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바울과 바울서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바울 및 바울계 서신들의 명칭과 구분 >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적 전망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로마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이 신생 교회 공동체들은 곧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공동체 내부의 집단 사이의 갈등, 윤리적 해이, 광신주의의 폐단, 이른바 정통과 이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혼란 등등이었다. 때로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가 곤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바울은 교회공동체에게 닥치는 이러한 문제들을 그때마다 해결해 주어야 했다. 문제가 있는 교회를 그가 직접 방문할 여건이 안 되는 경우에는 편지로서 당면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이렇게 바울의 편지는 특수한 상황에 응답하려는 실용적인 글이지,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학적인 논문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바울의 서신들은 ‘상황적합적’ 문헌들이다. 그 문헌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여야 본문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서신들의 서두에 바울을 발신자로 기록해 놓은 13개의 서신들이 전통적으로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지난 2세기동안의 역사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은 서신들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를 철저하게 파헤쳤다. 그 결과 전통적인 바울의 13개 서신중에서 실제로 바울이 쓴 편지도 있고, 바울이 죽고 난 후에 그의 제자 혹은 그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편지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바울이 실제로 썼다고 인정된 편지를 ‘진정 바울서신’(Authentic Pauline Letters)이라 하고,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후대에 쓴 편지를 ‘후대바울서신’(Post Pauline) 혹은 ‘제2바울서신’(Deutero-Pauline)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진정 바울서신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등의 7개의 서신이다. 그 나머지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이 제2바울서신인 것이다. 또한 이 13개의 모든 서신들을 통칭하여 ‘바울전서’(Pauline Corpus) 혹은 ‘바울서신 전서(全書)’라고도 한다.

 

 

< 로마서 >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로마서 1:15-16, 표준새번역)

 

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되어온 로마서*는, 주후 56년 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고린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에 썼다고 한다.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해서 로마교회를 자신의 서방선교의 후원교회로 얻으려고 하는데 있었다(15:24). 그 방법으로 바울은 우선 자신이 이전에 한 번도 만남이 없었던 로마교회와의 신앙적 동질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띠워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서신 안에는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며 또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복음’*이 주된 내용으로 자리해야 했으며, 또한 바울은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야 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로마서 집필은 선교적이면서도, 교육적이며, 변증적인 목적을 모두 포함하는 ‘장대한 논문’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의 대헌장, 로마서는 그 헌장의 조문’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이 이를 대변한다. 사실,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가 ‘상황적합적’인 문헌이다. 그러나 이 로마서만큼은 바울이 자신의 마지막을 어렴풋이 예견하면서 총력을 기울여 작성한 ‘편지 형식의 종교적 논문’으로 보인다(게르트 타이쎈). 로마서가 신약의 21개 서신의 첫째 자리에 위치한 것도 문헌의 분량은 차치하고서라도, 로마서에 내장된 그 신학적 중요성이 교회의 역사에서 충분히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Augustinus)은 로마서의 5장에 근거하여‘원죄 설’을, 칼빈(John. Calvin)은 9장에 근거하여 ‘예정설’을, 카톨릭교회는 2장에 근거하여 ‘자연법이론’을 만들어내었는데, 이는 로마서의 신학적 위치를 충분히 반증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미 로마서 초두(1:1-4)에 바울은 ‘복음은 아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짧은 언명(言明)으로는 ‘복음’의 깊고도 넓은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복음’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로마서’이다.

 

 

< 로마서의 내용구조 >

 

서론: (인사와 감사) 1:1-15

 

제1부: 복음의 원리(正敎, Orthodoxy) 1:16-11:36

      명제 1:16-17 하나님의 의(義): “구원은 믿음으로”

      명제에 대한 상론(1): “믿음없이 구원없다”

            1:18-32 이방인도 안 되고

            2:1-3:20 유대인도 안 되고

            3:21-4:25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

      명제에 대한 상론(2):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실체는 자유”

            5:1-21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

            6:1-23 죄로부터의 자유

            7:1-25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1-39 성령 안에서의 자유

      반론: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는가?

            9:1-11:36 이스라엘은 실패는 했으나 희망은 있다

 

제2부: 복음의 실천(正行, Orthopraxis) 12:1-15:33

      명제: 12:1-2 사람의 의(義):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

      명제에 대한 구체적 예들:

           12:3-13 공동체 내에서의 정행: “서로 섬기라”

           12:14-21 공동체 밖에서의 정행: “원수도 사랑”

           13:8-14 정행의 근거: “사랑”과 “때가 가까이 옴”

           14:1-15:13 정행의 원리: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자”

      당부: 15:14-33 사도직에 관한 변론과 당부

 

후기:(인사와 축도) 16:1-27

 

이와 같이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Orthodoxy)의 핵심을 설명하는 전반부와 기독교인의 삶(Orthopraxis)을 지시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 로마서의 주요 내용과 신학적 평가 >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1:10下-12, 표준새번역)

 

바울에 의하면, 사람의 의(행위)로는 신 앞에 설 수도 없을뿐더러, 아예 하나님(의)를 찾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선언이 무시간적이고 무상황적인 진리라고는 바울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쨌든 이미 교회와 신앙에 들어온 사람들을 상대로 이 말을 하는데,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하여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이 대속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교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상황적합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논리적이고 법전(法典)적인 표현이 아니라, 다분히 감성적이고 시(詩)적인 표현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와 신앙은 논리와 이성(좌뇌)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와 직감(우뇌)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LXX)의 시편(14:1-3,53:1-3)에서 인용한(선택 인용한!) 저 말씀이 모든 구약성서의 인간상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구약의 말씀 중에는 인간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응답하시거나 만나주시겠다”는 수많은 표현들이 있다(대표적인 것으로 시69:32-33, 렘29:12-14). 신약에서는 예수께서도 그의 산상설교에서 “찾아라, 찾을 것이요”(마 7:7) 하시는데 이도 구약성서의 배경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바울 자신의 아덴에서의 설교(이것이 누가문서의 내용이라 진정성에는 문제가 있겠지만)는 위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 들어 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표준새번역)

 

누가가 전하는 바울의 이 연설은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울의 언급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그러나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상황적합적’인 것이다!

 

로마서의 표현은 이미 교인이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들은 이미 구원자(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약점과 이기심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자신들의 ‘불의’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고(받아들이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또한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바, 그 누구도 자신은 ‘완벽하여 절대적인 진리와 신에게 떳떳하다’고 자신(自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무시간적인 무조건적인 진리(眞理)는 아닐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가 있는 것처럼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한 것도 시일뿐이다. 직감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자신의 실존-실상을 성찰(省察)하는 사람들에게는 어필할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한 편,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바울의 설교는(사실, 바울이 양쪽과 문자 그대로 똑같은 발언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나름대로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알지 못하는 신’까지 예배하는 ‘종교심이 많은’ 아테네의 군중들(아마도 지식층일 것이다)에게 하는 설교이다. 이들은 아마도 논리(論理)적으로 또 철학(哲學)적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인 것 같다. 사도행전 본문에는 이들 가운데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대에 인기 있는 철학의 분파들이었음이 이런 가정을 가능케 한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상황적합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진정(authentic) 바울의 설교가 아니라, 누가에 의한 창작이라 할지라도 이런 내용이 성서-성경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되며, 성서(the Bible)가 성경(scripture)으로 믿어지게(받아들이게) 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성서-성경의 내용(말씀)에는 숱한 상반된 경우의 상반된 말씀들이 혼재(混在)한다. 이것은 성경이 모순의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적합한 교훈이 ‘다’ 들어있다는 의미이다. 성서가 성경이 되는 것은 모든 상황에 대한 모든 해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순은 역설로, 역설은 계시로 나타난다.

 

 “참으로 그(성서)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토스토 예프스키)

 

장황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성서-성경의 어느 한 구절을 가지고 불변의 교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성경의 단편적 이야기를 모든 곳에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서-성경은 철저하게 ‘상황적합적’인 문서이다. 성서-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 반대로 ‘저런’ 이야기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전을 지으라’는 이야기가 있으면, 반면에 ‘성전을 헐라’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모든 성서-성경의 말씀은 문맥에서, 문맥을 통하여 읽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적합하게’ 적용해야 하는 일이다. 성서-성경의 한 부분을 불변의 진리인 양 어느 곳에나 적용하려 한다면 이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성서-성경이 말하는 더 큰 진리, 더 깊고 높은 가르침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말씀에 따라’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다!

 

다시 바울의 로마서로 돌아가서 당시 바울이 선택한 ‘정황’을 따라가 보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율법’을 들고 나온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3:20). 이런 언급은 ‘바울이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을 오해했던지’ 아니면 바울이 ‘이미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유대교의 일반적 상황을 언급했던지’ 의 경우가 아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구약성서)으로 상징되는 유대교의 그늘 안에 있었던 유대적 그리스도교가 입교(入敎)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와 ‘율법’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에 대한 반발(No)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새로운 언약에 들어가려면 ‘율법’은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새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수단)이다. ‘예수에의 믿음(신앙)’만이 구원에로 인도하는 수단이 된다. 바울은 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입교(구원)의 조건(수단)으로 제시되지만 않는다면 ‘율법’은 아직도 유효하며 폐할 수 없는 것이다(3:30). 바울은 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적 기독교와 일대 격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예루살렘회의에서 자신이 논리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바울의 적대자들은 항상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바울의 예루살렘 교회회의의 참석은 주후 48년경이고,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주후 56년경이었다. 거의 10년 전에 바울이 승리하였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후 바울은 장황한 논술을 계속한다. 육적인(혈통적) 이스라엘은 실패는 하였으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전에 당신과의 언약의 당사자들이었던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바울에 의하면 우리(이방 그리스도인)는 참감람나무(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당한 돌감람나무가 아닌가? 우리는 여전히 돌감람나무에서 양분을 받고 있지 않은가?(11:17-24)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유대교와 구약성서의 영향 아래 그 양분을 먹으며 존재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예수운동’과 ‘기독교’의 영원한 ‘모판’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올바른 믿음-구원에 들어감-에 관한 논술을 마감하고, 더 중요한 올바른 실천-구원에 머무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1-2, 표준새번역)

 

“예수 믿느냐?” “구원받았느냐?” 그 증거를 보여 봐라. 너의 믿음을, 너의 구원을 보여 봐라. 어떤 종교 어느 신앙이고 간에 출발은 감성적으로 되기가 십상이다. 사도행전 초두에 오순절 성령 사건이 그것을 예증한다. 신앙은, 믿음은 감성에서, 직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에 계속 있을 수 없는 것이 신앙이며 삶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것이 직감이나 감성에서 시작했어도 결국에는 논리와 지성으로 보완(補完)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게 된다. ‘믿음’과 ‘구원’의 추상적인 주제들도 이제 구체적인 ‘결과’와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행함’으로 드러나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믿는 대로 살게 된다. 그 믿음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바울이 추구하는 신앙과 종교는 저 멀리 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의 이 짧은 언명에는 그의 모든 신앙이, 모든 사상이, 모든 삶이 녹아 있다. 그는 아마도 이 글을 불러주는 동안* 얼마간은 ‘흥분’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참된 예배는 무엇인가? 참된 믿음과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몸을 우리 일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어느 한 지점(공간)에서 어느 한 순간(시간)에 어떤 ‘몸짓’을 하는 것이 ‘합당한 예배’가 아니다. ‘참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참된 신앙이란, 합당한 예배란 시공을 초월하여 아니 시공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끊임없는 ‘시도(a trial)’이다. 그러므로 또한 끊임없는 ‘시련(a trial)’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온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아야 하며 분별해야 한다. 사실, ‘찾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별’하기에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과 감성 이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작동(作動)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 삶은, 우리 신앙은 언제나 미완성(未完成)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처절하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바울조차도 여전히 “목표를 향하여” “그것을 붙들려고” 달려간다고 하지 않았던가?(빌립보서 3:12-14) 물론 바울이 붙잡으려 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였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일생의 모든 것이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일생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예수를 위하여, 예수 때문에 배설물로 여겼다. 오직 “예수”를 닮고 그 “예수”를 잡으려고 모진 삶을 기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히 우리에게 명령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빌립보서 3:17上)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8, 표준새번역)

 

  *바울은 안질 때문인지는 몰라도(고후10:10 참조) 서신을 작성할 때 대필자를 구해 놓고 대서하게 하였는데, 로마서에는 이례적으로 그 대서자의 이름도 밝히고 있다. 대서자 더디오가 로마교회에 문안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이에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롬 16:22).

 

 

< 고린도전서 >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선교 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3개월간 머물고 있던 주후 55년경에 고린도교회를 위해서 기록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선교 여행 당시인 주후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를 세우는 데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역할이 컸는데, 이들 부부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천막을 만드는 가죽 세공업자였다(행18:1-3).

 

아가야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던 ‘고린도’는 인구 10만 명 정도에 노예가 3분의 1을 차지하는 상업도시로서 아테네 남서쪽 80km 지점에 위치하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이 고린도는 그리이스의 중심지였다. 고린도는 가까운 곳에 항구가 있어서 선원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었다. 고린도에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거기에는 수천 명의 성창들이 상주했다고 한다. 사랑과 정욕의 신인 아프로디테에게 드리는 예배는 이들 여사제들과의 성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적 문란이 심했던 도시였다. 또 고린도에서 좀 떨어진 델피에는 유명한 신전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장래에 관한 예언을 묻기도 하였다. 고린도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고린도시의 문화 속에서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아니한 고린도교회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 교회를 세웠고 줄곧 이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런데 이제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바울을 근심하게 한다. 바울은 이 교회의 문제들을 인내하면서 매우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다. 고린도교회는 종종 바울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였고, 바울은 이 교회가 날로 확장되며 영향력을 넓히기를 소망하였다. 따라서 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특별히 강했다. 이 서신은 바울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보여주며 특별히 이교와 투쟁하는 기독교를 보여준다. 이방사회 속에 설립된 교회의 외적인 문제들은 물론 교회 내부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서신이다.

 

< 고린도전서의 저술동기 >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1:11과 7:1을 통해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로,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의 보고를 통해서 제기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문제들이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오해(1-4장), 근친상간과 간음죄를 비롯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5장), 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비 그리스도적인 행위(6장) 등이다.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들에게서 온 편지(7:1)에 제기되어 있는 몇 가지 질문에 답변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질문 사항들은 혼인에 관한 문제(7장), 우상의 제물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함으로서 생기는 방종한 행위에 관한 문제(8-10장), 공공기도 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 무질서한 만찬, 성령의 은사의 활용 등의 예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무질서한 행위들에 관한 문제(11-14장), 그리스도의 부활 및 육체의 부활에 대해 그릇된 이해(15장) 등이다.

 

< 고린도전서의 내용구조 >

 

서두 1:1-9

분파문제와 개인숭배에 대하여 1:10-4:21

교회 안의 중대한 비행들 5-6장

혼인 및 금혼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7장

우상제물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하여 8:1-11:1

예배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11:2-34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12-14장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하여 15장

고지사항과 결미 16장

 

< 고린도전서의 주요 신학적 주제와 평가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요, 또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