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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과 허상
히브리서 11:1-3 실상과 허상 ‘나를 위한 일’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현실’도 없습니다. 이게 실상입니다. 그런데 허상은 ‘나’가개입되면서 발생됩니다. 마치 이 세상 전부가 ‘나를 위한 세상’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누가 이런 사고방식을 퍼뜨렸겠습니까? 악마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악마의 마음을 갖고 출생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인간들에게 있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실상의 나라에서 인간들이 사는 허상의 나라에 왔을 때, 흉측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허상의 나라에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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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전
디모데전서 6:1-2 상전 사람이 일을 하므로서 발생되는 것이 조직체입니다. 여기에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조직 사회에는 필수적입니다. 책임을 더 지는 자와 책임을 덜 지는 자의 차이입니다. 이들은 함께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노동하는 자들입니다. 사도는 세상이 조직 자체를 더럽다고 모조리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 조직체 내부에서 인간들의 만남을 통해서 악한 본성이 발휘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사회 속에는 잠재적인 본성이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위해 상대가 존재한다고 단정짓는데 있습니다. 즉 타인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자신은 그것을 이용하여 쉽게 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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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욕을 좇을 스승
디모데후서 4:3-5 사욕을 좇을 스승사람들은 패배하기 싫어합니다. 늘 승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승자가 되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사람들을 만나고 찾아다닙니다. 자신의 승자와 대단함을 증명해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외롭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옹호해줄 자가 없어 외로운 겁니다. 인간들의 근원적인 탐욕은 악마의 욕망의 연속입니다. 자신을 절대적인 신으로 여기는 그 성질이 각 개인을 통해서 발산되니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잘난 자들의 투쟁장입니다. 자신을 못난 자로 규정해줄 스승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과객으로 위장한 도인이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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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아들
디모데전서 1:1-2 참 아들‘그리스도’,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의 명령으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바울은 세상 전체와 싸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즉 보이는 부모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보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통해서 새로운 자식이 생깁니다. 그 사람이 바로 디모데라는 사람입니다. 서기 17년 경 소아시아 남부 지방 루스드라 출생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 유니게와 조모 로이스로부터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배웠습니다. 이후 바울이 45년 ~ 46년에 현재 터키 지방으로 첫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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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에서 생명으로
고린도후서 2:16-17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생명으로’와 유사한 말씀이 로마서 1:17의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천국에 가려는 자에는 확실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 통념상 진리라고 여긴 것이 도리어 참된 진리를 감추기 위한 수작인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모든 가진 힘을 다해서 진리를 질식시키려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내가 믿음으로 내게 구원이 주어지도록’ 시도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행함에서 끊어지지 않고 ‘행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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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는
디도서 3:3-4 전에는 “비나이다” 이 행위는 전능자를 의식하면서 인간들이 보여주는 근원적 태도입니다. 장례문화는 옛적부터 매장 방식이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사라진 자신의 전부를 인간들은 미리 예상하고 몸서리칩니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빌고 또 비는 것은 매장되는 것, 즉 자신을 사라져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신에게 비는 궁극적인 바람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아 있게 하옵소서. 그것도 천국에 살아있게 하옵소서!”이런 요구는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당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악과 따먹도 뭘 요구하게 될 지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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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만
골로새서 1:19-20 충만‘충만’ 곧 ‘가득 차’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예수님의 활동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역에서 아버지의 뜻 펼치는데 있어 모자람이 없이‘충만’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되는데 있어 최적화된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벌리시는 예수님 활동에 지장이 없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활동의 내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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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기세덱
히브리서 7:1-3 멜기세덱 내 인생이 제대로 되어간다 아니다를 굳이 우리 자신들이 확인하려 하면 안됩니다. 성경의 세계 안에서 놓여 있는 자들은 성경 말씀이 대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면 정상적인 성도의 삶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받아 지옥에서 통곡할 삶입니다. 그 이유를 멜기세덱이 알려줍니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을 인간적인 면과 하늘의 존재,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그‘없는 존재’인 것처럼 이 땅에 살다 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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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 싸움
고린도후서 10:1-4 영의 싸움싸우며 피곤합니다. 그래서 안 싸우려고 합니다. 승리감이 주는 쾌감도 신나지만 그 과정이 미리 생각해보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적게 고생하고 적게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삶의 요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 내막을 살펴보면, 고생은 남이 하고 자신들의 그 노고의 대가없이 즐기고 싶어합니다. 고생한 자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생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도둑질하듯이 그 영광을 가로채는 식으로 행복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도처에 불합리합니다. 노력한 만큼 정당한 열매가 돌아오지를 않고 그 과정에서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달라붙습니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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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비밀
골로새서 2:1-3 교회의 비밀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지금의 터키 동남쪽 내륙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곳에 사도 바울 일행이 간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세상에 있는 비밀’들은 인간들의 호기심을 작용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다지 호기심을 유발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지난 날의 어느 광적인 죄수는 결코 영웅의 범주에 넣어주는데 주저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비밀’이 비밀답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얼추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3:14-16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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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적인 자랑거리
빌립보서 3:4-6 육적인 자랑거리하나님에 대해서 충성을 하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해내신 일을 빼고 하나님을 거론한다면 이는 곧바로 ‘교회 핍박’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게 하신 교회는 공격하는 세력은 자신의 육신적 성과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성과를 안 믿는 것과 자신의 육신적 행함을 신뢰하는 것과 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신의 자존심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자들이 아니라 타인의 성과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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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의 기도
에베소서 1:15-18 사도의 기도 ‘산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정의(定意)는 ‘밥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마감되는 것이 기본이라고 여깁니다. 밥 없이 못산다는 점은 경험상 누구도 아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하기에 민망하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태어났기에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사는 게’ 기본이고 나머지 사항은 그 위에 걸쳐지는 내용들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성도는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만이 진정 살아계심’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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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례와 전체 율법
갈라디아서 5: 2-3 할례와 전체 율법할례를 행한 자는 전체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할례와 전체 율법이 연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할례 율법만 따로 전체 율법에서 떼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율법이 인간 몸에 새겨지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나오는 몸 자체에 대해 소속성과 취지를 부여하는 것이 할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통해서 다른 인간 무리, 인간 집단과 구별하십니다. 즉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것과 달리 살아야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 겁니까? 그들은 義(의)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즉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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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5-8 예수의 마음 “기죽지 말라” 흔히 허세 많은 부모들이 자식 교육용으로 하는 발언입니다. ‘기죽는다’는 말은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아갈 때나 성립한다. 수평적으로 옆 사람들과의 비교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려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 예수님을 내려 보내시게 되는데 이 세상의 환경이 하늘나라와는 참으로 극과 극으로 대비되기에 이 세상은 예수님을 처참하게 취급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기대하는 메시야상하고는 터무니없이 차이 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경로 말고, 인간들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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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내용
고린도후서 7:13-15 참된 내용세상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인간들의 과학정신은 이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일목요연한 질서와 법칙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려왔습니다. “자연아 꼼짝마라!”는 도전 정신으로 자연 속에서 영원힌 진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벌려왔습니다. 이런 노고과 그 결실에 대해서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태껏 해온 대로 계속 자연의 비밀에 도전하고 연구하면 세월이 지나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진리에 근접한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희망을 갖습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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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과 문화
골로새서 3:11 인종과 문화 문화란 실은 추상적인 겁니다. 문화의 실체는 인종입니다. 인종이란 집단적으로 특색을 따로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관심사란 토지와 기후와 자연환경과 관련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토양과 기후에 맞게 사람들은 적응해보려고 합니다. 대자연의 변덕스러움이 인간 생존에 방해요소가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자기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을 점차 체득하게 됩니다. 확정된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그 지역의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됩니다. 집단의 결속력이 다져지면 이러한 전통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법이 됩니다. 곧 ‘의로운 견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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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하는 영광
고린도전서 12:25-27 함께 하는 영광영광이 있기 전에 반드시 버틸 수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고통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습니다. 홀로 이겨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위로하는 것으로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욥의 경우를 봐서도 그러합니다. 위로하려 왔던 욥의 친구들이 결국에는 욥과 원수지간으로 돌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욥은 인간들이 위로를 필요로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들이닥친 고난이 원상회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난이 아니라 반대로 원상 자체를 없애버리기 위한 작심이 하고 들이닥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욥의 친구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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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실한 자
에베소서 1:1-2 신실한 자‘신실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 오늘날 참 신기하게 들립니다. 사람이란 다 같은 것 아닙니까?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입니다. 유별난 사람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분합니다. ‘신실한 자’라는 부류를 만들고 그들을 향해서만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신실한 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해석될 수 없는 이야기를 펼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신실한 자’가 되기 위해 그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신실한 자’를 규정하기를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 안’이라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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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집
디모데전서 3:14-16 하나님의 집‘경건의 비밀’이란 TV 스윗치를 과감하게 끄는 것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재미나는 것, 신나는 것, 만족스러운 것들을 그분의 살아 계심으로 인하여 단숨에 접고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본인이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무가치성을 주님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혹은 온유함입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소개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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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바브로
골로새서 1:6-8 에바브라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신실한 일꾼(골 1:7)이라고 소개한 에바브라를 통해 성도가 평소에 하게 되는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골 4:12)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개종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음에도 사도 바울이 “함께 된 종 사랑하는 에바브라”(골 1:7)라고 부른 것은 에바브라가 자신으로 인해 개종하였다는 사실을 추후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결과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