로 버린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안 보이니 그저 마귀가 예수 믿는 사람을 주님 대신 공격하는 겁니다. 사도도 전에 사울 시절 때, 예수 믿는 자를 공격하니 예수님이 사울에게 찾아와서 사울이 하는 짓이 곧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짓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사람을 상대할 때, 예수님을 배제하는 식으로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 외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인 이유는, 예수님을 배격하는 이 세상의 생리를 꾸준히 들추어주는 내용이 계속 흘려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빼고 이 세상을 논하자는 의견으로 세상은 집요하게 결집되어

분노와 마귀

에베소서 4:25-27 분노와 마귀 성령이 없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마귀가 한 짓이라기 보다는 주님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보다 분명히 그 취지가 드러납니다. 즉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은 마귀가 배후에서 잘 구슬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 곧 악마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화를 내는 것은 마귀가 한 짓입니다. 그것은 성도는 복음에 둘러싸여 살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가 성도되는 것은 성도 본인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복음의 위력적인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건드리는 것은 곧 복음을 악마가 시비걸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하고자 하는 일은 딱 한가지입니다. 복음의 위력을 무

의로움

갈라디아서 2:15-18 의로움 과연 ‘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에 관한 문제를 사도 바울이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논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했던 바와 동일한 방식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아, 네가 얼마나 아느냐?” 혹은 “인간아, 네가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를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의’부터 시작하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시도하는 방식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신의 하자를 돌아보거나 고칠 수 있는 마음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단지 노력이 미진해서 완전한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사람들

디모데후서 4:19-22 바울의 사람들 브리스길라(여자) 아굴라(남자)는 이들은 고린도에서 천막업을 한 부부입니다.(행 18:1-3) 평일에서는 사도바울과 더불어 천막을 제조하고 안식일에는 바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디모데후서 1:16-17에도 오네시보로가 나옵니다.“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당시 헬라 세계에서 복음은 미련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바울은 이러한 복음으로 인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고 모든 사람이 바울을 배신하여 떠

선한 일

디도서 1:15-16 선한 일 지식을 가진 자, 아는 자는 결코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원리입니다. 이미 망하고 난 뒤의 상대를 향하여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마가복음 9:43에도 나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이 둘의 말씀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 어떤 경우라고 선하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구자로 만드는 일도 선하지 않다는

본디오 빌라도

디모데전서 6:13-14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자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을 넘겨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 운명에 예수님께서 뛰어든 셈이 된 겁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 31-32) 예수님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마감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빌라도 협조하는 식으로 개입되었습니다. 빌라도의 이러한 역할은 그가 눈에 보이는

할례와 세례

골로새서 2:11-12 할례와 세례 몸(신체)이라는 것은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겁니다. 따라서 그 신체를 벗기고 입히고 하는 것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무슨 뜻에 준해서 진행됩니다. 하나니께서는‘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바로 그 일을 성도의 몸에 적용이 가능하다고 보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구약 할례의 원형이라고 보십니다. 할례란 ‘혈육의 원천’을 없애는 일입니다. 더는 혈육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님을 만족케하시거나 기쁘시게 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혈육에 대해서 수리를 요구하거나 개선을 시

교회의 머리

골로새서 1:18 교회의 머리 로마서 6:20에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에서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모세와 아론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 은 하나님의 권세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 애굽의 현실체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자유’였습니다. ‘관계 끊어짐’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등장하면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서 살도록 강요받는데 애굽의 자리에게 보면 이들은 ‘애굽으로부터 자유’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 현실에 투입되는 낯선 현실의 대명사로

죄인 중의 괴수

디모데전서 1:15-16 죄인 중에 괴수 사도는 죄를 두고, 누구보다도 더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타인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죄가 많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는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생애는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본인도 속아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속아넘어간 세월이 됩니다. 그 속임수는 다름이 아니라 ‘성공일까 실패일까’를 본인이 판단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인간은 자기 성공에 속아 넘어가고 또한 ‘실패’라는 속임수로 인해 낙담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성공은 없고 성공이 없기에 또한 실패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원단 위에 새겨진 문양이 자체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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