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
목사님. 지난번 긴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의 글은 압축에 압축이 되어 있는데, 이번의 긴 설명으로 명확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목사님.
1. 창9장 노아가 함의 행동 책임을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을 합니다.
목사님의 창세기 설교를 들었을 때는 '함,가나안' 모두가 노아 속의 중보자를 통한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함은 들어가지 않고 가나안을 언급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요? 제 개인 생각에는 함의 불신앙은
대표성의 원리로 아들 '가나안'이 언급되어 중보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자에게 임할 저주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더 이해해야 할 영역이 있나 궁금합니다.
목사님
2. 약5:17에 엘리야를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고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은 교회 지도자가 환자의 연약함을 통해서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내용 중에 엘리야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이 기록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출현하여 기근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처럼 선포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구약의 엘리야와 야고보서의 엘리야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요?
(답변)
1. 여러 학자들은 짐작하기를, 노아의 노출을 함보다 가나안이 먼저 발견해서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지 않았는가 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함과 가나안 땅이 번갈아가면서 저주를 표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 105:23) 이는 야곱의 후손, 민족적 차원의 이스라엘의 시대에 있어 시조되는 함을 거론하는 경우는 있지만 언약적 실천에 있어 언약적 대적자로 가나안 민족들이 그 시대에 보다 더 구체적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2. 신약에 와서 구약에 대한 내용을 더 완전에 가깝게 설명하는 경우들이 흔히 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엘리야 사역의 더 깊은 적극적 활동성을 전달한다고 보여집니다.
(질의)
목사님. 엘리야 부분에 대해서 적어주신 글은 이해가 됩니다.
보내주신 글의 토대로, 신약 엘리야의 모습에서 구약을 본다면
엘리야 선지자는 실제 기도해서 Is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기도한 사람이었다고 보면 되는지요?
구약에 갑작스런 출현도 이미 선지자학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아합에게 당돌히 나아간 것으로 보면 되는지요?
이 엘리야 선지자 사역은 세례요한때까지의 선지자들의 사역으로 펼쳐지는데, 이 부분은 야고보서와 어떻게 연결이되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답변)
이스라엘의 회개는 지신의 삶의 바닥이 심판과 저주로 깔려 있음을 인정하게끔 하는데 있습니다. 엘리야를 비롯해 모든 선지자는 ‘고난’이라는 공통성을 보여줍니다. 이 고난을 통해 기존 인간 세계의 권세자의 위상이 배후에 ‘하나님의 원수’와 연계되어 있음을 들추어냅니다.
야고보와의 연결도 ‘고난’입니다. 즉 이 세상은 성도가 살기에 적합지 않는 세상임을 밝혀주는 그런 삶을 ‘고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목사님. 날씨가 춥습니다.
최근에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를 읽고 있습니다만, 내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저술하신(강의하신) 에스라,느헤미야를 읽었습니다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성전과 성벽을 재건축하도록 명하는 지도자는 학개와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참 성전의 실체를 알고 백성들에게 가르쳤는가?
만약 지도자들이 학개와 스가랴 통해 참성전의 의미를 배웠다면 왜 굳이 보이는 성전과 성벽을 지으라고 명령했을까?
또한, 율법의 외형(안식일, 이방여인과의 결혼 파온)등을 왜 지키라고 명했을까?
과연 이들은 참 성전의 실체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듭니다.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를 읽는 좋은 각도를 제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 '총독'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이 총독의 나라 밑에서의 제사장 제도란, 새롭게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제사장 나라의 한계를 디시 재현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 제사장 나라의 한계'는 곧 율법 앞에서의 인간의 한계를 말하게 됩니다. 제사장 나라의 단절이란 계시의 끊어짐을 말하는 겁니다. 율법이 지적하는 바는 곧 인간의 힘으로 메시아 때까지 계시를 연결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이라는 이름의 계시 자체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식으로 그 한계를 벗어나서 완성됩니다. 이 내용이 말라기 내용입니다. 제사장 언약의 완성으로서 메시야 나라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제사장 나라의 한계와 극복을 다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딛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이 보여줄 한계성을 미리 보여줄 임무를 띤 자들이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그들의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지요. 총독의 자젹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총독이란 곧 임시직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게 한계이지요.
(질문)
목사님. 평안하시죠?
한겨울을 지내고 있는지라 날이 많이 찹습니다. 건강조심하세요.
목사님.
막16:14-18을 보면 표적으로 여러 모양이 일어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의 의미가 부활의 연속성인것 같은데, 조금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까요?
목사님의 설교(마가복음)를 읽어봤습니다만, 잘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답변)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나타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적이란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신기한 일이라면 표적이란 예상밖의 일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계속된 주도적 활동으로 (사도의 계속된 주도적 활동이 아니라) 마가복음 16:18에 나오는 말씀이 말씀답게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이해하는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로 해석이니 이는 표적을 이적으로 오해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시는 말씀은 인간이나 마귀의 확인작업이 필요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주도적 활동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가복음 16:8에 준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이게 표적입니다.
(질문)
목사님.
질문을 다시 던져봅니다. 성찬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목사님의 글(십자가마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구약에서 유월절 어린양을 제거하면 우상이 되고, 신약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면 우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먹는 것은 십자가 전날의 성찬과 같은 기능(그림자 역할이지만)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이것을 구약의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ex.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의 시대) 등장했을 법한데요,
이 부분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한가지 여쭈어봅니다.
마17장24-27을 보면 '성전세를 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앞 본문의 죽음과 부활(23절)의 내용이 반드시 이뤄지게 되는데,
죽음과 부활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강화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전이신분이 세를 낸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과,
하필 '바다에서 낚시를 던져 건지는 물고기 입속의 한 세겔'의 방법이 주어지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답변)
1.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자신 사역의 배경으로 삼으신 것은 출애굽 유월절 제도와 거기에서 파생된 제사제도를 자신을 위한 모형으로 거두어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유월절 제도와 제사 제도의 반복을 통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천국에 도달되지 못하기 위한 걸림돌 기능도 아울러 실시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야구선수 이승엽 선수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게 된 56호 홈런 친 공을 다른 선수나 일반인이 아무리 야구 배트로 치고, 심지어 그 공으로 홈런을 친다해도 그 의미가 발생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그 공을 통해서 이승엽 선수의 진가를 알려하고 간직하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해석하려는 그 시도 자체가 예수님의 구원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작업의 일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마저 우상적 기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즉 십자가 믿고 지옥가는 겁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십자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서 나오는 십자가 능력으로 되는 일입니다.
2. 성전세 되는 것이 1번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므로서 사람들은 “성전세가 우선이요 예수님마저 성전세 내었기에 기존 인간 질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필히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전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두고서 비-상식적인 방식을 사용하므로서 ‘율법 완성’에 대한 인간들의 일반적 견해가 보여주는 비-구원성을 폭로시키시는 겁니다. 즉 “내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율법 완성에 대해서 너희들이 이해과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십자가적인 활동입니다. 곧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고 십자가 자체를 인간들의 구원시도를 차단하는 걸림돌 역할을 하는 취지로 일관됩니다.
(질문)
목사님. 그렇다면,
1번 성찬의 의미같은 경우는,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만을 위한 성찬의 기능이라는 것인지요?
제가 조금 세밀하게 여쭙고 싶었던 것은,
구약시대에도 목사님 말씀대로,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모형'으로 저 또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 모형이 아담,노아,아브라함,모세,다윗 시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났는지가 조금더 세밀하게 궁금합니다.
신약에서 구약을 이해하는 차원이라고 할까요?
(답변)
성찬의 기능이란 인간의 행함을 유인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인책에 인간들은 필히 걸려들므로서 ‘행위의 반복 효과’를 기대하는 인간들의 심성 속에서 죄의 근원과 결탁된 사항을 발췌해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메시아의 복음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아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수행해냅니다.
따라서 인간없이는(=죄인없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입니다. 이들의 모형적 활동은 히브리서 11장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들은 본인의 해야 할 일과 갈 길을 알지 못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즉 자기 인생이면서도 매우 낯선 인생을 살았고, 또 ‘남의 인생’이면서도 그 ‘남은 인생’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드러내는 반복적인 사건인 고로 그 ‘타인의 인생’ 초대받은 인생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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