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 신앙인으로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회 그것도 강압적인 교회에 계속 출석한 자의 경우는, 자신의 신관에 대해 갈등을 많이 겪고 어른이 된 뒤 그 신관이 변화되거나 심한 경우 기독교 신앙마저 포기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그런 사람이 상당히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 개인의 문제이지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관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이 만났던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그 책임이 제일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 스스로 성경을 제대로 탐구해 보았어야 할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만큼은 어느 누구도 개입될 수 없는 오직 본인과 하나님의 일대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아무리 교회에서 잘 가르친다고 해도 어렸을 때는 제대로 된 신관을 형성할 수가 없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만은 천재가 없다.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가 무엇인지, 인간관계의 상처와 이 세상의 모순과 왜곡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전인데 그런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질 수 없다. 비유가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10살도 안 된 아이가 남녀의 성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렴풋이는 알아도 정확하게 다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설사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인 양 확신하고 실제 체험해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신관의 문제도 어려서 완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생을 두고 탐구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주일학교에서는 인간의 영적인 성숙도에 맞추어 하나님을 가르친다. 어린이가 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치다 보니 손가락을 옆으로 흔드시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강조된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많을 때라 아무래도 벌주는 하나님이 어린이의 마음에 제일 많이 자리잡게 된다. 이 또한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엄마에게 사람이 어디서 생기느냐고 질문하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든지, 새가 물어다 주었다든지, 아니면 엄마 배꼽에서 나왔다든지 아이들 수준에 맞게 대답해주는 것과 같다. 어느 누가 그런 엄마를 엉터리로 대답했다고 탓하겠는가? 또 어린 딸에게 만약 엄마의 성기부분에서 아기가 나왔다고 사실 그대로를 말해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일 학교에서는 아무리 해도 로마서의 이신칭의(i¤aaoaeu)의 교리를 알아듣도록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신관을 갖게 되는 과정은 각자가 다 다르다. 아무런 외부적 강요 없이도 의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 어떤 구도자적 갈등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 기도나 소원도 하지 않았는데 성령 체험을 하는 자, 성경 공부 중에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 등,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는 각 신자마다 갖는 독특한 경험이다. 시간적으로도 순간적으로 믿는 사람, 점진적인 사람,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한 사람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된 자는 자기가 받은 그 구원이 너무나 확실하고 은혜로워 남은 평생 동안 복잡한 다른 신관에 대해 연구·분석·성찰할 생각도 없이 지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밝힌 대로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작 따져야 할 문제는 어떤 사람의 신관이 어떻게 변했는가가 아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관이 시대에 따라 변했는가, 또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가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초월하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서로 다른 두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의 다른 속성을 표현했을 뿐이다. 성경 전체로 보았을 때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항상 너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더 강조되었으면 되었지 초자연적 하나님이 더 우선이라고 해석될 여지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성경에 강조되어 나타나는 빈도수로 따질 수는 없다. 각각의 상황은 그 상황대로 온전한 하나님을 나타낼 뿐이다.
만약 어떤 아버지에 대한 일대기를 쓴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때는 야단치는 아버지, 또 다른 때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 심지어 아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해주는 아버지, 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가 나중에야 아버지만의 깊은 사랑의 동기를 발견하는 경우 등 온갖 형태의 아버지가 등장할 수 있다. 이를 분리해서 생각해 서로 다른 아버지로 생각할 수 없고 야단과 격려를 한 횟수로도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전 인격체를 두고 판단해야 하며 더 나아가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입각한 아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성경의 하나님이 야단만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면 그 까닭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일보다 야단맞을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것과, 둘째 성경을 읽는 독자 자신도 선행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이해가 더 빠르고 머릿속에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유치한 어린 시절의 수준에서 하나도 자란 것이 없다. 본인의 신관이 아무리 바뀌었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잘못이었다고 항의해도, 본인의 영적 수준은 자신이 변명하거나 남이 탓할 수 없다. 교회는 잘못 가르칠 수 있지만 성경은 잘못 가르치지 않는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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