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신학(Neo-Liberalism Theology)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신자유주의 신학(Neo-Liberalism Theology)

신자유주의 신학(Neo-Liberalism Theology)

F. Schleiermacher에 의하여 시발된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 사상을 이용하여 정통주의 신학에 파멸적인 공격을 가했는데, 때는 19세기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였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개의 전쟁과 대공황으로 인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 세계관이 흔들리자 자유주의 신학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이를 계기로 일어난 신학이 신자유주의 신학이다. 신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자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을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 혹은 구자유주의 신학이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두 개의 전쟁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이요 공황이란 1930년대의 미국의 경제 대 공황을 말한다.

1.신자유주의 신학자들

1)학자들

신자유주의 신학의 내용을 말하기에는 별로 어렵지 않으나 신자유주의 신학에 소속시킬 학자의 선정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선 David L. Smith가 소속시키고 있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미국 쪽의 학자로서는 Harry Emerson Fosdick, Henry P. van Dusen, 유럽 쪽에서는 R. Bultmann, Paul Tillich, Marie Joseph Pierre Teihard deChardin을 들고 있다.

2)신학적 혼란

앞에서 열거한 신학자들의 사상이 신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워낙 거물급의 신학자들인지라 그들을 어떤 신학적 카테고리에 넣어 연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그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신학적 혼란을 겪게 된다. 가령 예를 들면, ‘Bultmann 신학’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단지 ‘불트만의 신학’이라고 하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붙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P. Tillich만해도 ‘Paul Tillich 신학’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신학적 체계를 가진다.게다가 학자들마다 그들을 연구한 후에 그들을 자신이 세운 신학의 어떤 카테고리에 속박시키는 일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Smith는 신자유주의 속에 넣고 있는 P. Tillich도 어떤 학자는 신정통주의 신학에 넣고 있다(Paul Enns).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있어서 학자들이 있는 것이진, 아니면 학자들이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되었는지 원초적인 문제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신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1)Harry Emerson Fosdick

Harry Emerson Fosdick

침례교에서 안수 받은 목사로서 38년간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뉴욕 제일 장로교회의 설교 목사도 했는데 그때 ‘근본주의는 과연 승리할 것인가?’라는 주일 설교로 장로교회를 떠나 다시 침례교회로 돌아왔고, 1946년 은퇴하기까지 뉴리버사이드 교회로 목사로 봉직했다.근본주의자들이 포스딕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신자유주의의 두목 정도로 보지만, 포스딕은 구자유주의 노선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성서론, 신론, 그리스도론 등 건전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Modernism을 기독교에서 냉정하게 떼어버릴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Modernism이란 경험을 중시하고 이성과 논증을 높이 평가하는 사상인 만큼 성경이해와 신앙생활에도 경험, 이성, 논증을 결부시키자는 것이었다.그는 경험에 기초한 하나님을 신앙했다. 그의 충고는 ‘믿을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을 믿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개개인에게는 신적인 번쩍거림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자유주의 사상을 반복한 것이다.그는 현대인에게 과학 이전적 세계관을 지닌 2000년 이전으로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의 현대주의 개입이 성서론에 흠집을 내고 있다. 성서는 인간사의 종교적 사상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발전이라고 보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놀라움을 강조했다. 여기서 계시와 이성의 구분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포스딕이 강조한 윤리적인 국면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믿는 문제라기보다는 행하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사람은 신조나 교권적이고 성례전적인 어떤 것을 수납하기보다는 그리스도로 삶을 살기로 단순히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예수의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도모한다는 것이다’(Being a follower of Jesus in something to be done).

2)R. Bultmann–Uncovering Theology(벗기기 신학)

Rudolf Karl Bultmann

R. Bultmann이야말로 백과사전적 신학자이되 비평적인 색채를 가한 적극적 활동의 신학자이다. 유대교 연구, 구약, 성경 비평학, 신약성경연구, 고전문화, 역사신학, 현대의학 등에 관하여 접촉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그의 저술 모음은 대단히 인상적인 저서와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별히 신약분야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은 위험성을 지니면서도 그의 신학의 뼈대를 말한다면 Vemon C. Grounds의 말을 인용하면 좋을 것 같다.‘R. Bultmann의 신학의 열정은 Kerygma 즉 기독교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의 욕구치는 2천 년 전의 문화권 속에서 발생한 기독교 사건과 그것의 기록을 20세기 현대인에게 어떻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느냐가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P. Tillich도 만찬가지였다. 이것은 해석학의 문제요, 나아가서는 설교학의 문제일 것이다.R. Bultmann이 2천년 전의 성경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에는 고마운 일이나 그 이전에 그는 성경 자체에 대한 권위에 회의를 느낀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이미 그 이전인 18,19세기에 슈바이처에서 시작하여 철학자 Lessing(1729-1781)이 말하는 종교발전설 입장을 취한 것인데, 그것은 계시의 종교보다는 이성 중심의 진화론적 종교발절설을 취한 것이다. 여기에 Hegel 및 Kant가 가세하여 R. Bultmann당시의 세계 분위기가 성경은 비평을 받아야 하고 철학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개입해야 한다는 전제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여기서 R. Bultmann은 양식비평(Form Criticism)을 그의 신학의 중심부에 두었다. 그는 신약성경은 계시에 의해 완성된 권위를 가진 책으로 무비판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양식을 비평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즉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어떤 문학적 양식들에 따른 수집품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본래적 양식을 발견해 내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그래야만 진실한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양식비평을 마음에 품고 있는 Bultmann은 성공적인 양식비평의 작업을 해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Kerygam로 전달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제가 그의 신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곧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이다. 필자는 Bultmann의 비신화화 성경해석과 실존론적 해석을 이렇게 이해한다. ‘양파의 너절한 껍질을 벗겨 내서(비신화화 작업) 그 양파의 알맹이를 요리해서 먹어라(실존론적 해석 혹은 전달).’비신화화란, 성경은 고대시대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당시의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었으므로, 이젠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잇는 현대인들에게는 그 만큼의 신화적 표현들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신화적 표현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알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전달의 소극적 방법이다. 그렇다면 신화를 벗겨버리고 남아 있는 진리 자체를 현대인의 정황에 들어맞게 전달하는 것이 실존론적 해석일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 전달에 있어서 적극적인 방법이다. 양파 자체를 골라서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재료로 사용해서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Bultmann은 너무 벗겨 버리다보니 알맹이를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존적으로 접촉시킬 최소한의 진리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빈주먹을 내밀면서 이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먹으라고 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격이다. 사실 양파에는 알맹이가 없다. 모든 껍질의 집합으로 구성된 것이 양파자체가 아닌가?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알맹이는 없다. 껍질 자체가 알맹이니 말이다. 결국 Bultmann은 ‘벗기기 신학’(Uncovering Theology)이다.

3)P. Tillich—Covering Theology(입히기 신학)

Paul Tillich

Tillich는 Bultmann이 너무 껍질을 벗기다보니 알맹이를 모두 내동댕이친 결과의 허공(虛空)이었다. 이에 Tillich은 모든 것을 다 포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하여 모든 것을 하나의 큰 보자기에 넣어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보자는 신학을 구사했다. 그는 벗기지 말고 도리어 입히고자 했다. 그는 모든 문화로 수용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문화신학(Theologyof Culture)라고도 한다.그는 존재의 신학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들의 가장 밑바닥에 거대한 초석으로 받쳐주고 있는바 존재의 근원이요 존재 자체(Being Itself)란 철학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초점을 이끌려고 했다. 그는 관계의 원리를 신학에 적용하여 양극단을 하나의 막대 위에 공존시키면서 조화를 이루려 했다. 그의 조직신학은 철학적 질문으로 시작해서 신학적(성경적)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문제는 무엇인가? Bultmann이 너무 벗겨서 알맹이를 내어놓지 못한 것에 비하여 P. Tillich는 너무 많이 입혀서 알맹이를 너무 깊은 곳에 숨겨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쓴 약에 가벼운 캡슐을 씌우는 것은 좋으나 아예 납땜질을 해서 약을 그 안에 싸 두었기 때문에 뱃속에 약을 넣어도 약효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캡슐이 두꺼워서 말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현대인에게 성경을 진리로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점에서는 감사하지만 그 결과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돌아 가버린 것에 있다.

3.신자유주의 신학의 주요 교리

1)성서론

C. H. Dodd와 같은 학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이 성경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는 있지만 구자유주의 신학의 전제들인 고등비평과 성경의 영감성 부인 등은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2)인간론

구자유주의 신학의 인간론을 그대로 지닌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 인간적인 유토피아는 세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3)죄론

구자유주의 신학보다 죄에 대하여 더 실질적이긴 하지만 원죄나 전적 타락도 부인한다.

4.평가

신자유주의 신학들은 그 특색이 다양하기 때문에 신학의 어떤 특정한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가열 P. Tillich는 어느 신학에도 넣을 수 없는 경계선 상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고, 샤르뎅 같은 이는 신자유주의 신학에 넣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그를 과정신학에 넣기도 한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유주의 신학 이후의 온갖 신학들은 주류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아류(亞流)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에도 복음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전제로 이류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질서가 잡힌 신학 작업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더 격하시키고 하나님을 더 올려놓은 신학이다. 그렇다고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구자유주의 신학을 개편했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신자유주의 신학의 신장부에는 구자유주의 신학의 본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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