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바울과 바울서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고린도전서 1:1-2, 표준새번역)

 

당시의 일반적인 서신의 형식에 따라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그의 편지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여기에는 바울 신학의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첫째, 바울의 사도직, 둘째, 고린도 교회의 정체 이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한다.

 

예수를 목격하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직-사도로서의 자격-의 문제는 바울 생전에 늘 그를 괴롭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고린도전서의 중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격하게 변호하기도 하였고(9:1-3), 고린도후서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변론과 반론을 번갈아 해야만 했었다(고후12-13장). 아마도 바울의 비판자들은 사도의 표로서 표적을 행하는 것과 교회를 통하여 부양비를 받는 것 등을 포함시켰던 것 같다. 당시 교회에서는 주님의 동생들과 게바(베드로) 등은 믿는 아내를 대동하여 전도를 다녔던 것 같다(고전9:5).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성서(신약)에서는 바울이 기혼자인지 미혼자인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그의 결혼에 관한 가르침(고전7장)을 볼 때 그가 결혼했었던 사람(홀아비)으로 보여 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에서 부양비를 따로 받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바울은 종종 교회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천막 짓기를 그의 생업으로 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누가의 사도행전에서는 열 두 사도의 자격을 예수운동에 처음부터 참여한 자라고 제한한다(행1:15-26).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을 한 번도 ‘사도’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은 계속 논란거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이 이해하는 사도직은 특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직으로부터 오는 특권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였다(9:12-15). 바울은 사도로서의 특권을 누리기보다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9:19).” 이는 바울이 얼마나 예수의 전승에 충실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 10:44-45).”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태도는 그의 ‘예수 따르기’의 훌륭한 증표로 드러난다. 바울의 사도직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제비로 뽑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예수)으로부터 직접 받은 사도직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기원 1세기 예수의 부활사건이 일어 난지 이제 갓 20년도 안된 시점에서 팔레스틴을 벗어나 당대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던 고린도시에서 존재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우선 본문은 나름대로 교회의 정의를 내린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였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셋째, 교회는 또한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보자.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회는 희랍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표기되는데, 이 에클레시아란 기본적으로 ‘회중(assembly)’을 의미하며, ‘구별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란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구약성서의 전통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말하며, 신약의 입장에서는 ‘회복된 이스라엘(렘33:7-9, 행1:6-8 참조)’을 말한다. 바울의 이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제시되었고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했으며, 분명 예수의 ‘천국운동’에서 ‘겨자씨(마13:31-32)’로 뿌려진 그 운동, 그 실천을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 문구로서 고린도교회에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너희는 그런 존재이고 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너희는 교회가 되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음란한 도시, 패역한 도시로 당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린도’에 있는 그 교회가 무슨 순백의 천사처럼, 흰 백합처럼 고고하게 우아하게 존재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흰 백합’처럼, ‘순백의 천사’처럼 고유의 모습을 가져야 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온갖 불순물들이 엉켜들어 만들어진 그 ‘죽음의 문화’를 호흡하고 있는 ‘고린도’에서 교회는 ‘생명의 문화’를 창출해내야 했고 또 그것을 ‘살아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그런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란 그런 문화였다.

 

바울의 사고는 교회의 두 번째 이미지로 나아간다. 이제 교회는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불린다. 예수 만나기 전에는 아무도 ‘거룩하지’ 못했다. “예수 안에서(in Christ)” 즉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돌봄, 예수의 구원함 속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 성도(聖徒)가 되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고린도교회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 아니 거룩하라고 선택되었다. 예수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돌봄’과 ‘구원함’은 항상 상호작용을 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 예수의 교훈과 돌봄과 구원은 ‘교회의 표지(sign)’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없이는 교회는 없다! 아니 예수 바깥에서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안에서’ 있을 때만 ‘교회’가 되며, ‘성도’ 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교회에 대한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교회는 고린도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각처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인 것이다.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보았다.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깨달았다. 왜? 바울과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와 바울은 함께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문제와 아픔이 이제 세상 각처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공동체들의 것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회가 망가지면, 예수가 망가지고, 예수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망가진다는 사실을 바울은 뼈저리게 실감했다. 바울의 위대함, 바울의 높음, 바울의 깊음, 바울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과 다함없는 책임감, 연대의식- 바울은 ‘진정한’ 사도였다.

 

여기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는 가르침은 명백하다. “고린도교회여, 너희는 홀로가 아니다. 고린도교회여,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다. 너희가 망가지면 우리 모두가 망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망가지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걸고 존재하는 존재들이다. 너희가 진정 예수가 온 우주의 주님이심을 알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함께 있음을 기억한다면, 고린도교회여 일어나자, 함께 일어나자, 함께 가자.”

 

바울은 교회를 ‘천상’의 존재로 보지 않았다. 바울은 분명히 교회를 ‘이 땅 위의’ 존재로 알았다. 넘어지고 다치고, 싸매고 함께 울면서 그리고 함께 등을 도드리며 나아가는, 길을 가는 존재로서의 교회를 바울은 충분히 인식했다. 바울에 의하면, 단 한 가지 조건만 맞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 조건만 맞다면 그런 존재는 모두 교회였다. 정말 “예수 이름을 부르는” 그것만 한다면 ‘교회’로 인정되는 걸까? 그 단순하고 간단한 것을? 그래서 교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냈을까? 바울의 진술에는 저 구약 예언자들의 음성이 합창으로 들려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스바냐의 3중 합창이 들려온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또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며, 그의 높은 이름을 선포하여라.

  주께서 영광스런 일을 하셨으니, 주를 찬송하여라.”

 

                                 (사12:4-5, 표준새번역)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기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29:12-14上, 표준새번역)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습3:9, 표준새번역)

 

구약성서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을(주를) 부른다”라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회당에서 구약성서를 배우면서 그 말씀을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주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신앙의 일이요, 선교의 일이며, 구원의 사건이며, 헌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찾고 또 부르는 모습이 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이라는 표현에 들어있는 내용인 것이다. 이런 내면의 깊은 의미와 배경을 모르면서 그냥 ‘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3 계명을 범하는 참람(僭濫)된 일인 것이다*.

 

  *물론 다급한 상황-비상(非常)의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예수의 이름만”으로도 역사가 일어난다(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 행3:1-10 참조).

 

  반면에 바울과 실라에 의해 구원받은 간수 이야기(행16:16-40)는 “주 예수를 믿어라”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이 ‘밤새도록’ 이어진 결과이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예수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의 하나님의 화신(化身)인 예수의 무한히 용서하고 세워주는 그 능력에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교회는 시공을 초월하여, 시공에 제한 없이 하나인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믿음에서 고린도교회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 외에는 고린도교회를 ‘살릴’, ‘개혁할’ 다른 도리는 없었음을 그는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교회와 교회가 하나가 되어 능력의, 사랑의 주님한테 연결되고 의존해 있는데, 이 사실만을 깨닫는다면- 고린도의 교인들이 스스로 ‘처음 신앙’을 회복한다면, 교회가 스스로의 ‘정체’를 깨닫는다면, 교인들과 교회가 주님이신 예수에 의존해 있음을 깨닫는다면- 고린도교회의 어려움과 문제는 ‘능히’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바울은 믿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첫머리는 바울이 이렇게 「예수 중심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 기원1세기 사람으로서의 바울의 신앙과 신학 >

 

이미 성서-성경의 한 문장, 한 단락을 가지고 영구불변하는 교리를 만들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성서의 문자적 기록은 ‘상황적합적’인 것임도 누누이 언급했다. 이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점은 성서-성경은 기록자의 문화적 제약-제한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바울에게도 해당된다. 바울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서술하였다. 그러나 성서-성경상의 그의 모든 기록들이 그의 시대에서 이천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다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예수의 신앙에 충실하며 진정한 예수의 사도로서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로 손꼽히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의 시대적, 문화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그의 기록물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바울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역사적으로 바울에 대한 평가와 이해는 너무나 다양하여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의견들도 제안되었다. 혹자는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의 창시자’라고까지 하였다. 바울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은 현재의 일만은 아니다. 바울과 거의 동시대의 성서기록자도 바울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벧후3:15-16).

 

바울 이해의 어려움은 우선 그가 임박한 종말론을 추종한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는 어느 정도 그의 이런 경향성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어느 정도 공통되었던 임박한 세상 종말과 주님의 재림 등을 그대로 신봉하였다. 두 번째로 그는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어서 그의 저술 중에는 남녀평등적인 진술들도 있지만, 분명히 여성차별적인 언급들이 들어 있고, 이것은 오늘날 여성운동가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 이해의 어려움은 그의 신비적 경험에서 유래하는 신비한 신앙 형태이다. 바울은 현대인이 이해하기에 난감한 그의 신비적 경험과 경향성을 그의 문헌들에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바울 이해는 물론, 성서-성경 전체의 이해에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윤리 사상 >

 

바울 윤리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사랑의 찬가」가 이를 웅변해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4-7,13下)

 

바울은 전에 고린도에서 처음 복음을 증거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집중했었다고 밝힌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2:1-2) 물론, 여기에서 “십자가”가 뜻하는 것은 예수의 속죄, 그의 “사랑”임은 두 번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을 그의 신앙의 핵으로 삼았던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고린도전서) 말미에 다시 이 “사랑”을 강조한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16:13-14)

 

 

< 고린도후서 >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선교 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 여 머물고 있던 주후 55년 후반에 마게도니아에서 기록되었다고 한다. 고린도후서는 바울 서신들 중에서 가장 자서전적인 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서신은 교리나 실천적인 내용보다는 바울 자신과 관련된 서신으로서 바울 자신의 눈물과 화해, 변호와 반박, 호소와 질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초대교회의 정황을 상세하게 엿볼 수 있었던 반면,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 바울 개인의 정황을 상세하게 엿볼 수 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바울은 디도에 의해 전달되었던 자신의 준엄한 편지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자신에게 대단한 위로와 기쁨이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둘째는 자신의 다음 방문 전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약속된 연보를 잘 준비하도록 권면하고 싶었다. 셋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들을 시험해 봄으로써 곧 있을 바울의 방문을 준비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 사도와 거짓 사도들을 구별하는 기준을 갖출 수 있으며, 바울 자신의 수고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다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고린도교회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바울의 적대적 복음전도자들의 출현 때문이다. 그들은 팔레스틴 출신의 유대 그리스도인들(11:22)이었는데, 그들은 다른 교회의 추천장을 제시하며(3:1), 사도의 직위를 강조해서 주장했으며(11:5,12:1), 바울이 외모가 변변치 못하고 말솜씨도 없다고 비난했던 것이다(10:10-11,11:6). 하물며, 그들은 고린도교인들을 종으로 부리며 온갖 사악한 짓들을 하였다(11:20-21). 그야말로 ‘삯군’의 전형(典型)이었다(2:17). 바울이 견딜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고린도전서 4:5, 표준새번역)

 

 

< 고린도후서의 내용 구조 >

 

편지 서두와 회고 1:1-2:13

사도의 직무 2:14-7:4

회고의 연속 7:5-16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8-9장

적대자들과의 논쟁 10-13장

 

 

<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15, 표준새번역)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5:20上, 표준새번역)

 

< 신앙 안에서의 인간상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6-18, 표준새번역)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

                               (고후 5:17-19,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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