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삶의 모습이다. 성도들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일단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판단을 내렸을 때는, 모든 노력을 체념하고 거기에만 집착하고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뜻”의 의미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마음이나 생각을 높여 부르는 말로, 특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주의 뜻”,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원”이라고도 불렸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음을 받아서 존재하고 움직인다(계 4:11). 사람의 생명과 땅의 경계(행 17:26,28), 국가의 흥망성쇄, 동식물의 생명 등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키가 한자도 자라지 못하고,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크고 넓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한편, 하나님의 뜻은 영원 전부터 정해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는다. 성경에는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셨다”(출 32:14)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뜻을 바꾸셨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편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이러한 표현들이 많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해가 떠서 지는 것이 아니다. 해는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돌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눈동자와 발등상을 말한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람 편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인동성동형적(神人同性同形的) 표현 방법이라고 부른다. 2.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우리는 다음의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1) 계시, 특히 성경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시면, 즉 계시를 해주시면, 그 계시의 범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현상, 역사(歷史),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구조와 같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일반계시만으로는 사람들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구속주이신 하나님, 구원을 받는 방법, 구원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 등을 알게 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특별계시는 성경으로 기록을 해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의 안내를 받는 것이다.(롬 2:18)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어느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등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이 쏠려 있다. 성경에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까지 다 밝혀져 있지는 않다. 이것은 성경에서 알려주신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성경이 말씀하는 선한 방법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는 다음 몇 가지 방법들을 더 고려해 보는 것이 좋다. 2) 기도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주로 기도를 통해 알려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을 가르치셨다(마 7:7).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기도의 응답은 연관된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깨달아지는 형식으로 나타나거나,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거나,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동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모든 응답이 기이한 현상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무당들에게서나 보는 것 같은 건전치 못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한다. 3) 강한 의욕과 기쁨 사람을 인격체로 만드신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서 강한 의욕을 불러일으켜 뜨거운 사명감이나 의무감을 가지게 하신다. 또 그 일을 통해서 큰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강한 감정이 일어난다면, 먼저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나온 느낌이 아닌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감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선한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빌 2:13). 4) 감당할만한 재능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부여되어 있는 재능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축구선수나 가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기나 노래를 못한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아론을 보내 모세를 돕게 하셨고(출 4:14),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통해 악신이 물러가게 하셨고(삼상 16:23), 가말리엘 문하에서 많은 공부를 했던 바울을 사용해 복음의 도리를 기록하게 하셨다(행 22:3).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가진 재능을 감추어두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도록 그 재능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을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 될 수 있다. 3) 길이 열려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때에는 그 길이 계속 열려지게 하시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 길을 강제로라도 막으신다. 주인 아들의 아내를 구하러 갔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길이 순적하게 열리는 것을 체험했다(창 24:27). 사도 바울께서는 전도의 여행을 하면서도 늘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골 4:3).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발락을 찾아가던 발람이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의 길은 칼을 빼든 여호와의 사자와(민 22:23) 풍랑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욘 1:12).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계속적인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5) 다른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참고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물속에 던져 넣으실 때나, 일곱 집사를 세우실 때, 제비(투표)를 통해 자신의 뜻을 알도록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제비는 사람이 뽑아도 그 일을 작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다(잠 16:33). 아무리 장로나 집사나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도 선거 때마다 실패를 한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을 제비뽑기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듣는 것도 매우 주요한 일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3.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체념적인 생각을 가지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실 때,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방법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자연법칙이나 사람의 노력이라는 제이차적인 요인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동안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그 생명은 부지런히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음식을 먹음으로서 유지가 되게 하시고, 건강에 유의하지 못해 얻은 병이나 나쁜 음식으로 죽음을 맞게 하신다. 부자나 학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은 그에 합당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신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노력이 없으면 부자나 학자가 될 수 없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체념하고 하나님만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맡기신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체념적인 태도는 좋은 믿음의 자세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만드는 악이 되기 쉽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은 구하는 과정을 통해 주어진다.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약 4: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고 큰 민족과 부자가 되도록 뜻하셨다. 그러나 그 뜻은 20년 동안에 걸친 야곱의 지혜롭고 근면한 수고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에 보내 자기 민족을 구원하도록 뜻하셨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동생을 팔았던 형들은 죄책감 속에 살다가 마침내 동생 앞에서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제이차적인 요인들을 사용함 없이,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경우도 있다. 엘리야에게는 직접 까마귀를 보내 음식을 먹이셨고(왕상 17:6), 빈들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는 친히 적은 량의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다(마 14:20). 빌립 집사님은 수고하여 걷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하셨다(행 8:39). 그러나 우리들이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러한 경우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실 때 사용하시는 예외인 사례이다.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사용하시는 이적을 우리 편에서 일상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를 바꾸는 큰 잘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익숙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서 성경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간절한 기도, 그리고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는 강한 의욕과 기쁨, 자기가 가진 재능,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다른 사람의 생각 등을 종합해 보는 것도 유익하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노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설교자·강단은 거룩한 권위를 갖고 있나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우리는 예배당에 들어 설 때마다 사뭇 다른 마음의 자세를 가진다.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배당 내부구조의 일부는 보통 설교를 위한 강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강단은 주로 설교자나 예배순서를 맡은 특정한 사람만 사용하는 곳이어서, 일반 평신도로서는 좀처럼 강단에 접근할 기회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단이나 설교자는 특별히 거룩하게 여겨지고, 신성시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청소를 하는 경우에도, 강단에서 반드시 신발을 벗지 않거나 정장을 갖추어 입지 않으면 큰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설교자를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는 일까지 생겨나기도 한다. 설교자나 강단은 과연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거룩한 권위란 어떤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거룩의 의미 국어사전에서는 거룩을 ‘성스럽고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별된 것 또는 구별된 상태’를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과 관련된 구별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세속적인 것들과 구별된 경우이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론적 의미의 거룩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죄와 구별되는 경우이다.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 의미의 거룩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사 57:15), 생각이나 활동에서도 죄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사 5:16). 성경은 사람이나 피조물에 대해서도 거룩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레 11:45). 사람이나 피조물이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과 연관될 때에는, 그 구별된 사람이나 피조물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도, 성물, 성구, 성전, 성직, 성가, 성일 등에 붙은 거룩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윤리적인 의미에서는 죄와 구별된 상태나 생각이나 행동,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상태, 생각,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한다. 2. 설교자와 거룩한 권위 설교자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설교자 개인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마땅히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는, 그 설교자가 비록 어린 아이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여겨야 한다. 만일 설교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초대 교회의 성자 어거스틴은 어린 아이의 말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심하여, 후에는 위대한 성품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인간적인 가족이나 친구 관계를 떠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설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만일 그들이 집안 사촌 동생이나 허물 많은 친구의 말로만 들어 넘겼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시려고 사용하시는 효과적인 전달수단이다.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설교를 ‘말씀의 선포’라고도 한다. 선포란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에는 질문이나 반론이 있을 수 없다.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말을 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전하는 경우에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항상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르게 전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옳게 분별하여(딤후 2:15),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아멘으로 설교를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설교자는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부딪치는 문제들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일반 평신도들보다 더 많은 임상적인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설교를 듣는 각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의 수준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에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는 설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일러주는 진지한 충고와 권면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도 역시 유한하고 허물이 없을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설교자 개인을 천사나 하나님처럼 여겨 떠받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거룩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신격화시키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는 것임과 동시에, 그 설교자의 허물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신앙에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함정을 파는 것이다. 3. 강단과 거룩한 권위 예배당의 강단은 설교를 위해 구별해 놓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의 강단은 강의나 교육을 위한 교단이나 제사를 위한 제단과 확실하게 구별이 된다. 설교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감동을 받도록 권면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는 주로 말로서 행해지지만, 때에 따라서는 동작이나 영상 등으로도 설교가 행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설교를 위한 강단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편하도록 위치나 높이를 조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의도가 지나쳐서 인위적인 권위주의적 인상을 풍기는 구조나 장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형식으로 행해지는 설교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설교는 사실상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의 의미에서 볼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나 구별된 말씀인 성경을 전하는 강단은 분명히 거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매우 강조되었다. 지금의 예배당이나 강단에 비교되는 성전이나 지성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레 16:2). 그러나 지금의 예배당이나 강단이 가지는 거룩한 권위는 구약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배당이나 강단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재료나 공간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위해 구별해 놓은 장소이고,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구별해 놓은 공간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이나 강단에서는 결코 세속적인 것과 똑같은 일들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구별된 일들만이 행해야 한다. 말을 해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말과 구별된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하고, 노래를 해도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 거룩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이 파괴된다면, 그 예배당이나 강단은 더 이상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는 공회당이나 공연무대에 불과한 공간이 되고 만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야외 공간을 예배나 설교를 위한 장소로 사용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느껴 볼 수 있다. 성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일정한 공간은 비록 야외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곳이 본래 어떤 곳이었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시간만큼은 거룩한 장소로 구별이 된다. 그래서 산(요 6:3), 강가(행 16:13), 외딴 섬(계 1:8), 사자굴(단 6:22), 다락방(행 1:13), 감옥(행 16:24,25) 등을 막론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흩어진 이후에는 잠시 전에 가졌던 거룩한 장소로서의 의미는 다 사라지고, 그곳은 이전과 동일한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지나치게 신성시 하는 것은 피조물을 하나님 대신으로 삼는 잘못된 길에 빠지기가 쉽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영구적으로 구별하여 바쳐진 예배당이나 강단은 그곳이 하나님께 영구적으로 구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임시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했던 야외 공간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성별 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던 야외 공간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와 별다르게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헌된 예배당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특정 공간을 신격화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사람이나 피조물의 거룩한 권위는 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설교자나 예배당이나 강단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있을 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설교자나 강단 또한 상당한 수준의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격화에 이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마땅히 그 거룩한 권위에 어울리는 적절한 예를 갖추고, 설교자나 예배당이나 강단을 대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거룩한 권위는 단지 위선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 가운데서 위선이 아닌 거룩한 권위나 그 권위에 대한 존경이 내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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