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광야에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며 가나안에서는 나와 주님의 연합을 경험합니다. 그 연합의 정도는 광야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정도입니다.
광야는 고통과 시련의 장소이며 애굽과 가나안은 기쁨을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기쁨과 가나안의 기쁨은 차원이 다릅니다.
애굽은 나를 기뻐하는 곳이며 가나안은 주님을 기뻐하는 곳입니다.
애굽에서는 옛 본능의 충족을 기뻐하며 가나안에서는 새 본능의 충족을 기뻐합니다.
애굽에서는 나의 성공, 내 이름, 나의 즐거움, 승리를 사랑하지만 가나안에서는 주님의 성공, 주님의 이름, 주님의 즐거움, 승리를 사랑합니다.
애굽의 기쁨은 혼탁한 기쁨이며 그 기쁨을 경험한 만큼 광야에서 고생해야 하지만 가나안의 기쁨은 순수한 기쁨이며 천국에서도 계속 누릴 수 있는 기쁨이며 광야의 죽음을 경험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가나안은 사랑의 단계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사랑의 곳간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면 사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원하면 사랑이 되어지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서 육신의 생명이 소멸되고 영혼이 발전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사랑을 하기 원해도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사랑하기를 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발전되지 않은 사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사랑이라기보다는 소유욕이며, 욕심이며, 자기 본위이며, 자기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기능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고 머리의 기능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듯이 영혼의 기능이 발전되지 못하였으면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직 성숙되고 진보된 영혼만이 속에서 영혼의 기능이 흘러나와 쉽고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랑은 자아적인 사랑입니다.
그들이 가족을 사랑하든, 그의 연인을 사랑하든 그들의 사랑은 순수하지 않으며 육적이고 아담적이며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단계에서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주님을 방해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속에서 주님이 흘러나와 그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정욕을 사랑하고 머리는 지혜를 좋아합니다.
심령만이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발전되었을 때 주님께서 비로소 그에게 깊이 임하시고 좌정하시며 은사 능력도 아닌, 지혜의 계시도 아닌 온전한 사랑 속에서 연합되어 교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지각이 열리지 않아서 수많은 진리와 지식을 배워도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지각은 단순하여 육신의 필요에 대하여 고정되어 있으며 어두운 골짜기를 싫어하고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며 그저 아무 문제없이 편안하고 먹을 것만 있으면 됩니다.
이들에게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저 안아주고 웃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지각이 열리고 그들은 지식과 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 진리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실제가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여기에서도 탈진하고 한계를 느끼게 되며 드디어 어느 순간 영혼의 길, 신적인 세계가 열리게 되며 그 세계는 곧 사랑의 세계인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이며 마귀의 세계는 미움의 세계입니다.
천국의 실상은 사랑이며 지옥의 실상은 미움입니다. 주님과 천국의 실제를 발견해갈수록 그는 사랑하게 되며 사랑의 실상을 알게 될수록 그는 주님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열릴수록 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 갈증의 대상은 돈이 아니고 편안한 삶도 아니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 그분 자신입니다.
주님께 대한 갈증은 점점 더 타오르고 타올라 그는 주님을 얻기 위하여 미친 사람과 같이 됩니다.
그분 자신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사람은 그 아무 것도,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의 욕망을 구하며 그 후에는 진리를 구하게 되며 마지막으로는 주님 자신, 곧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죽습니다.
모세가 오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던 대부분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보혈을 통하여 바로의 압제에서, 마귀의 압제로부터 탈출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은 너무나도 낮은 차원의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불 가운데에서 얻은 구원인 것입니다.(고전 3:15)
기독교는 그렇게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매다는 것에 그렇게 똑같이 매달릴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며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직접 경험하고 맛보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곧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벧후 1:4)
애굽에서 볼 때는 광야인들이 한심합니다. 광야에서 볼 때는 가나안인들이 불쌍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이르러서야 종합적인 안목으로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여행해본 길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며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지나간 삶의 의미와 방향을,
그 길을 이끄신 분의 의도를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좀 더 깊은 구원의 단계로 가야 합니다. 좀 더 깊은 곳에 가야 깊은, 의미 있는 기도를,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샘물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됩니다. 강물은 흐르고 흘러 바닷물이 됩니다. 그 물은 샘일까요, 강물일까요, 바닷물일까요. 그는 샘물이며, 강물이며, 바닷물입니다.
거기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많은 훈련을 거쳐 가나안에 이른 사람에게 주님께서 묻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그는 대답합니다. “오, 주님. 당신이 나의 소원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그는 샘물이지만 동시에 바닷물입니다. 그는 자신이면서 동시에 주님과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에서 자기 욕망이 정화된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구합니다.
자신의 타고난 소원들은 바퀴벌레의 소원만큼이나 부질없는 것 그는 오직 주님, 그분의 신령하고 영원한 양식만을 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이 옵니다.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머리의 기능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영혼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혼의 사랑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친절하게 대했던 사랑의 행위, 사랑의 흔적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발전된 그의 영혼의 상태는 영원히 남아 영원한 곳에서 영원토록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기도를 통해 더욱 깊은 곳으로 발전해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가득한, 하나님의 현존이 가득한 그곳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계속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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