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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고린도후서 1:23-24 믿음 ‘구원은 믿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구원은 행함이다’의 선입견을 염두에 두고 나온 말씀입니다. 곧 모든 이들에게 있어 ‘구원의 행함’이다는 올무에서 인간은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행함으로’ 성취되는 구원 이외에 달리 구원을 생각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이다’는 말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익히 안다고 우기는 그 구원을 ‘믿음이라는 이름의 행함’을 동원시켜서 얻어내고자 할 게 분명합니다. 즉 ‘구원’ 자체가 인간이 예상하는 그런 구원이 아니라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하고,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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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항상’ 그리고 ‘쉬지 말고’, 그리고 ‘범사’, 즉 ‘모든 일’이런 표현들은 이미 성도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다 천국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성도가 본인이 알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덮친 상황 안에서 성도가 놓여 있는 겁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제자들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계속 유발하시고 제자들은 어쩔 수없이 그 상황에 저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에게는 어떤 결정권은 없습니다. 극히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벌이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급급합니다. 본인이 따로 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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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치는 착한 일
고린도후서 9:6-9 넘치는 착한 일예수님이 가난한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마태복음 10:9-10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행색을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하고 다니는 것은 이 세상이 영구히 존속할 세계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특히 예수님 앞서 나타나신 선지자인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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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엣 것
골로새서 3:1 위엣 것 주어진 시간, 놀면 안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이는 땅에 있으면서 하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방인들도 늘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의 범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에 무슨 성격의 일을 해야하는 겁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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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에서 살기
빌립보서 4:1 주 안에서 살기살아온 게 세상 안에서 사는 경험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서 ‘자기 안에서’ 살아온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성질들이 여지없이 내 몸과 부딪히면서서 여기서 ‘나’가 발생되는 겁니다. 마치 세포가 소금물에 잠기면 어쩔 수 없이 소금물이 세포내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따로 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 산다’=‘내 안에 산다’가 됩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사는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달리 사는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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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기도
디모데전서 4:5 말씀과 기도 말씀준수와 기도에도 표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 내용에 대해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배제됩니다. 그것은 창세 전에 예수님과 아버지와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후에 창조된 인간들로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기도의 응답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진척될 뿐입니다. 즉 세상에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요 그 어느 것 하나 허비되거나 공연히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꼭 필요에 따라 모두 일어난 일입니다. 말씀과 주님의 기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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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0년 후
갈라디아서 3:14-17 430년 후430년 후에 주셨다는 ‘그 율법’으로 인하여 그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은 ‘본격적인 율법’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율법인 것’과 ‘율법 아닌 것’으로 하나님쪽으로 분류를 하신 이유는, ‘인간’과 ‘인간 아닌 자’를 분류하는 것과 결국 관련 있습니다. ‘약속된 인간부류’와 ‘약속이 아닌 인간 부류’를 따로 이 세상에 생산하시는 겁니다. 마치 과수원에서 시장에 내다 팔 과일 가운데 ‘상품화 될 과일’과 ‘상품화 될 수 없는 과일’을 미리 선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수농부에게 있어 사전에 알 수가 없고 결과를 보고 비로소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 아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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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교훈
디모데전서 1:3-7 거짓 교훈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귀한 존재로 탈바꾸기 위해 필요한 교훈과 진리를 찾아해매게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해 들어야 될 좋은 가르침을 흔쾌히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건강 비법과 과학적 성과 같은 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로 이끌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여전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되지를 못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출생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생이 된 이후’에 알게 되는 것들은 이미 출생해버린 본인들의 욕망이 관여하여서 왜곡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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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만 전파
빌립보서 1:15-18 그리스도만 전파주님에게만 마음 두고 산다고 자부하다가 막상 자기에게 불리한 사건 하나 터지면 평소에 꾸준히 자기에게 관심 두고 살았음이 폭로되면서 예수님의 존재를 묵살해버립니다. 그런데 사도가 옥이 갇힘으로서 평소에 사도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가진 자들이 이참에 자신들도 사도의 흉내를 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나 복음이 단지 ‘핑계’로 도용되고 자신들의 세상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됩니다. 그런데 이런 질투심에 대해서 같이 질투심으로 나아가면 아니됩니다. 어떤 현상이 벌어질 때에, 타인들이 어떤 오해를 하든지 간에 먼저는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릴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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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사랑하라
갈라디아서 5:13-15 서로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늘 말씀에서는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언급합니다. 종이란 상대에 대해서 나의 권리를 외치지 말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만큼 해준다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상대에게 묻지 말라는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5:41에도 나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기준은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거나 측정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 개입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겁니다. 특히 마태복음 5:41의 말씀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 통용되던 다음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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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려 하는 자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 돈과 악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될까요? 부자가 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목표가‘돈’이라는 것으로 최종 단일화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 섬김의 라이벌로 돈이 등장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통용되어야 마땅한 세계망이 돈이 들어가서 관계망을 대체해서 형성하면서 유지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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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으로 나아가기
히브리서 6:1-2 완전으로 나아가기 인간 세계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을 인간이 알아채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일을 안다니!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아는 순간, 인간은 더는 자신이 벌리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버리게 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일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벌리신 결과 안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경이로운 가운데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의 원칙으로 인하여 하나님 복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하게 됩니다. 즉 인간만의 자체적으로 설정한 자기 세계가 무용지물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비록 시키신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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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시로 기도
에베소서 6:18-20 무시로 기도 복음과 무관한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이 복음답게 전파되기 위해서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위해서 기존에 자신을 살리기 위한 기도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기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본인들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숨쉬고 살면서 그냥 무심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팔방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성과 잘남을 멈추지 않고 날립니다. 획기적인 자기 위상을 눈치 채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 번개를 맞아야 합니다. 즉 “나는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실감해야 합니다. 이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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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과 아들의 차이
갈라디아서 4:4-5 종과 아들의 차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매일같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독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관련된 것들의 성격과 속성을 다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관계가 없다고 우기는 것은 단순히 상상에 불과하고 헛꿈입니다. 혼자서 못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때에도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죽게 됩니다. 살아있을 때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다 끊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혜택 입은 만큼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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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
고린도전서 11: 1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일반 사회에서는 통하는 ‘본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사도에게 그대로 적용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들끼리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들을 두고 서로 본받는 식으로 이미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현 시대에서 이질적인 모델은 거부하는 속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진리란 현 시대 생활에 가장 적합한 가치들을 말한다”고 이미 마음 속에 결정지어 놓은 상태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본받아야 될 모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구성원들 내에서 이미 결정져 있습니다. “우리 가문은…”, 혹은 “우리 가족은 …”, 혹은 “우리 부모님이 원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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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안에서 싸워라
에베소서 6:10-11 주 안에서 싸워라 마귀를 대적하는데 있어 왜 하나님의 것이 개입되어야 합니까? 이는 악마의 대적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겁니다. 인간 세계에 있어서 인간들은 인간들만 상대해서 눈에 보이는 승리만 낚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승리’라는 상태는 애초에 자신이 예상한 대로 결과를 나왔다는 겁니다. 즉 상대에 대해 미리 잘하면 이기고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본 겁니다. 처음부터 “나는 저 사람에게 무조건 져야 하고 굴복해야 돼”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의 가치를 포기할 의사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들을 상대하며 세상을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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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과 아들의 영
본문 : 갈라디아서 4 : 6 - 7 제목: 아들과 아들의 영영이란 육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영의 입장에서 볼 때에 모든 인간은 육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람’, 혹은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이 개념을 가지고 파생되는 개념은 바로 ‘신’ 혹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인간, 혹은 사람으로 여기면서 자신을 만든 분, 혹은 세상을 만든 분이라는 뜻으로 신과 하나님을 거론한다면 모조리 우상입니다. 육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기도하는 것조차 우상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 우상의 형식이 곧 악마의 ‘인간 지배 방식’입니다. 평소에 인간은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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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과 고생
히브리서 2:10-11 고난과 고생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 즉 ‘많은 아들들’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이 모델이 아니라 ‘인자(人子)’가 하나님 백성의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 땅에서 엄청난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생스러운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합당한 수준에 맞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고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율법대로 죽으시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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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의 연습
디모데전서 4:6-11 경건의 연습경건의 연습은, 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가를 익히는 연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 연습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멸망해야 될 세상 속에서 출현하면서 멸망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스스로도 멸망자로 살아갑니다. 익히고 습득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들입니다. 돌이켜 줄 주위의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마음을 합해 멸망의 길을 제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가 나서서 “이 길은 멸망의 가는 길이다”라고 말할 자가 없습니다. 혹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가 나서면, 다른 이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비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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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역
고린도전서 14:26-33 통 역통역이 가능하려면 상대방의 언어나 통역을 알아들을 사람들의 언어세계를 모두 알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통역의 은사’란 곧 일반적인 내용을 복음의 내용으로 전환시키는 은사입니다. 마치 평범하게 인간들 속에 오신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임을 알리는 작업이 곧 통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살고 계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과 같은 동질의 인물이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이 평범성은 곧 통역되지 않는 상태가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나름대로 자기 세계관에 맞추어 일방적인 해석을 하게 마련입니다
-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