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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로 된 교회
고린도전서 14: 34-40 계시로 된 교회‘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서 온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사람이 다가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추정해서 실시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모든 영적 작업은 항상 하나님편에서 주셔야 하고, 일단 주시면 인간들이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바 되면 그 사람은 본의아니게 예수님처럼 외로운 인생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오해받고 천대받는 삶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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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율법
골로새서 2:13-14 십자가와 율법인간들이 구원하는 방식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이 확연히 차이나는 대목이 구약 민수기 21:7과 8에 나옵니다. 우선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 뱀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백성들이 요구하는 바는 자신을 아프게 하고 죽게 하는 뱀이 자기에게서 떠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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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한 구원환경
디모데전서 2:1-4 동일한 구원 환경 지위가 높은 자들도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이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 세계서 높은 직위란 곧 ‘교만’을 키우는 환경이 된다는 점을 감안해서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는 원리는 제 살기 위해 남을 공격할 수밖에 구조로 나타납니다. 당연히 여기서 축적된 힘으로 우열이 정해집니다. 보다 많은 힘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문제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는데 관심두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전혀 자신을 지켜낼 힘이 없는 자들은 내세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도 떵떵거리면서 잘 살다가 천국에도 거뜬하게 들어간다면 상대적으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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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
히브리서 3:7-11 광야 광야생활의 핵심은 삶의 환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道)와 율례를 가르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에 관해’배우게 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점은 광야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광야는 기피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자력으로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를 배우기도 전에 이미 자신이 지키는 원칙과 규칙을 내부적으로 마련해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끼리의 집단에서 배운 겁니다. 광야의 특징은 모두 다 동등하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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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속죄
히브리서 9:11-14 영원한 속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육신을 섬기는데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들의 필생의 역점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점사업입니다. 시작은 하나님부터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해진 목표가 있어 모세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그것은 자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요 세상의 그 누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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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의 대적자
디모데후서 4:14-16 사도의 대적자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배교자입니다. 이 사람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세 소개하는 이유는, 디모데에게도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차원입니다. 이 사람과 더불어 배교한 사람은 디모데전서 1:20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후메내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9:24에 은 세공업자 데메드리오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 일행에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데미라는 우상을 제작하는 공장을 운영한 사람인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자신의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악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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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의 출처
에베소서 4:8-10 선물의 출처 선물이 나오는 것은 땅도 아니요 하늘도 아닙니다. 고정된 곳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 나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비로소 선물이 제공됩니다. 이 과정도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인물이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적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진정 영원한 가치를 지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삽니다. 전쟁 없이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있지도 않는 전쟁을 거론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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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갈과 사라
갈라디아서 4:21-23 하갈과 사라 이 땅에 ‘사랑’이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찾는다 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사랑이란 ‘없는’데서 생겨나는 식으로 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미움’을 사랑을 싫어합니다. 사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미움’은 그 자체로서 미움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배척하므로서 미움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즉 미움의 속성이 사랑의 속성을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구약 아브라함 이야기를 가지고 이 세상의 정체를 다 밝힙니다. 비교하고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질서가 이 두 줄기를 통해서 세상 끝날까지 전개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숨겨진 대립된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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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에 대한 반발
고린도전서 15:12-15 복음에 대한 반발복음에 대한 반발은 인간 세계에서는 마땅히 일어나야 될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거쳐 가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고 살해하므로서 이 세상의 밑바닥이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게 된 형편 속에서 후손들이 계속 기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고, 아무리 다양한 문화와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하더라도 “복음 싫어!” 정신만큼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이끌고 움직이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현상을 허락하신 이유는, 반대에 의한 ‘핍박받는 진실상’을 통해서 자기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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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평강
고린도후서 13:11-13 사랑과 평강‘끝’이란 긴장되는 동시에 조금 그 시점을 지나가면 곧장 시시해져버릴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끝’을 조성해냅니다. 마치 인간은 평생 멈추지 않는 게임만 연속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과연 더 이상 나의 의지로는 움직여지지 않아 보이는 저 ‘나의 시신’ 너머에 우리 자신들은 무엇을 또 고대해야 하나요?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이십니다. 살아 있을 때, 죽을 때나 예수님 앞에서는 한결같은 기준을 동원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시작’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가 된 이유가 바로 예수님에게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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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들이여
에베소서 5:25-27 남편들이여! 남편 된 자들은 아내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임당하는 조건 하에 이 땅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되레 죽임을 당하는 경우란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약자인 남편이 강자인 아내에게 죽임(굴복, 경제권 양보, 작전상 자존심 잠시 꺾기)같은 것은 너무나도 보편적입니다. 남편이고 아내고 간에 재산으로나 지식으로나 과거생활에 있어 유책 사유가 적은 쪽이, 많은 쪽을 통제하는 것은 흔하게 발견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면으로 보나 남편이 강하고, 우세하고, 바르게 살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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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나팔소리
고린도전서 15:51-53 생명의 나팔소리‘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언약 실시를 알리는 장치 같은 겁니다. 출애굽기 19:16에 보면, 시내산 꼭대기의 정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천사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현존성을 피조세계에 알리는 현상입니다. 나팔소리가 울리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모든 작업이 언약된 대로 실시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기능이기도 합니다. 즉 언약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공개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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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소망,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1:2-3 믿음, 사랑, 소망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땅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체하는 것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유사품이죠. 엉터리요 가짜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원한 것들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 행복의 염원이 믿음의 염원, 소망의 염원, 사랑의 염원으로 나온 겁니다. 즉 인간들에게서 ‘염원’이 분출됩니다. 자아도 조절할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도 없는 염원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본인조차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염원들의 최종 내용물은 무엇일까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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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로 인한 영광
빌립보서 1:7-11 열매로 인한 영광‘내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고질병 같은 겁니다. 인생이란 오락이 아닙니다. 자기 즐거움을 채워주는 상황들이 아닙니다. 도무지 ‘나’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실은 허락된 적이 없는 곳입니다. 온통,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입니다. 이런 곳에 ‘나’가 있습니다. 이 ‘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처리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일에 인간이 책임이 없고 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즉 일을 주님이 벌리시고 우리는 그 혜택을 입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45에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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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얻을 것 다 얻었으며 굳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본인이 원하는 것은 본인만이 알고 있고, 또 기도하는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것을 달라고 기도할 겁니다. 하지만 복음 세계에 들어왔으면 본인이 원하는 기도는 거부당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알려진 내용이 현실이 성사되는 데 있어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자들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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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의 반복
고린도전서 11:23-26 그 날 밤의 반복인간 세상의 진실은 인간 세계가 자체적으로 발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부터 유일한 생존의 터전은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저주가 충만하고 순서대로 주변의 인간들이 죽어나가도 희망걸 곳은 오직 이 세상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든지 간에 이 세상 자체를 통째로 부정할 의견을 수용되지 않게 됩니다. 마치 가족 회의하면서 가족들이 집단적으로 조속이 망할 궁리를 하는 가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약하면, 이 세상은 인간에게 있어 어떻게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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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히브리서 9:18-22 피 여기서 말하는 ‘피’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흘린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과 동일한 피를 가진 혈육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복동생들의 피가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 피로 인하여 새로운 하늘나라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십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이 지옥적인 세상에서 자기 가족 찾기에 나서신다는 뜻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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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복음
갈라디아서 1:6-8 다른 복음‘복음’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다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복음답게 전파되는 그 현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수난이 재현됩니다. 이런 수난을 동반하지 않고 전달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편지글처럼 그냥 내용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담고 있는 그 내용이 ‘낯선 현실’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실내용이기에 이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인간들로부터 여전히 밉상 받을 만한 내용이 새롭게 등장하게 됩니다. 즉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은 복음이 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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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선고
고린도후서 1:8-11 사형선고 사람들은 매사가 잘 안 풀리면서 자신이 혹시 악행을 저지른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터키지방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뻔한 것은 복음을 잘못 전했거나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시간과 공간은 사도의 것도 아니요 그 어느 인간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위에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마치 자신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 재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자신 형편을 향상시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은 모든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의 복음의 위력을 알리기 위한 환경입니다.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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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사랑
에베소서 5:28-33 부부 사랑 사랑이란 관심 갖는 겁니다. 관심을 주고 받으려면 ‘나의 고정함’을 고집해서는 아니되고 변화의 여지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 자신에게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변화되지도 않으면서도 변화되었다고 우길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그 타인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심놓고 나의 변화를 일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 사랑의 조건은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복음을 주고 받고 말씀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초월적 률이요 이미 확정된 원칙입니다. 수정되지 않습니다. 부부 서로가 이 복음에 종속되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