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경적 상담학(요약)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성경적 상담학

1부 몇 가지 준비사항

1장 상담의 목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인가?>

상담이란 상담자의 신학적인 확신과 피상담자와의 관계 그리고 다른 여러 요인들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상담의 방향을 어느 쪽에 두든지 간에 먼저 상담의 목적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상담자가 궁극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상담의 결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가? 필자가 만난 많은 피상담자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은 그 성격상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것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의 와중에 빠져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마음보다는 인간적인 행복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하고 싶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모든 정력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되어 드리는 일에 쏟아 부을 때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 손에 거하는 것을 배운 사람에게는 결과적으로 행복이 온다. 성경은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진리 안에서 순종하면서 생활하면 행복은 부산물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생활목표나 기독교 상담의 목적이 개인의 행복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면 예배와 봉사생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기독교 상담에서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점이다. 인간의 개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근거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야 하며 예배와 봉사를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보상이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하나님이 부산물로 주시는 행복을 누리도록 해야 된다. 필자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 다음으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봐야 한다. 이것을 카드에 기록해서 매시간 읽어라. 하나님께 봉사하는 창조적인 방법을 찾으라. 크리스챤 상담자들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이기심의 깊이를 감지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상담의 목표는 성숙이다.

<영적, 심리적 성숙>

바울은 골로새서 128절에 기록한 것과 같이 항상 크리스챤의 성숙을 증진시키는 계획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형제들과 대화할 때는 항상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는 존재가 되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숙이란 말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의 즉각적인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안목에 있어서의 간격의 성장이다. 크리스챤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하다고 선언하시는 행위인 칭의로 시작된다. 나는 그에게 나의 죄를 드렸고 그는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나의 죄과를 대신 지불하셨으며 의의 선물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역 때문에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나는 의롭다고 선언되었고 의로와 졌다. 내 모습 그대로 용납된 것이다. 그것 역시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완전하심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실제로 믿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염려하기 때문에 다른 크리스챤들에게 우리의 용납하심을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대단히 많은 크리스챤들의 활동들이 어떤 사람의 시인을 얻음으로 용납되려는 개인적인 욕구를 동기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챤 생활의 기초는 칭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이다. 언젠가 나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신 위치에까지 자라가며, 더욱 용납하실만하게 행동하도록 권고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동기는 사랑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칭의(과거)와 영화(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중간 시기에는 우리 모두가 수많은 순종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우리는 쉽게 의의 길에서 벗어나며 항상 성경적인 행동 유형을 따르지는 않는다. 기독교 상담은 피상담자가 겪는 환경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반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때때로 상담 중에 피상담자가 억압된 환경에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는 그 피상담자에게 결코 신자가 성경적으로 응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신자의 생활을 발전시키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해야 한다. 상담자는 반드시 피상담자가 순종의 길로 옮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목표의 전이라고 부른다. 상담자는 피상담자로 하여금 문제가 되는 환경에 성경적으로 반응하도록 돕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은 단지 목표의 한 부분이다. 크리스챤은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해야한다. 필자는 이 두 번째 것을 보다 넓은 목표로서 목표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목표를 전이시킬 뿐만 아니라 상승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마음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만을 바란다. 그들은 크리스챤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를 깨닫고 있다. 그들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즉시 회개하고 되돌아 와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행동적인 변화(목표의 전이)는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성숙이 발전되려면 유용함, 중요성, 그리고 안전등과 같은 기본적인 필요들을 충족시키려는 피상담자의 가설이 더욱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목표의 전이상승은 세속적인 상담자들이 설정하는 일반 목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유명한 행동심리학자인 울만과 크라스너는 인문주의를 인간의 관심과 가치 그리고 권위 등이 우세한 사고나 행동의 체계 혹은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라자루스는 일반적으로 훌륭하고 유용한 그의 책에서 대부분의 세속주의자들이 즐겨 주장하고 있는 하나의 도덕적 교훈을 자신의 가치체계로서 채택한다. 그들은 또한 일반적인 목표를 향한 전이와 상승에 부합되거나 적어도 충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속심리학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전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피상담자의 목표도 이런 차이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으로 적합한 목표의 전이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와 같이 순종하는 태도로 나아가는 목표의 상승이 결코 고려되지 않았다.

--요약--

성경적 상담의 목표는 보다 풍성한 예배의 경험과 보다 효과적인 봉사의 생활 가운데 들어가도록 도움으로써 크리스챤의 성숙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크리스챤의 성숙은 (1) 일관된 성경적 방식으로 어떤 문제되는 환경에 즉각 대처하는 것: ‘전이(2) 그리스도의 성품(태도, 신앙, 목적)에 굳게 선 내면적인 성품을 발전시키는 것: ‘상승으로 발전된다.

 

2장 기독교와 심리학: 원수인가, 동료인가?

상담을 통하여 크리스챤의 성숙을 가져올 때 이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심리학적 이론과 절차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는가? 사람들이 상담자들에게 가져오는 개인적 문제들 중에서 많은 것들은 아마도 완전히 영적인 문제들과 관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의학적 혹은 심리학적 문제들은 직업적인 정신과 의사들에 의하여 가장 잘 취급되는가? 혹은 어느 정도 무시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데 적절치 못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심리학이 우리의 상담 기술들을 예리하게 하고 상담의 효과를 증가시키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면 우리는 심리학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계시된 진리의 본체가 있다. 각각을 원으로 도식화 해보자. 계시된 진리의 원은 그 중앙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의 대속을 가지고 있다. 세속심리학은 인간이란 지고의 존재이며 모든 역사의 중심사건이라고 열렬히 주장하는 휴머니즘의 정반대 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통함의 문제는 두 원간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두 원을 통합하려는 시도들과 참으로 성경적인 상담전략을 개발하기 위한 뼈대를 제공하려는 시도들은 네 가지 뚜렷한 접근들로 분류할 수 있다.

1. 분리적 접근

이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은 크리스챤의 신앙과 생활을 포함한 영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상담에 대하여 훈련과 경험이 별로 없고 관심이 적은 목회자는 고민하는 사람을 유능한 상담자에게 위탁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심리학적 문제들이 기독교와 무관한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심리학적 증상을 나타내는데 상호작용을 하는가를 상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성경과 심리학 사이에 벽을 만들고 두 분야를 분리적 접근으로 가정하고 각각 다른 문제 영역에서 다루는 것은 성경적 내용에 대한 부적절한 반영으로서 확실하게 배제해야만 한다.

2. 혼합적 접근

통합에 관한 두 번째 접근은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맛있는 혼합물을 만들기 위하여 그릇에 함께 섞는 방법이다. 첫 번째 접근의 약점은 이 방법에 의해서 바로 잡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상담실에서 취급하는 아주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챤 상담자는 그 문제와 관련된 적절한 성경적 개념들과 필요한 성경 구절들을 제공해 주려고 할 것이다. 퀴인틴 하이더는 기독교가 많은 것을 제공해 주며 때때로 통찰력 있는 크리스챤 임상의사가 필요할 때 끌어낼 수 있는 긴요한 자료들 즉 신앙, 사랑, 신뢰, 소망, 목적 등을 제공해 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챤 전문가들이 이 접근 방법을 채택해 왔다는 것이 필자가 받은 인상이다. 예를 들면 죄에 대한 신학적 연구인 인죄론과 정신 이상의 심리학적 연구인 정신 치료는 양쪽이 모두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서로 다른 전망에서 다루고 있다. 혼합적 접근 모델의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적인 전제에 비추어서 모든 세속적 개념을 주의 깊게 심사할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모든 진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진리이다. 심리학은 전반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가설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비록 교묘한 전략들이 관찰할 수 없는 개념들을 측정하기 위해서 고안되어 왔지만, 엄격한 경험적 접근은 보이지 않는 실재에서 많은 상식적인 의미를 빼앗아 왔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들은 무가치하다. 심리학은 사람들의 진정한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서 엄격한 경험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직접 측정될 수 없는 개념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그러나 책임있는 통합의 노력은 성경의 빛으로 세속 심리학을 평가하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혼합적 접근이 기독교 진리와 어떻게 갈들을 일으키는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톰 해리스의 인기 저서인 나도 좋고 너도 좋다에서 교류분석으로 강조된 가설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힘이다

2.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3. 구속은 나의 고통스러운 부정적 자아평가는 사실이 아니며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4. 사람은 자력으로 충분하다.

죄는 교류분석의 한 부분이 아니다. 적절한 신적 자원들의 기본 수단인 신앙은 교류분석이 초자연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변화의 동기를 주고 변화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사역과 새 생명을 제공해 주는 구속의 효력과 우리들의 변화를 인도하는 말씀에 대한 의지 등은 교류분석에서 모두 무시된다. 혼합적 접근 모델은 비판적으로 우선적인 걸러내는 일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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