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선교사들의 사상과 삶 :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과연 무슨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바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무엘 마펫과 마포삼열과 소안론 곽안련은 맥코믹 출신의 선교사들이다. 특히 소안론 선교사는 성경통신 강좌를 최초로 한국에서 시작하여 성서연구를 저변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에도 뛰어나 몇편의 찬송가를 저술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면에서도 보수적인 선교사였다. 관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 대학 논문인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해외 선교연구의 하나의 모델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표준성경을 비롯 성경주석, 평양신학교 교재, 그리고 신학지남에 남긴 주옥같은 여러편의 논문들은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맥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유니온 신학교 출신 중 한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이놀즈와 크레인 선교사이다. 레이놀즈는 남장로교 선교의 개척자였고 남장로교 헌법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해 장로교 정치의 틀을 잡아주었으며, 성서번역과 신학교육을 통해서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의 최초의 조직신학 교수로 수십년을 봉사하면서 한국의 신학적 틀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크레인 선교사는 레이놀즈와 신학적인 보수성에서 맥을 같이한다. 한국최초로 무천년설을 가르쳤던 사람이며 무천년을 가르치며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나 개혁주의에서 다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외친 사람이다.
프린스톤 출신들 중 한국선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로버트, 어드만, 헤밀톤 선교사이다. 라부열로 알려진 로버트 선교사는 1925년 평양신학교 교장에 올랐다. 상당히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드만 선교사와 헤밀톤 선교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지리 모든 면에서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변호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간과해야 할 사실은 처음 50년간은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신학을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진보적인 선교사들도 처음부터 한국선교지에 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12. 네비우스 선교정책 : 1884년부터 1930까지 교인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요인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관안련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들을 여러 가지 열거하고 있다. 한국 전통종교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는 점,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 서양교육, 높은 문자 해독률,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 심성등을 들수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성장의 요인은 역시 1890년에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핵심은 성경공부에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순회전도한다. ② 모든 선교사역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한다. ④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치리한다. ⑤ 경제적으로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한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으로 성경공부 한다. ⑦ 성경적인 권징을 엄격히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 단체들과 연합하고 협력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가능한 민중의 경제문제에 도움을 준다. 이 열가지 선교정책을 요약한다면 성경중심의 선교정책과 정교분리의 철저한 실시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또한 네빈우스 선교정책은 교회의 성장외에도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네비우스 정책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부정적인 면도 만들게 되었다.
13. 1907년 부흥운동과 영계 길선주 : 길선주는 막힘없이 줄줄 암송하는 성경귀절 , 선교사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무엇보다도 주권상실의 울분을 신앙으로 스스럼없이 승화시키는 탁월한 리더쉽, 이 모두는 길선주를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최초의 일곱명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무려 20년간 담임했고,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불꽃을 점화, 확신시킨 대각성 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만번 이상 설교를 했고 3백 80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3000명 이상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무려 60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길선주는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 새벽기도를 인도하다. 1935년 11월 18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4.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 초창기 한국의 지성인 중 춘원 이광수 만큼 관심을 가지고 민족계몽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를 관찰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춘원은 기독교야 말로 “ 금일 조선 사상계에 가장 조직적이요, 위대한 세력을 가진자며 , 실로 암흑하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전하여 준 최초의 은인이며 겸하여 최대의 은인이라고 예찬을 서슴없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5개월후 같은 잡지에서 야소교회의 결점을 강도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조선교회는 계급적이고 교회지상주의적이며, 교역자가 무식하고 미신적이라는 4가지 결점을 지적했다. 이중에서 그가 현금 조선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교회지상주의였다. 춘원의 이러한 비판은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나 존칼빈이 외쳤던 개혁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춘원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은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내향화시켜 자기들만 천국가고 잘 살겠다는 개인주의 신앙을 태동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한 지성인의 기독교 비판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를 비판했던 장본인이 한국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비판이 근거가 전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셋째,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반영하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가지의 의의를 찾을수 있다.
15. 김장호 자유주의 논쟁 : 1910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한일합방이 체결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슬픔속에서도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고 1916과 1918년에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을 창간되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남으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사반세기 만에 비로서 민족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독립의 틀을 형성하는 듯 했다. 한일합방후에 발생한 105인 사건과 얼마후에 발생한 김장호 자유주의 사건으로 한국개신교는 한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현대주의를 외친 김장호목사가 당대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 평양신학교 출신인데다. 그가 소속한 노회가 가장 일찍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가장 역사가 깊은 황해노회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장호는 신원교회를 사임하고 사리원 남쪽에 있는 홍수원 역전의 홍수원 교회를 담임하고부터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유학하지 못한 김장호가 현대주의와 진화론의 사상과 일치된 현대사상을 접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속된 황해지역의 공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김장호는 다년간 공위량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공위량 선교사로부터 진화론, 성경의 고등비평을 비롯한 현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김장호는 단순히 현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그 이상이었다. 그는 전투적으로 그런 현대사상을 한국교회에 가르치고 확신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회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은 김장호는 1818년 12월 6일 황해노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되어 면직당하고 제명되기 전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며 민족주의자적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며 소위 조선 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만주 길림에 교단 신학교, 길림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반서구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적 기독교를 주창했던 조선 기독교가 처음으로 친일적인 색깔로 가득찼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하나의 비극이었다.
16. 자유주의 노선 : 1930년대는 한마디로 새로운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는 종교적 다원화시대였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신학적 방향이 몇가지로 뚜렷이 대표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소위 정통주의가, 김재준 목사를 통하여 소위 진보주의가, 정경옥 교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한국의 자유주의 문제는 미국의 자유주의 논쟁의 축소판이었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 소위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한 시대였다.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23년 구 프린스턴 신학자 그레샴 메이첸이 자유주의를 논박하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메이첸 박사는 로마 카톨릭이 기독교의 변형인지 몰라도 자유주의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어반선언으로 응징했다.
소위 북장로교 선교사중 유니온 출신의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원천이었다. 전통종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최병헌이다. 그는 좀더 넓은 감리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감리교 신학을 좀더 자유주의 방향으로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경옥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한국의 젊은이들이 서구나 일본의 진보적인 신학을 소개하는등 한국인에 의해 좀더 본격적으로 확신되어 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역시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등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의 진보주의 사상은 뿌리를 내리고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남궁혁 박사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몇가지로 압축시킬수 있을 것같다. 첫째 자유주의 사상이 1930년대에 발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선교 초창기부터 한국에는 자유주의의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소위 총회가 자유주의 도전을 교권을 이용해서 압도했으나 자유주의 새력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했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 번째, 박형룡 박사가 한국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했듯이 김재준 교수 역시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정경옥교수는 좀 더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자유주의자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한국 기독교에는 박형룡 박사의 보수주의, 김재준 박사의 진보주의, 정경옥 교수의 자유주의가 하나의 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7. 신학지남 논쟁 : 1930년대 신학논쟁이 한국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 논쟁의 점화시킨 신학지가 신학지남이었다. 신학지남은 1918년에 창간된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서 발행하는 신학잡지로 1916년에 창간된 감리교의 신학세계, 1922년에 출간된 성결교의 활천지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지였다. 신학지남은 교단내 목회자들에게 신학기본지식, 설교, 강해주석,을 제공하여 현장목회를 돕고 이름 그대로 신학적 방향을 지도하자는데 발행목적이 있었다.
처음 10년간 서양 선교사들이 맡아오던 편집을 1928년 정월부터 평양신학교 교수, 한국인 남궁혁 목사가 맡으면서 신학지남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세사람의 글을 신학지남 특별기고자로 끌어들여 개재하였다.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하였고 ,자각, 정돈, 건설이라는 1935년 1월 권두언에서 마침내 문제를 제기하였다. 채필근은 비교종교학에 관한 글을 여러 편 게재되어 신학지남의 폭을 넓혔다. 채필근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강조하고 여전히 비교종교학적 접근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숨겨오던 채필근은 노골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이 너무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정통을 기준으로 진보적인 이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교단의 행위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교계를 향한 비판의 화살을 가했다. 한국정통주의자들은 후대 데이비드 비일이 비교종교학이 독일로부터의 고등비평과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미국의 현대주의를 태동시킨 주된 요인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이미 반세기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송창근은 기독교 윤리문제라는 제목으로 신학지남에 기고하였다. 그가 볼 때 조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윤리문제였다. 그는 한교회의 교인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여 목회자 전체, 더나아가 조선교회 전체를 향한 비판으로 확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송창근의 비판은 단순한 비판의 성격을 넘어 교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국교회의 정통주의를 가리켜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이십세기 바리새교인”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들의 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은 박형룡 박사였다. 신학지남의 신학적 변천을 처음부터 목도한 박형룡은 반현대주의 변증적인 논문들을 발표했던 것이다. 현대주의대 근본주의 논쟁을 피부로 체험한 그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신학논쟁, 현대주의자들의 전투적인 도전 앞에 정통주의 신앙을 변호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표면화된 신학논쟁, 특별히 신학지남을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은 우리에게 적지않은 교훈을 제시해 준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디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1930년대 진보주의 진영이나 정통주의 진영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전투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앙의 순수성을 외치는 이들은 분리주의로 흐르기 쉬웠고, 반면 신앙의 포용을 외치며 신학적 관용을 주창한 이들은 자유주의로 흘러왔던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 ,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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