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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
빌립보서 2:1-4 겸손 다른 사람의 일까지 신경 쓰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간주되기 일 수입니다. 타인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사정을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일방적인 견해를 상대방에서 강요하듯이 다가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적인 겸손하고는 다른 내용입니다. 세상적인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므로서 결과적으로 보다 겸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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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부음을 받음
히브리서 1:8-9 기름부음 받음하나님의 보좌에는 천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한 권한이 있는 천사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3-15) 악마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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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삭 믿음의 내용
히브리서 11:20 이삭 믿음의 내용이삭은 자기를 위한 자식을 얻지 못합니다. 마치 이브라함이 예상치도 못한 이삭이라는 자식이 자기를 찾아온 천사의 예언을 바탕으로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드러날 을예언의 내용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 믿음’은 애초부터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의 믿음에 대한 이삭의 반응으로 인해 ‘이삭 믿음’이 추후적으로 성립됩니다. 그래서 이삭의 믿음은 하나님의 예언을 지닌 야곱과 에서의 행위에 종속되는 바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을 살려내는 방법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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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향
히브리서 11:13-16 본향‘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이 문장은 다음의 네 가지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믿음’,‘죽음’,‘약속’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약속’이 제일 큰 범위와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죽음’입니다. 그 다음은 ‘믿음’입니다. 그 다음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약속과의 만남을 위하여 필히 죽어야 하며 그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약속에 대한 믿음이 발생되어야 하며 그 믿음을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자들이 따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지 않는 약속이 이 세상에 ‘죽음’과 ‘믿음’과 ‘특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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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 자의 본
디모데전서 4:12-16 믿는 자의 본 고린도후서 10:4-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의 연락을 막는 모든 방해물과 장애물을 제거되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자에게는 이 장애물이 계속 놓여지게 되지만 신자에게는 격파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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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6 새로운 피조물 ‘창조 원리’를 고스란히 살려낸 결과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창조 원리’가 나타났음을 알리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 원리’란 기존의 피조물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성격을 유지하면서 나타내는 원리를 보여주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형상에 대해 피조물 스스로가 제조하는 방식이 종교 시장을 통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각자 상상한 피조물 상이 따로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질적으로 신성하고 거룩한 자아상을 본인들이 미리 꿈꾸게 됩니다. 곧 인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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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긴한 지체
고린도전서 12:18-24 요긴한 지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상대를 향하여 나름대로의 비판과 평가를 날리기 마련입니다. 아군인지 적인지, 동지인지 아니면 원수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그동안 그 개인의 일생에서 터득한 생존방식이 여지없이 가동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 이익을 위해서 연합을 할지언정 몸과 몸의 결합을 한다는 것은 혼인 이외의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들의 움직임이 사적인 몸 차원에서 설명되어서는 아니 되고 지체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곧 지체가 “내 몸은 어디 있지?”고 물을 처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식으로 내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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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과 능욕
데살로니가전서 2:1-4 고난과 능욕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라는 곳에서 사도바울의 일행(디모데와 실라)는 이런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자마자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바울이 치료하자, 주인들은 수입원을 잃게 된 것에 분노하여 급기야 두 사도를 고소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매를 맞고 투옥되고 맙니다. 사도 일행은 여전히 찬양하며 기도했는데 기적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인의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착고란 두 개의 긴 나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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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
고린도후서 7:1 거룩 ‘거룩’이라고 했을 때 자꾸만 ‘개인적 거룩’을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줄곧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것은 개인적 거룩이 아니라 ‘집단적 거룩’입니다. 즉 홀로 도닦는다고 해서 거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의 연합적 관계에 묶이므로서 거룩에 참여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 거룩을 위해 개인적 거룩을 추구하는 자를 ‘비(比)-언약적’ 인물로 규정하게 됩니다. 하나(1)는 개인이 본인에게 적용해서 표현할 수 있는 하는 숫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만 붙일 수 있는 속성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시기에 우리 개인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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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4:9-12 형제 사랑형제사랑은 복음의 내용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복음만을 주고 받아야 그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복음을 대체할 만한 것들을 악마는 계속해서 이 세상에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이라는 의미가 주어지면 사랑받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즉 평소에 내가 꼭 원했던 바를 이 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휘말리게 됩니다. 내가 먼저 형제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면 형제도 보답하듯이 나에게 사랑을 내놓을 것이라는 거래를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익히 12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12-1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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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한 것
고린도전서 12:1-3 신령한 것무엇을 향하여 저주를 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은, 내 영역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강력한 저항의지의 표시입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평소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 잘되고 편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에 충실하며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은 그들이 인정하는 신(=우상)을 통해서 그들의 본심이 밝혀지게 됩니다. 동시에 구약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자기 백성에게 ‘우상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취지도 함께 밝혀지게 됩니다. “네 자신을 극대화 하는 신은 가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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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라는 원수
고린도전서 15:25-28 죽음이라는 원수 인간의 원수가 있는 반면에 예수님(하나님)의 원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했던 아픔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뭔가를 체험했다고 해서 다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기대치나 소망이 무참하게 좌절되었을 때에, 깊은 상처와 함께 깊이 있는 의미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각자 마음의 상처가 다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상처는 빠른 시간 내에 회복되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이러다 보니 예수님의 심정과 전혀 다른 노선을 걷게 마련입니다. 사도가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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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목제물
본문 : 고린도후서 5 : 18-19 제목: 화목제물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뇌물을 바치는 것과 다릅니다. 뇌물이란 상급자의 심기를 달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귀한 것을 드려서 자기 처신을 수월케 하겠다는 목적이 있습니다. 즉 드리는 사람의 이익을 계산해서 바치는 것은 뇌물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제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뭘 바치고 어떻게 바쳐야 하는 그 모든 오직 ‘약속의 땅’에서 나온 소산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땅의 풍부한 생산물’로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생산물이 우선이 되면 ‘사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왜소해집니다. 곧 인간은 ‘유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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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 대한 모독
히브리서 10:26-31 피에 대한 모독 모독감은 질투에서 비롯됩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사랑받은 자를 통해서 차별을 감지하면서 분노로 나오는 것이 모독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태도입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왜 자기가 아닌 타인을 죽이려 했을까요? 성경에서는 가인에게 죄가 덮쳤다고 했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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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의 의
갈라디아서 3:6-9 아브라함의 의없어질 의(義)라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義)가 아닙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가진 의가 개인적인 의라면 그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의 처신에 따라 떨어져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당사자가 제대로 처신 못하여, 받은 의로움도 취소가 된다면 이것은 어디까지 임시적인 의로움이고 끝까지 천국까지 전달이 불가능할 수 있는 미완료적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현재 존재하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으로 거래하거나 흥정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진정 믿은 것은,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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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에
데살로니가후서 1:10 그날에 누가복음 21:35-36에 보면,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흐르는 시간이 이 지구를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즉 시간이 강물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가면서도 정해진 목표점이 있다는 겁니다. 이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 설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분류됩니다. 급류에 빠진 인간이 아무리 허우적거려봤자 그 거센 물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의 세찬 일방적 몰아세움에 인간들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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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림
데살로니가전서 2:17-20 강림 일한 자에게만 공로와 공적이 돌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이 우주의 모든 수고와 애씀이 모두 예수님에게만 해당됨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다른 이들과 다른 것들은 파괴되어도 합당합니다. ‘강림’, 즉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권세를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자기 고유의 가치를 움켜 쥐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님의 강림을 분석할 그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할 말을 잊으라’고 주어지는 사태입니다. 즉 인간은 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이랬다 저랬다하기 마련입니다. 즉 최종적인 것이 인간들에게 찾을 수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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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가정 181007
갈라디아서 6:9-10 믿음의 가정 가족의 성립은 하나님의 작용과 사람의 수용으로 나타납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혈육은 인위적으로 끊기가 힘듭니다. 몸에서 몸이 튀어나와서 구성된 게 가족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타인이 아니라 ‘나의 확장’이 되는 겁니다. 서로가 각자 ‘여러 나’입니다. 가족을 무시하는 것은 곧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서 본성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족을 남 대하듯이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교회란 남의 가정의 집합소요 남들입니다. 자기 가족 대하듯이 교인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안면 있으니 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느 정도 경쟁 엮여져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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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에 대한 반박
고린도전서 15:35-41 부활에 대한 반박사도는 억지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 되어진 사실을 그대로 증거할 뿐입니다. 도리어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왜곡되게 세상을 보고, 그 잘못된 세상관에 자기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사도가 전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의 왜곡된 인생관 내부에 ‘부활에 대한 반발 의지’가 도시라고 있음이 들통나게 됩니다. 그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정립된 게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름대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듣고, 보고, 배운 게 있기에, 구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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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의 다양성
고린도전서 12:4-7 은사의 다양성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과 은사를 받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의 재주는 인간과 인간과의 차이를 나타내지만, 은사는 영원토록 반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은사란 곧 ‘유한(有限) 속의 무한(無限)’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유한이 어떻게 무한을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은사는 인간이 요청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한함을 유한함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인간에게 소유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깨트려버리기 위해 오는 겁니다. 즉 “내가 주의 일했다”는 주장하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