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울서신
“대머리와 휜 다리에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코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이다”
이 글은 2세기 문헌인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외모에 관한 서술인데, 다혈질적이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생의 낙관적 의지로 충일해 있는, 서신들에 나타나는 바울의 인간적 면모와 일치한다.
바울의 생애를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단연 다메섹에서의 회심사건이었다. 바울은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서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는 자기 종교에 대한 회의로 인해 반성적으로 사유한 끝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세와 율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기독교를 박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예기치 못한 다메섹에서의 체험으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예수를 박해하는 자에서 예수를 선포하는 자로 180도 전환하게 된다. 이전까지 유대교를 향해 쏟아 부었던 단순하고도 열렬한 헌신의 방향이 이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이점에서 근본적으로 바울은 신비스러운 종교적, 영적 체험에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체험의 열광적이고 신비스러운 면을 강조하기보다는 그것을 덤덤하게 말한다. 다메섹에서의 극적인 회심 체험은 바울 자신에 의해 이방 사도로의 소명 체험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이방 사도로서의 소명 체험은 이후 바울의 선교와 신학의 토대가 된다.
바울은 주로 시리아와 소아시아, 유럽의 헬레니즘적 대도시에서 선교활동을 벌인다. 그의 선교활동은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불가피하게 율법문제로 인해 유대교와 대결하게 된다. 바울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유대교내의 소종파로 머물러 있었다. 메시아 신앙은 본래 유대교 안에 있던 것이고 예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칭 혹은 타칭 메시아로 등장했었다. 예수도 그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었고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정도는 당시 유대교에서 용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유대교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율법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바울은 이방 선교 과정에서 할례와 관련하여 율법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아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유대교인이 된다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율법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거기에는 당연히 할례도 포함되었다. 바울은 이를 거부하고 구원에서 율법의 기능을 부정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이 전개된다. 바울은 늘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로 넘어간다. 바울 서신들은 구체적인 목회적 돌봄의 과정에서 나왔으면서도 보편적인 신학적 사유로 넘어가는 단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인의론 외에도 고린도교회 적대자들과의 논쟁은 십자가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은 부족종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당시 종교들 가운데서 인종과 성, 계급, 지식 등 모든 인간적 차별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종교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인의론은 구원사건에서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빈손으로, 맨 몸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 차별을 야기시키는 모든 특권이 하느님 앞에서 무효가 된다. 아마도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대중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이었지만, 이념적으로 그것은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로 이끌었다. 실로 당시 사회에서 그런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었고, 또, 그런 이유로 기독교는 수많은 다른 종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초대 기독교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평등의 메시지와 함께 실제 공동체 생활에서 이것이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을 가능케 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반란범으로 지목됐던 사람의 종교를 바로 그 로마제국의 종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 그 꿈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지만 또한 바울만큼 상반되는 평가를 받은 사람도 없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가 하면 반면에 급진적인 예수의 선포를 보수화한 인물로 지탄받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급진적인 예수의 복음을 예수가 죽은 뒤 생겨났던 교회의 상황 속에서 꽃피우려 했던 사람이고 그러한 한계 안에서 그의 작업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예수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바울에 대한 평가는 바울이 예수와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갈릴리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선교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헬레니즘적 도시교회의 상황 속에서 바울이 얼마나 진지하게 예수의 구원 소식을 관철시켜냈는가를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울의 생애 >
(1) 바울의 출생과 성장
바울은 세례요한,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세계는 급속한 변화와 확장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실재적으로 바울의 출생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누가의 보도를 통해 보면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행21:39; 22:3). 또한 그는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엄하게 교육받았다고 되어있다(행 22:3). 이것이 진정한 것인지는 아직 해결된 바가 없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시키려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의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과 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측과 바울 측의 화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결국 확실하게 바울의 배경을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바울의 친서인 빌립보서 3:5-6에서 바울은 자신의 정체를 세밀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의 지파이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 라고 소개하고 있다.
(2) 바울의 소명 체험-다메섹 사건
바울이 새로운 소명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다메섹 사건이라 부른다. 연대적으로는 약 32년경에 이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상당히 극적으로 서술하는데, 누가는 바울의 소명보다는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주의 현현(顯現)을 경험하고는 보지 못하게 되어 제자 아나니아에 의해 치료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소명을 받게 된다. 이것은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감안하여 읽어야 한다. 누가는 바울의 소명을 예루살렘과 연결시킴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교회와의 견해차를 해소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의 묘사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것과는 상충된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사건을 해석하면서 그 사건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신”*(16절)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메섹 사건을 소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토대로 볼 때 다메섹 사건을 ‘회심’이라기보다는 ‘소명’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바울이 세계선교에 나서게 된 것은 복음에 대한 소명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reveal his Son to(in) me"(RSV); “아들을 알게 되어” 바울은 전향했다.
바울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는 ‘전향’을 하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이 모든 것을 버릴만한 ‘최상의 것’이었다(빌3:8).
(3) 예루살렘 회의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예루살렘회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회의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15:1-29와 갈라디아서 2:1-10에 나오는데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변증목적에 맞게 그 사건을 해석하였으며, 사도행전은 누가신학의 영향으로 바울의 보고와는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주후 48년경으로 보고 있 다. 그 회의가 있게 된 주된 이슈는 할례와 토라(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슈에 대한 입장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바울의 반대파로 대표되는 보수적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이방인도 할례와 토라의 범주 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선을 구태여 그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 파들이었다. 둘째로는 게바(베드로)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지도부인데 실제적으로 야고보(예수의 형제)가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바울의 교회에서 문제들을 일으킨 흔적들이 있다. 그래서 바울보다는 보수파에 상당히 기울었다. 세 번째 그룹은 바울과 바나바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안디옥교회의 대표로서 파견되었지만, 실상 이방인 선교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코 할례와 토라를 이방인에게 지울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전략적으로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할례 받지 않게 함으로써 공인을 얻으려고 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보수파는 패했고 예루살렘측과 바울측이 손을 잡게 되었다.
(4) 바울의 선교여행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는 구체적인 선교 일정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여정을 복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제1차시기는 약 47년경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동역을 하게 된다. 이 1차 전도여행에서는 요한 마가가 선교여행에 동참하여 그의 거취가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를 유발시킨다. (행 13-14장)
여러 이유 때문에도 2차 여행(약 49년)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향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의도적으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일행은 우회하여 드로아에 내려가게 되는데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된다. 마게도니아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 이르러 유럽의 첫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이룩한다. (행 15:36-18:22 참조)
3차 여행(약 52년경)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순방하며 교회를 굳게 하고 에베소에 들러서는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면서 2년 동안을 목회를 한다.(행 18:23-19:20 참조) 이 기간은 연대적으로 52년부터 55년까지로 볼 수 있다. 드로아를 거쳐,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를 경유하여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한다.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샤라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체포된다. 이때가 약 56년 봄쯤으로 추정된다.
< 바울 신학의 배경과 특징 >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바울의 사상을 형성시킨 영향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과제는 바울이 세 세계 -유다, 헬라, 기독교- 에 걸쳐 산 사람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지만,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바울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먼저 언급될 사항은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1) 바리새적-유대적 배경
바울은 비록 헬라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가정에서 엄격한 유대적 관습에 따라 성장하였으며,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행 22:3).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 3:5)이라는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은 그의 가족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편지할 때에 유대의 조상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였고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 등도 서슴지 않는다. 때문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동족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라는 그의 진술을 통해 바울의 불타는 동족애와 자신이 유대사람이라는 자각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바울이 구약을 읽을 때도 “기록되었는데...” 의 관용구를 사용하며, 유대 랍비들의 성서해석법을 따라 비유법을 사용한 것 등은 바울의 해석법이 얼마나 유대 교사(랍비)를 닮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세 율법을 반대하는 논쟁적인 단락들이,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바리새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의 생활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그는 구약 성경 본문들을 적절하게 고치거나 또는 자기가 인용하는 구절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또한 어떤 본문을 알레고리(Allegory; 풍유)화 하기도 하고 혹은 원래의 문맥과 아예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의 유대교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행동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아울러 기독교 복음을 예고하고 혹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준비로서 구약성경을 종종 인용한다.
(2) 이방적-헬라적 배경
바울은 유대사람이면서도 태어난 곳이 헬라문화권이었으며 어린 시절 헬라-로마의 보편적인 환경인 일체의 다양성에 노출되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헬라세계에 대해서도 익숙하였고, 교회를 희랍-로마세계 전역에 확장시키는 일이나 복음을 헬레니즘 문화와 양립할 수 있는 형대로 해석하는 데서 그의 사명을 발견하였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하였으며 그의 문학적 은유법은 지방의 배경보다도 도시생활을 반영한다. 바울의 사상에는 분명히 헬라적인 환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바울이 강한 유대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 시대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알렉산더의 대업이 로마에 의해 계승되었으므로 세계를 향한 유대인의 진출은 훨씬 용이해졌고 대도시에는 유대인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반경이 점차 예루살렘에서 멀어지자 신앙의 중심이 흩어져 있는 회당으로 옮겨졌고 종교의 지도자도 제사장이 아닌 토라의 교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의 사정이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흩어진 회당들이 바울에 의해서 세계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영향은 스토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향 다소는 이 스토아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그 당시 대단한 위력을 떨친 스토아 사상은 도덕에 대한 성실이나 인도주의적인 성향으로 철학전문가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침투하였다. 스토아 교사들의 상당히 대중과 감정이 밀착된, 소위 독설적인 설교 형태는 바울의 고전적 설교인 로마서 2-3장과 7-11장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스토아사상은 내재론(內在論)적인 범신(汎神)사상이었고 자기의 힘만을 신뢰하라는 비극적인 결의를 일러주고 있으나, 바울은 이를 극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빌 4:13) 라고 선언함으로써 신앙 안에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과 신비종교의 관계이다. 바울 당시의 많은 개종자들이 헬라적 신비종교를 경험하여 이를 기독교 내로 들여오기도 했었는데,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하는 자신의(본문에서는 제3자인 것처럼 표현한다) “셋째 하늘”의 신비 체험(고후 12:1-4)은 그에게도 어느 정도 ‘신비한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다”(고전 7:22) 라는 그의 고백은 신비종교의 경험도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음을 함축한다. 그러나 바울의 일관된 윤리와 믿음을 볼 때에 그의 “신비 체험”은 헬라사회의 신비종교와 구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 기독교적 배경
바울의 신학의 기독교적 배경은 무엇보다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체험과 그 체험에서 발전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영향을 받았다. 바울 자신은 이 체험을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나타내신 아들의 계시로 말한다. 그 "계시"가 바울에게 인식시킨 것은, 첫째,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행동의 단일성으로서, 그것이 구약과 신약 모두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둘째,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본 환상은 바울에게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론적인 가치를 가르쳐 주었다. 셋째, 그 계시는 바울에게 구원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바리새적 혹은 헬라적인 에토스(ethos) 훨씬 이상으로, 예수님의 계시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형언할 수 없는 영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또한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주요 관념들은 교회의 초기 전승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초대 교회의 예배의식적 요소들을 자신의 서신에 삽입시켰다. 아울러 그의 신앙고백 형식문도 교회에서 사용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바울이 초대 교회 전승에 의존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측면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부활사건 이전의 예수에 대한 목격자가 아니었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의 구원 효과들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들에 바울의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신학의 발전에 있어서 영향을 준 기독교적인 또 하나의 요소는 사도로서, 그리고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들을 세운 선교사로서의 그의 경험이었다. 바울의 신학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작성해낸 신학이 아니었다. 그의 신학은 숱한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혹은 극복한 후에 다듬어진 현장(現場)의 신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신비적 체험은 물론, 그가 물려받은 기독교적 전승들을 선교와 목회의 현실에서 적용하고 또 반성하여 그의 신학을 산출해 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요소들이 바울의 신학과 메시지를 결정짓게 한 요인들이었다. 그러면 바울의 메시지-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을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서만이 의롭다 함을 얻음’(칭의:稱義)의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로 표현된 주 예수와의 연합이 바울사상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은 종말론(終末論)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주장은 그리스도 안의 구원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국면들을 강조하는 측면들이다. 바울 사상과 메시지의 핵심은 그의 인간적 고백(빌 3:7-12)에서 발견되는바, 그 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8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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