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빌립보서 개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1) 하나되기 위한 근거

 

하나되기 위한 근거는 첫째, 빌2:1에 나온대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은 필수이며 권면이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는 사랑에 바탕을 둔 위로이며, 셋째는 성령에 바탕을 둔 교제 그리고 넷째로는 긍휼과 자비가 하나되기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위의 네 가지를 바탕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빌2:1-4의 모든 동사 형태는 빌2:4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의 4가지 조건의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가 되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교회가 하나될 때 바울의 기쁨이 충만케 된다. 그리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방해거리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툼과 허영이다. 이 뜻을 영어성경에서는 이기적인 야심과 헛된 자연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의 방해거리이다. 하나됨을 도와주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되며 이러할 때 바울의 기쁨은 충만하여진다.

 

 

 

2) 서로 사랑하라

 

?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요 13장). 사도 요한도 임종하기 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렇게 서로 하나되어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제자들 사이에 하나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사랑으로 하나되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바울의 명령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명령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빌2:6-11)

 

 

 

바울은 낮아짐의 모범을 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겸손하신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독론을 담고 있다. 어떤 기독론을 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어떤 형태로 이 기독론에서 나타나는가? 그리스도의 지위는 어떠한가? 이 기독론의 문장 구성은 어떠한가?

 

 

 

1)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 이 기독론에 나타난다. 신성에 대해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즉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리스도는 스스로 겸비하여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겸비와 영광을 동시에 갖추셨다. 그의 겸비함은 '종의 형체'(빌2:7)에서 나타나며, 그의 가장 겸비함은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의 명령은 먼저 하나님이 그를 높인다(빌2:9). 그리고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피로 물들은 무릎을 꿇게 되고(빌2:10), 모든 입들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빌2:11). 이 기독론의 목적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이 기독론적인 시를 썼다기보다는 이미 당시에 전해 내려오는 성례전에서 사용된 찬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울에 의해 손질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2) 바울의 기독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독론을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런 겸비함이 각 교회와 각 교인들에에 필요할 것이다. 이러할 때 그리스도가 미천함으로 얻었던 영광을 우리 교회와 교인도 얻을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기독론은 교회가 점점 양적으로 성장하고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외형과 교인수에 집착하는 오늘날 한국의 우리들을 위함일 것이다.

 

 

 

3. 바울의 기쁨(빌2:12-30)

 

 

 

바울은 또다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권면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어떤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계속해서 기쁨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모데에게 향한 바울의 뜻은 무엇이며,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자인가?

 

 

 

1) 주 안에서의 기쁨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명하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행함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중생 후에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빌2:15). 성화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될 것이다. 즉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중생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 또한 바울은 주 안에서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빌2:17에서는 비록 순교한다 하더라도 기뻐하겠다는 바울의 기쁨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함께한 동역자로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연결해 주며 믿음의 본을 보여 주는 참다운 바울의 동역자요 아들이다(딤전1:2). 에바브로디도 또한 바울과 고난을 함께한 자였다.

 

 

 

2) 복음에 동참

 

한 번 믿으면 구원이 저절로 주어진다는 것은 착각이다. 믿는 자에게는 성결의 삶이 뒤따르고 또 뒤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 또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아 오늘날 우리도 복음에 동참해야 하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의 겸비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고 그의 영광은 우리가 받을 상급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는 하나되어야 하고 삶을 통해 서로에게 모범을 보이고 분사해야 한다. 바울의 이 편지는 교회가 서로 하나되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결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바울의 명령이 담긴 것이다.

 

 

 

 

 

[연구3] 이단들에 대한 경고(3장)

 

눈물로써 세운 빌립보 교회에 복음의 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적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혀 있지는 않으나 바울은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하려는 율법주의자들과, 스스로 교만하여 반역에 이르는 자들이었고 자기 욕심에 배를 채우려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에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반박하며 빌립보 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1. 바울의 믿음(빌3:1-11)

 

 

 

바울은 서신을 끝맺으려 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하려는 자들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바울의 반복적인 가르침은 왜 중요한가? 죄악을 행하는 자들, 손할례당은 누구를 의미하는가?바울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 자랑거리를 바울은 어떻게 여기며 바울의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우선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며 격려하고 있다. 이 격려는 고난받는 교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을 유태교로 개종시키려는 유대인들을 '개,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 이라며 3번씩이나 반복 강조하여 역으로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배설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면 먼저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을 버려야 하며,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고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2) 복음만 전파하라

 

바울이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잇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유대교화에 대한 경고이다. 현대에는 이런 위험이 사실상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종족, 문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유대인 이상으로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근대 유럽의 선교사들은 복음보다는 서구 만화를 제3세계에 전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또 우리도 개발이 덜 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민족들에게는 민족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이런 민족우월주의, 개인 우월주의를 버리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2. 푯대를 향하여(빌3:12-16)

 

 

 

이 부분은 빌립보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유대교화하려는 자들 외에 또 다른 종류의 빌립보 교회 내의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변증을 바울은 어떻게 하였는가?바울은 완전주의자인가? 그리고 바울의 푯대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를 좇아라

 

그닐카(J.Gnika)에 따르면 빌립보 교회 내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며 도덕적으로 방종한 무리들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 자신은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이루지도 않았다고 역으로 반박한다. 빌2:12의 바울의 논증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다메색 도상에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좇아간다. 이는 결코 조급함과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완전을 향해 나가 완전을 이룬 자는 아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빌2:15)을 바울은 조롱의 의미로 불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내의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더 과격하게 책망하지 않는다(빌2:16). 왜냐하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칫 방종으로 빠지기 쉬우므로 또 바울이 가르친 대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의 푯대는 분명하다.그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위해 계속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2) 성결의 삶

 

간혹 교회 내에 스스로 '믿음의 도'에 이른 것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들의 믿음을 경히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 완전에 이른다는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알고 있다. 성결을 주장한 웨슬리도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의미하였지 인간 의지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하지 않았다. 또 그 완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라고 설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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