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과 약 이야기

독과 약 이야기

 


독과 약 이야기      


하나님은 왜?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생명과와 함께 두시고 아담더러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하셨는가? 이건 한마디로 얘기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우선 분명한 것은 어떤 이들의 말처럼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아니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선악과를 거기 심어 놓은 것은 아니란 점이다. 하나님에게는 선악과와 생명과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두신 것이다.


생명과와 선악과 속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면 서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지만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건 주인만이 행사할 수 잇는 권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이지 인간이 보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물론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생명의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보기에 좋은 것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마음)으로 되어질 존재로 지음을 받은 자이지 아직까지 하나님의 형상(마음)을 가진 자는 아니다. 즉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창세기 1장의 사람을 겨냥하여 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2장의 아담이 1장의 사람이 되는 것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될 때에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창세기 2장의 아담에게는 에덴동산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아담의 입장에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넌 죽는다 그러니 절대로 먹어선 안된다 라고 할 때,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여 아니! 먹으면 죽을 그런걸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라고 얼마든지 반문 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선악과도 아름답고 생명과도 아름답다. 뱀도 아름답고 인간도 아름답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만든 세계는 어린양과 사자가 함께 뛰노는 세상이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노는 세상이고 생명과와 선악과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만약 창조주인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피조물의 마음으로 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빛 입장에선 어두움이 싫을 수가 있고 어두움 입장에선 빛이 싫을 수도 있을 수가 있다. 어떤 피조물에겐 선이 될 수 있는 것이 어떤 피조물에겐 악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인 것이 인간 입장에선 악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악과나 생명과는 하나님이 보시기엔 모두가 선한 것이지만 아담에겐 있어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선이지만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는 악이 된다. 각자의 생명에 따라서 즉 생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의 생명이냐? 아니면 네페쉬하야 라는 생명이냐에 따라서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게 감사한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페쉬 하야라는 생명을 가진 아담에겐 선악과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금하신 것이다. 아담이 만약 하나님 같이 되었다면 선악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모두가 필요한 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더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아담의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려 하심이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면 하나님 차원의 선에 이르기 전에 네페쉬 하야인 아담 수준에서 선을 따지고 악을 논하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선에 갇혀 하나님의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강건한 남자로 자라 있었다면 그땐 선악과를 먹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자기도 좋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자기도 아름답게 느끼기 때문이다. 예수님 눈에는 죄인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성경 속의 사람들 중에서 굳이 그리스도와 같은 강건한 남자로 산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울을 들 수가 있겠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겐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자유인에게 자유인처럼 인종과 사람의 벽을 넘어 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강건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신자들이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 겪게되는 딜레마 중 하나가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안 지내야 합니까? 술을 먹어도 됩니까? 담배는 피우면 안됩니까? 제사 음식은 먹어도 됩니까? 안 먹어야 합니까?" 라고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믿음에 강건한 남자가 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믿음으로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결국 자기 생명의 분량에 따라서 어떤 이는 받을 만 하고 어떤 이는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제가 어렸을 때 자란 고향에 가면 집 옆에 한 뼘밖에 안되는 도랑이 흐르고 있다.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그 도랑을 건너는데 무진 어려움을 겪었다. 그 도랑을 건널 때면 뒤로 멀리 가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뛰어 건너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짚는 발을 너무 멀리 짚어서 도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다.


그 때는 왜? 도랑이 여기에 있어 날 괴롭히느냐? 라고 원망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지금 가서 그 도랑을 건너는데 전혀 힘들어하지를 않는다. 도랑은 변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장성한 것이다. 그러니 과거엔 그렇게 문제가 되었던 도랑이 지금은 서정적인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결국 문제는 내가 그것을 수용하느냐 못하느냐의 능력의 차이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담에겐 죽고 사는 문제를 담고 있는 치명적인 것으로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예수님하고 아담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에게는 선악과나 생명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아담에겐 문제가 된다. 왜? 그런가?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차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셨고 아담은 네페쉬 하야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 포도주를 마시고 탐하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펄쩍 뛰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생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생명에 따라서 판단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도 되는데 바리새인들은 안 되는가? 바리새인들이 용납지 못한 것은 그들이 정해 놓은 선악에 대한 규정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악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세리나 창기나 바리새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이 눈에는 세리와 창기들은 절대로 어울려서는 안되는 속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바리새인들이 속되고 거룩하다는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의 판단 기준은 기껏해야 타락한 죄인들의 성과 속됨의 기준 때문이었다.


죄란? 바리새인들과 같이 선악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선악의 관점에서 아무리 좋은 선을 내어놓아도 하나님 앞에선 쓰레기이다. 마치 강아지가 뼈다귀 하나를 몰고 와서 주인님 이것 잡수세요! 라고 하면 그래 고맙다 라고 하며 받아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개는 자기 딴에는 최고로 주인에게 대접을 한다고 한 것인데,,,,지금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차이는 서로의 생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이 가장 거룩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을 비 거룩으로 인정해 버리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속되다고 하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골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 나서 보니 이건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도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따지지 않고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선악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땐 죽일 죄라고 펄쩍 뛰었는데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보니 죽여야 할 것이 아니라 살려주어야 하는 극과 극의 판단을 하게 됨을 볼 수가 있다.


흔히들 영화를 보면 "19세 이상 관람가" 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세 미만의 사람은 이 영화를 소화하기엔 부족하니 보지 말라는 뜻이다. 영화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데 그 영화를 현실과 이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사람과 보아서는 안되는 등급제로 나누어서 허가를 해 주는 것이다. 제한 가와 제한 불가의 차이는 소화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로 결정된다. 어린아이들에겐 폭력물이니 음란물들은 연령을 제한하여 상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과는 입에도 대지 않은 아담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선한 것도 아담의 눈에는 악하게 보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아담에겐 먹어선 안된다고 경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여자가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자.


창 3:6-7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여자의 관점에서 바라 본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엔 딱지나 구슬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았을 때가 있었다. 그 때는 딱지야말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 어른이 되어서도 딱지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어른이라 할 수 없다.


왜? 여자에겐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였을까? 이는 뱀의 말대로 선악과 속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는 심판의 기능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 때는 모두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였다. 왜? 어른이 되고자 하였는가? 이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렸을땐 부모에게 간섭받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어서 그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였다. )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심판자라는 말이다. 즉 주인이라는 말이다. 선악과와 생명과를 언약적인 관점으로 해석을 한다면 먹으면 죽을 선악과는 옛 언약인 율법신앙을 말하고 먹으면 살 생명과는 새 언약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율법 신앙을 좋아한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율법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심판 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킨 자에겐 영광이 있고 지키지 못한 자에겐 정죄가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악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매력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지킨 자는 하나님 같이 되는 권세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난 지켰는데! 당신은 왜? 안지켰습니까? 라고 비판하고 정죄 할 수가 있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초림 때 오셔서 보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킨 자로서 세리와 창기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인간들 입장에선 갖고 싶은 권세이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높아지려고 하는가? 남을 다스릴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분은 높고 낮음이 아닌데도 인간들이 그렇게 정해 놓았다.) 그러나 목사나 장로가 된다고 해서 권세를 아무나 행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와 장로에 걸 맞는 성도들 보다 한 차원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름하여 윤리 도덕이고 열심과 충성이다.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능력이란? 다름 아닌 남보다 더 나은 인격과 열심과 충성과 봉사이다. 남 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하고, 전도를 더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을 하지 못한 자들 앞에선 자연히 높임을 받게 되어 있다. 그 남보다 기도를 더하고, 남보다 헌금을 더하고, 남보다 전도를 더하고, 남보다 금식을 하고, 남보다 예배에 더 충실한 나음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난 당신보다 더 온전한 생활을 하였기에 당신을 판단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함이라는 신앙을 버릴 수 없는 매력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행함(율법) 자체는 좋은 것인데 사람들이 나쁘게 사용하기 때문에 행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율법을 지킨) 인간들 속에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본성이 들어가 있는데 누가 이런 왕 노릇 할 수 있는 행함(율법신앙을) 포기할 수 잇단 말인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을 들어 보라. 하나님이여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저기 있는 저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기도 속에는 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을 마땅히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행함이라는 "명가의 보도"를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들도 다 이런 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알기 때문에 당연히 너를 판단하고 정죄 할 수가 잇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많이 알고자 하는가? 물론 성경을 많이 알아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자라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싶으면 그 때부터 상석에 앉아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판단하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물론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들이다. 이처럼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것은 곧 때로는 남을 구속하는 칼로 작용하게 된다. 칼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 그 칼에 자기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한다. 그러니 칼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는 은혜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법이라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란 사람에 따라서 약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독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잘 사용하면 생명을 사용하는 명약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약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하여 천국의 서기관은 옛 것과 새 것을 유효 적절하게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나서의 반응을 살펴보자. 그 반응 속에는 선악과의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자 그때까지는 벗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안 되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등장했다. 아담이 그 동안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수치스러움도 아니고 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수치로 여기지 않았고 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가벗고 살았던 것이다.


만일 아담이 벌거벗고 사는 게 하나님 눈에 거슬렸다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 가장 먼저 제일 멋진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벗은 모습이 선하기만 했고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므로 거기다 어떤 다른 것을 걸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아직 하나님 같은 심미안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선악을 알게 되니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그것이 부끄러움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행위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있어 가장 시급하고도 중차대한 일은 하나님의 심미안을 가지는 일이지 자신의 차원에서 아름다움이니 추함이니 선함이니 악함이니를 따질 일이 아니란 점이다.


(마치 대학생들이 정의감에 사로잡혀 해야할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를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당시엔 그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사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행하는 모습을 하는 대학생들에게 야! 그것은 배부른 인간들의 이데올로기 싸움이니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충고를 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란 어차피 인류가 걸어왔던 길을 반복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고 난 아담 역시 철없는 대학생들과 같이 자기 기준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는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담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치마 만드는 일에 삶의 대부분을 소모하게 된다.


먹고 배부르지 못할 일에 일평생 진액을 쏟으니 안죽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추구한 선이란 게 고작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치마에 불과하다. 그러나 땀흘려 만들어 입은 옷은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불면 말라서 부서져 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만들고 입고 다니던 율법지킴이라는 치마도 예수그리스도가 오자 다 말라 버리고 수치를 그대로 드러내고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였다.


지금 이 시대 대다수의 교회와 교인들은 이 치마 만들기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교회마다 교인들에게 성화라는 치마를 만들어 입히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니 정작 해야할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일(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하기에 바쁘다. 하는 일은 많은데 갈수록 심령은 피폐되어 강퍅하여 생명을 토해내지 못하고 온갖 판단과 정죄만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아는 말씀은 많은데 그 말씀으로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과를 먹지 못한 상태에서 선악을 알게 되면 아담에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부끄러움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선함이 악함으로 보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 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훈장님의 꿀단지처럼 하나님이 혼자 먹어치우려고 아담더러 먹지 말라 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상주고 거역하면 벌주려고 파놓은 함정은 더더욱 아니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 끝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덧붙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데서 오는 벌이 아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선이 도무지 선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움 역시 도무지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세상에 먹어야 할 밥은 안 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하등에 쓸모도 없는 치마 만드는 일에만 온 시간을 쏟고 있으니 그 사람이 안 죽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마치 마르다처럼 분주하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할 자가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그러니 생명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들은 관념 속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마르다가 뱉어낸 앎이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이런 관념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창 3: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본문에서 보듯이 여자는 죽음을 선악과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죽을 수도 있다는 정도의 인식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선악과를 먹으면 필연적으로 죽는가? 여기 필연적이라는 말은 그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독버섯을 가리키면서 너는 절대로 저걸 먹어서는 안 된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했다 하자.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두지 않아서 그 독버섯을 먹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아들의 죽음은 독버섯의 독이 만들어 내는 필연적인 결과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명을 어긴 데 대한 벌인가.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당신의 명을 어겼다고 자기 아들을 죽이겠는가. 이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문제는 다만 자연 세계에는 독버섯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으며,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선악과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독이나 선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독이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니듯이, 선악도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꼭 있어야 할 자리라면 독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선일 수가 있다. 문제는 독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을 먹었을 경우인데, 이때의 죽음은 하나님의 벌이 아니란 그 독 때문이다. 그러나 해독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과를 신약의 신앙으로 적용한다면 먹으면 죽는 선악과는 율법신앙을 말할 수 있고, 먹으면 살 생명과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할 수가 잇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 독인가? 약인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선 율법을 독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치장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자기 꼬라지를 알라고 주셨는데 유대인들을 율법으로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자기 치장하는 치마를 만드는데 사용하다가 망한 것이다. 이처럼 율법이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독일 수도 있고 약일 수도 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은 절대로 율법을 나쁘게 보지를 않는다. 율법을 넘어선 사람에겐 율법은 버릴 것이 아니라 귀한 것으로 여긴다. 그 율법을 통하여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힘을 발하면 발할수록 그리스도를 더욱더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다. 난 율법을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중매쟁이라고 말하고 싶다. 율법이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지를 않기 때문이다. 율법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밀어붙이니 내겐 약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도 선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줄 알게 되었고 또한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율법이 오고 보니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죄 아래 팔린 신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이 죄의 몸에서 건져 주실 분인가를 찾게 되었고 이에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이 자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해 주는 것이므로 귀하고 선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기 생명을 살리는 명약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율법을 바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인가?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땐 율법 때문에 생명이 고사되었는데 이제는 율법 때문에 생명이 그 속에서 만개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동일한 약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과 바울을 비교하여 보라. 유대인들은 율법 때문에 망했고? 바울은 율법 때문에 살았다? 왜? 그런가? 똑 같은 율법인데 유대인들은 왜? 율법 때문에 죽었고, 바울은 왜? 율법 때문에 살았는가? 유대인은 율법으로 수치를 가리려고 치마를 만들다가 망했고, 바울은 율법으로 하나님께 치마를 입혀 달라고 하여 살았다. 율법이 좋으냐! 나쁘냐! 말하지 말라! 율법은 좋은 것이로되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잘못 사용하여서 망하는 것을 뿐이다.


율법을 천국의 서기관들처럼 필요에 따라서 지혜롭게 잘 사용하면 된다.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서 "주여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 사람은 율법을 보약으로 사용한 사람이고,  "주님 내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독약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다. 수치는 내가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려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치마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준비한 치마를 달라고 해야한다. 결국 신앙이란? 무슨 옷을 입느냐! 즉 어떤 치마를 입느냐! 의 싸움으로 귀결된다. 자기가 만든 치마를 입고 살 것인가? 하나님이 만든 치마를 입고 살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요 9:39-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아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당신은 말씀 앞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있는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살펴보라.


거울 앞에 자신이 벌거벗음을 보는 자는 복 받은 자이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는 저주받은 자이니라? 당신은 말씀을 독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보약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성경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는 복을 받은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디 말씀 안에서 강건한 자로 세워져 가시길 바랄 뿐이다.


 


 


<알려드립니다>


 


지금까지 10회에 걸쳐서 연재해 오던 창세기 소고를 끝내면서 사실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글들은 제가 약 12년 전에 이호식 씨가 쓴 "말씀 안으로" 라는 책에 연재된 글을 통해서 받은 은혜를 나눈 것들이다. 그 당시 많은 감명을 받아서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까워서 이것을 교제로 만들어서 목사님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은혜를 나누기도 하였다. 물론 본 교회에서도 설교가 되어진 것들이다.


서재실을 정리를 하다가 과거 은혜를 받은 세미나 교안이 눈에 띄어 사장해 두긴 아까워서 이렇게 온라인으로 알리게 된 것이다. 금번에 여기 올린 글들은 그 때 세미나를 하면서 나눈 글들이며 대부분 그 분의 글을 인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글을 전개해 가는 면은 공감하는 바가 많아서 도입을 하였지만, 나와 다른 면들은 내 뜻으로 하였으며 결과를 끌어내는 것은 제 신학사상에 맞추었다. 이는 그 분의 신학사상과 저의 신학사상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분의 신학을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 것에 머물지 말고 예수처럼 나아가서 자기가 예수가 된다는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엔 그 분의 글을 그대로 올려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자 생각하였으나, 글의 전개 방식이 십자가 마을의 사상과 다르고 무엇보다도 제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봐서 부분 부분 내 사상으로 수정하여 올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퍼온 글로 올리지 않고 제 이름으로 올린 것이다.


퍼온 글이라고 올릴 때는 나는 이 글과 상관이 없습니다. 즉 난 책임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참고해 보세요 라는 뜻이 되지만 전문 그대로 올렸든 일부분 수정을 하여 올렸든 자기 이름으로 올릴 때에는 난 이 글에 동의하고 책임을 진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란에 올려진 글들은 제가 소화하여 뱉어낸 글이라고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이호식씨의 신학 사상에 대한 오류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강의 중에 몇 번 말씀하신 것이 있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사람들의 편견은 누가 이단이라고 하면 그 사람의 글을 아예 읽어보려고 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이근호 목사님이 이단이라고 규정한 사람의 글을 십자가 마을에 올린다면 편견이 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까 생각하여 처음부터 밝히지 않고 마지막에 밝히는 것이다. (저의 지나친 우려인줄 모르겠지만,,,,)


그러나 누구의 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내용이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떤 글이든 먹고 힘을 얻을 생각은 안하고 글(밥)을 앞에 두고 분석하기에 바쁘다. 누가 지은 밥이면 어떠한가? 밥은 먹고 배부라고 잇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배부르게 하지도 못할 관념이나 명분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누구 누구의 이름으로 올리면 되고 누구 누구의 이름으로 올리면 안된다는 사고는 옳지 않다. 누구라는 인간의 이름은 염두에 두지 말고 그 글을 통하여 배부름을 얻으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깨닫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자이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교회 안에서 예언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임하면 잠잠하고 그 예언을 들으라고 하였다. 예언하는 사람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시가 참된 계시인지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분별할 수 잇는 영이 있는 사람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므로 이단이든 아니면 스님의 말이든 경청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 된다. 장성한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한다. 이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그러는데 그 사람 이단이라고 하더라는 식은 안된다. 왜? 그 사람이 이단인지 스스로 검증할 능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누구의 말이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목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어디서 어디까지란 없다. 모든 학문이 인간들 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속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다. 목사의 임무는 인간의 사상 속에 숨겨져 있는 죄를 들추어내는데 있다. (이런 면에선 참으로 이근호 목사를 존경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을 공부하여 함께 나눌 수 잇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 마을의 목사들에겐 행운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누구의 글이든 그것을 소화 할 수가 있느냐이다. 예를 들어 십자가 마을의 많은 목사님들이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수정하여 설교를 한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더 장려하여야 할일이다. 오히려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소화하고 뜻을 같이 할 수 있음에 감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소화하여서 자기 말로 풀어내면 이미 그것을 증거하는 목사님의 설교가 되는 것이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이근호 목사님과 똑같은 설교를 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남의 설교를 한다고 수치로 여겨서도 안된다. 문제는 본인이 소화를 하고 하느냐이다.


좋은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가 되어지는 것이 좋다. 역시 좋은 글이라면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희 교회엔 홈페이지가 없어서 십자가 마을이라는 오픈 된 공간을 사용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곳이 이 글을 올리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의 내용을 보아서 이호식씨의 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리라고 생각을 하였다. 알면서도 올린 것은 이호식씨 사상이 아니라 제 사상으로 수정하여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받아들이는 분들의 생각은 다 다르겠지만 저에겐 누구의 글이냐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남의 글을 도용합니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먼저 깨닫는 사람이 있고 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복음은 지적재산권을 따질 문제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목사들은 글을 내어놓았을 때는 그 글을 통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지 자기 공명심이나 유명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다. 복음을 깨달은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므로 자기 소유화해서는 안된다. 정답은 "예수님께서는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라"고 하신 말씀 이외에 더 할말이 없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놈은 도적놈이다. 목사는 바울의 말처럼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여야 한다.


혹 이 글이 어떤 이에게는 유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먹고 배부름을 얻은 분들에겐 기쁨이 되겠지만 배부름을 얻지 못한 분들에겐 비판의 소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판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진리를 알아 가는 일은 그리스도의 충만데까지 나아가는 일이므로 지금 이해하지 못하여 틀렸다고 생각하던 것이 나중엔 옳다고 생각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의 율법 아래 있을 땐 예수가 죽일 이단이었지만 은혜 아래 들어오고 보니 예수는 죽일 분이 아니고 생명이라는 사실을 안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일을 버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다 안다고 하지 말라. 그 안다고 한 것이 나중엔 올무가 될 수가 잇기 때문이다.


여기 올려진 글들 중에는 이호식씨의 글도 있고 어떤 글은 순수한 저의 글도 있다. 어떤 글은 글의 분량으로 따지면 50% 정도 인용한 것도 있고, 80% 정도 인용한 글도 있고, 어떤 글들은 참조만 하고 내 글로 풀어놓았다. 글을 이용하였지만 결과는 이호식씨와는 전혀 다른 사상으로 풀었다. 이번의 글도 부분 부분 이용한 글이다. 그러나 얼마를 인용하였느냐 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 지엽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재차 언급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누구의 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글이냐 라는 것이다. 본질과 비 본질을 구별하여 자신의 생명의 역량에 따라서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걸러낼 것은 걸러내면 된다.


이렇게 밝혀두는 것은 혹 이 글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자 하는 분들이 있을까봐서이다. 이미 편견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명분과 편견을 넘어 설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하도 비판을 잘하는 고수들이 많은 곳이라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하여도 꼭 마귀는 그 틈새를 노려서 분쟁을 유발시키고자 하니까,,,,,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냥 묻어 둘 수도 있었다. 마치 개고기를 못 먹는 사람이 개고기인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나중에 그거 개고기인데 라고 하면 개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먹은 것을 토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이호식씨의 글이라고 몰랐을 땐 참 재미있다 참 은혜롭다 라고 읽다가 그것은 이근호 목사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글인데 라고 하면 지금까지 재미있던 글이 갑자가 역겨워지고 마치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찜찜해 질 것이다. 이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분명하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을 다 소화하고 분별할 수 잇는 분들에게는 기우이지만,,,,,과유불급이라 때로는 묻어두고 모르고 지나가는 지혜로움도 필요한데, 인간이 어디 그러한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인생들이 아니던가,,,)


기껏 맛나게 먹은 음식을 토하게 하는 글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혹 십자가 마을에 누가 되는 일이라면 본 글들을 삭제하여도 좋다.


아뭏튼 그 동안 장편의 글들을 읽으시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그럼 바울처럼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강건한 자로 세워지기까지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감사합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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