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
목사님 글을 몇번 읽어보았습니다.
답변에 감사합니다.
목사님 글은 12장을 중심으로 베드로에서 바울로
십자가의 연속성이 흘러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기도하던 자들을 만나는 사건과
그들이 베드로의 돌아온 것을 본반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엔.
이 문제는 기도의 확신 없이 기도한자들로 보는
기존 해석방식은 아닌것같고.
짧은 소견으로는 기도자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나온
베드로를 보면서 기도의 내용이 더욱 확고히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대하게 되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천사,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는
영광을 십자가 길을 걷는 자들을 희생 통해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짧은 제 식견이고
본문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베드로에서 바울로 넘어가는 내용들은
목사님의 사도행전 설교(옛날설교와 2008?설교)에는
나오지 않더라구요,
아래의 내용과 사도행전에 대한 깊은 내용을 볼 수 있는 자료도 부탁을 드려봅니다
(답변)
잘 보셨습니다. 사도의 층과 일반 교인들의 층은 여전히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초대교회는 반복적으로 사도를 통해서 추가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사라지고 난 뒤, 성경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반복적으로 계시를 살포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이해도가 종말시에 모든 구원되어야 될 자들의 보편적인 자질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즉 기계적으로 기도하면서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의 내용은 그들의 기도 의도를 넘어서는 사도의 층(=계시의 층)에 속한 내용에서 유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복적인 계시 적용이 확정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일괄적으로 오고 오는 세대에 제시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자료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네요.
(질의)
대전강의11년도 사도행전을 살펴봤는데도,
어제 제가 주신글과 해석은 유사점은있지만
조금 더 깊은 내용은 아닌것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각장에 해당되는 구체적 해석을 좀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것은 개인적으로 만나게 '구체적'인 범위를 조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 내용이 상대에 따라 무한정으로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질의)
목사님 평안하시죠?
창 3장에 뱀, 남자, 여자가 저주받는 의미를 구속사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액면적으로 뱀 머리가 상하고, 잉태, 노동의 땀, 서로 군림.
이것이 창세 때 주어진 복의 모습에서 어떠한 저주의 의미로 드러내는지와,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풀리는지요?
액면으로는 이해가되는데, 성경 전체를 통해 풀려지는 것이 궁금해서요
목사님의 글(설교)에는 길게 풀린 것이 없는 듯 해서요.
(답변)
저주란, 예수님의 고유적인 권한 행사입니다. 이 저주를 저주답게 하기 위해서 사단과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주를 통해서 역시 예수님의 고유 권한인 복도 행사됩니다. 따라서 저주를 행사하시는 그 행위에 이미 복도 같이 행사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창세기 3장까지에 이미 복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복은 ‘번창’입니다. 따라서 번창은 창세기 3장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문제는 그 ‘번창’을 유발하는 복이 누구의 본질에서 나오는지를 밝히지는 쪽으로 접근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 와중에서 저주도 함께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나 복이 단독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복이 있는 곳에 저주있고, 저주 있는 곳에 복이 있는 겁니다.
복이 번창이라면 저주는 단절이요 소실이이요 끊어짐이요 죽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저주스러운 죽음 속에서 복의 새로운 면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22에서 이 저주성은 ‘썩어짐’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썩어짐’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썩어가면서 점차 왜 죽어 마땅함도 아울러 드러나면서 그 ‘죽어 마땅함’이 하나님에 의해서 설명되면서 창조 세계 안에 놓여 있는 구조도 같이 밝혀집니다.
이 구조는 예수님께서 등장하는 구조로 재편됩니다. 곧 ‘여자의 후손’입니다. 기능도 같이 등장합니다. 곧 ‘뱀과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부라는 관계가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구조로 사용되고 자연세계와의 관계도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구조로 활용됩니다.
뱀과의 싸움에서 사람은 수동적으로 동원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바는, 생존의 힘겨움이며, 이 생존의 힘겨움 속에서 인간은 필히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 악마에게 예속되는 형편에 놓이게 됩니다. 즉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자들은 생존이라는 미끼 때문에 사단에게 굴복하여 종이 됩니다.(히 2:14-15)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형국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무(無)-창조 조치, 곧 창조성이 박탈된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는 새로운 의미의 창조, 곧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복된 창조의 출발이 되는 겁니다. 이 점을 위하여 사단과 남자와 여자는 예수님을 위한 구조에 복무하게 됩니다. 예수님 마저 자기 죽음을 가지고 그 구조에 뛰어들어 죽게 되십니다. 그리고 다시 새 창조자의 핵으로, 능력으로 다시 사시게 됩니다. ‘저주 속에서의 축복’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한 창조 세계였던 겁니다. (골 1:16)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곧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질의)
목사님. 그렇다면, 여자의 해산의 수고와, 남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요?
그리고 남자가 평생토록 수고하며 땀을 흘리는 작업 또한, 궁금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제가 이해는 되지만, 사실 심오한 부분이라, 조금 더 풀려진 내용이 있으면 제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받은 저주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뱀이 흙을 먹는다는 의미도 좀 알고싶구요
(답변)
저주의 구조 안에서 죽음의 힘, 곧 반反-창조의 힘이 작렬합니다. 죽음은 창조가 일어나지 않았던 무(無)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이 무(無)의 세계는 ‘없음’의 세계가 아니라 고통과 아픔의 세계입니다. 비(非)-축복의 세계의 실정이 조금씩 밝혀집니다.
이런 과정은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 영역은 가정이 되도록 상대자로 끌려 들어온 자가 바로 남자와 여자입니다. 서로를 원하는 바가 원활치 못한 가운데 죽음과 고통을 경험함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상대하면서 죽음으로 이끌리게 하는 저주의 맛을 보고, 뱀도 마찬가지로 ‘썩어짐’의 위력을 생존의 방식을 통해 온 몸으로 표출합니다. 흙에서 벗어날 수 없이 흙에 갇혀 있는 형태로 뱀은 존재합니다. 이는 곧 사단이 실은 땅으로 쫓김으로서 (계 12장) 스스로 이 멸망의 세계에 갇혀 버린 결말을 자청합니다. 그곳을 하나님을 저주의 장소로 만드십니다.
(질의)
목사님.
막8:22-26을 보면 벳새다에서 맹인을 두 번의 안수를 거쳐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려나온 이유, 침을 뱉는 이유, 고치신 후에 마을로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말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엔 마을로부터 격리시킨 이유는 그 마을은 앞 본문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떡으로 추종하는 자들의 동네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제 개인 묵상입니다.
목사님의 마가복음 설교문과 음성을 들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안집히 진 것 같아서 한번 여쭤봅니다.
(답변)
예수님의 모든 작업은 ‘구원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소경된 자를 데리고 오는 것은, 그들의 메시야 인식에는 ‘사람이 도저히 못하는 일을 메시야는 해낸다. 그래서 메시야다’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를 메시야가 들어주므로서 자신의 기존의 메시야관도 진짜 메시야께서 갖고 계시는 메시야관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메시야관에서마저 탈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이 소경된 자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 자신을 향한 마을 사람의 온전치 못한 시선 속에 그 소경이 줄곧 지금껏 같이 지내왔음을 말해주십니다. ‘희미한 나무 같은 존재’로서의 마을 사람들. 여기서 인간들은 모두 비(非)-온전함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전하신 예수님의 시선을 소경에게 담아주십니다. 소경에서 눈을 떠도 예전의 시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작업의 취지입니다.
(질의)
목사님. 답변이해가 잘되었습니다. 감사해요,
동시에, 침을 뱉는 의미(에바다 사건에서도..)와 마을로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요?
목사님 질문을 많이 드려 죄송합니다.
사실, 질문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저 또한 많이 절제하고 있습니다. ^^"
(답변)
침 뱉는 것은 죄인의 육신과 예수님의 자신의 육신과의 일체성을 나타내는 행동이요, 너를 위한 고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육신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고쳐주심을 말해주는 겁니다.
마을과 집을 구분 지으신 것은, 옛 영역 속의 새 영역을 분류시키는 의미입니다. 기존 마을의 정신에 대해 새로운 안목의 시작을 준비시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증인의 기능이지요.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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