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바울과 바울서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갈라디아서 >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라 불리던 지역의 교회에 보낸 회람(回覽)용 편지인데, 바울의 사도권, 율법과 복음의 문제, 성령 안에서의 삶 등이 주요 내용이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2년여 동안 머물고 있던 주후 54년에서 57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본서의 주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 할 것이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 할 수 있겠다.

 

  ​*갈라디아 지방에 대해서는 흑해 쪽으로 터키 동북방향에 위치한 북갈라디아라는 설과 지중해 쪽으로 터키 중남부에 위치한 남갈라디아라는 설의 두 개의 상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바울의 갈라디아서가 본래부터 갈라디아라는 지역 명칭을 가졌고 바울의 두 번째 선교여행 중에 전도하였던(행16:8) 북갈라디아에 보내졌는지, 바울의 전도활동이 좀 더 일찍이 활발하였으며 행정상 갈라디아주에 편입된 남갈라디아에 보내졌는지 분명치는 않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선언서라 불리는 책이다. 이 서신은 로마서와 함께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에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서신이다. 루터(Martin Luther)는 “나는 이 서신과 결혼했다. 이것은 내 아내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갈라디아서를 좋아했고*, 고데(Godet)는 “이 서신은 인간의 영적 해방에 대한 일찍이 없었던 소중한 문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쓰레기 같은 서신’이라고 혹평했다.

 

< 갈라디아서의 저술동기와 특징 >

 

갈라디아교인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도 체험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본래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확고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었다. 이때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율법주의를 강조하였을 때 갈라디아교인들 가운데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전해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파급된 유대주의 선동가들의 해악을 제거하고, 나아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재강조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이 본래의 신앙을 되찾기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기회에 자신을 비난하며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서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임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계기와 의도에 의해서 본 서신을 저술하게 되었다.

 

본서는 사도의 가장 큰 염려가 갈라디아 사람들이 유일하고 참된 복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계속하여 등장한다. 그 복음의 진수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을 줄 아노라(2:16上)”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복음을 그의 훼방자에 대항하여 변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관한 교리와 더불어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말하는 올바른 기독교 윤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본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바울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갈라디아서가 분량도 작고 먼저 저술되었으므로 학자들은 로마서를 이 갈라디아서의 완결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두 서신들 사이에는 상이점도 있다. 로마서는 조용하고 장엄하게 복음에 대하여 서술하였으나, 갈라디아서는 격렬한 어조로 율법주의자*들을 비난하며, 이 복음에 대하여 설명하며 변론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때 바울이 그만큼 다급했고 심리적으로 압박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하는 율법 혹은 율법주의자들이란, 기독교에 입교하는 조건으로 예수에 대한 신앙과 할례(율법의 행위)를 동시에 요구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 혹은 율법주의에 대한 비판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친 비난과 반박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할례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아예 그것을 잘라버리라고 하였다(5:12).

 

< 갈라디아서의 내용 구조 >

 

서두(발신자, 수신자, 인사) 1:1-5

 

본론 1:6-6:17

       1:6-9 다른 복음으로 돌아선 것에 대한 책망

       1:10-2:14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자기변호

 

  제1부 : 복음의 원리 (Orthodox)

       명제 2:15-21 “구원은 믿음으로!”

       증명 3;1-4:31

 

  제2부 : 복음의 실천 (Orthopraxis)

       명제 5:1, 13 “자유를 통한 봉사”

       해설 5:2-2-12 자유를 지키라

       5:13-26 자유는 성령 안에서의 삶

       6:1-10 공동체 내에서의 삶

       6:11-16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결미(경고와 간단한 기원) 6:17-18

 

< 갈라디아서의 주요 내용 >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1:9, 표준새번역).”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이 표현에서 바울의 인간적인 면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다른 복음”이란 바울이 이해하고 전했던 그 ‘복음’에 반(反)한다. 그 ‘복음’은 아직도 유효한가? 그 ‘복음’은 예수가 선포했던 “천국”인가? 아니면 초대교회의 “예수에 관한 소식”인가? 그것도 아니면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을 준다”라는 표현인가?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1:10, 표준새번역)

 

바울의 이 눈물어린 고백은 오늘 이 땅의 많은 “종”들에게 도전한다. 도대체 너희는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를 기쁘게 하려는 “종”이냐고.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주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이제 개인 교사 밑에 있지 않습니다.”

                          (3:23-25, 표준새번역)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함’(할례)을 주장하는 그의 대적자들을 향하여 율법의 ‘개인 교사’(어린이를 보호하는 노예)적인 역할이 ‘믿음’ 즉 ‘그리스도’가 왔기 때문에 종료되었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 ‘개인 교사’(율법 또는 율법의 행함)은 어린 아이(새언약의 백성들)를 ‘보호자(그리스도)’에게 인계할 때까지만 보호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그 시대에 들어가는데 ‘율법’은 어떠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율법(구약성서 전체)의 역할이 종료되었다는 오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5:14,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6:2, 표준새번역)

 

그의 일관된 신앙윤리의 원칙은 항상 예수 전승에 충실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실천방법의 한 가지는 “남의 짐을 져 주는 것”이다.

 

 

< 빌립보서 >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군사적 전초 기지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으며, 전략상 마케도냐 지방의 제일로 꼽히는 성읍이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빌립에 의해 주전 357년경에 건설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역사적인 도시였다. 이 빌립보에는 헬라인, 로마인, 아시아인 등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으며, 각종 철학, 종교, 미신 등이 성행하였다. 이도시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으나 그들의 생활 및 언어관습은 오히려 헬라적이었다. 빌립보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소수였으나 회당은 있었다고 보인다. 빌립보시의 종교생활의 특징은 ‘광범위한 혼합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빌립보교회는 주후 50년경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졌다. 사도바울은 드로아에 있을 당시 환상 중에 마게도냐를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결과 빌립보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인 빌립보 교회의 기원에 관한 설명은 사도행전 16장에 특별히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빌립보에서 기독교의 능력이 나타난 세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아시아로 부터 온 자주장사이며, 신실한 개종자인 루디아인데, 그녀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된 자들의 대표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은 바울에 의해 그 귀신이 쫓겨나게 된다. 이것은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시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지진에 의해 자신의 곤경을 알게 된 간수인데, 그의 전 가족은 함께 구원을 받았다.

 

​본 서신에 언급된 빌립보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이다. 이 모든 이름은 빌립보 교회가 두드러지게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빌립보의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한 교회안의 분열, 유대주의자들의 분쟁, 바울의 장기화된 투옥에 대한 비판, 외부의 적에 대한 불안, 행위로 완전에 이른다는 사상 등의 발생이다.

 

< 빌립서의 내용구조 >

 

발신자: 바울(그리스도 예수의 종)과 디모데

수신자: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감독들 및 집사들 포함)

 

1:1-2 서두(인사)

1:3-4:20 몸통(본론)

전반부(1:3-3:1上)

1:3-11 감사의 말과 축복

1:12-26 바울의 형편에 대한 소식

1:27-2:18 권면

2:19-3:1上 바울의 계획

후반부(3:1下-4:20)

3:1下-21 적대자에 대한 공격과 바른 삶의 자세

4:1-20 권면과 후원자에 대한 감사

4:21-23 결미(인사)

 

< 빌립보서의 저술 동기 >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 때 빌립보 교회를 세운 뒤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까지 다시 그 교회를 방문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때(50년경) 빌립보 교우들이 두 번씩이나 바울에게 헌금했고(빌:4:16), 더구나 바울이 옥에 있는 동안(1:7,13,17) 그들은 또 다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바울에게 선물을 갖다 주었다(2:25, 4:14,18). 옥에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먼저 빌립보교회에 감사를 표시하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에바브로디도의 근황을 알리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당시 빌립보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아주 격한 음성으로 “개들을 삼가고 악한 일꾼들을 삼가고 육의 할례당을 삼가라(3:2)”고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영향력이 커지면 빌립보교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빌립보서의 주요 내용과 특징 >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4, 표준새번역)

 

바울이 빌립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우들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복음 전파’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빌립보 교인들이 다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를 외쳤는지 언급은 없다. 그러나 바울의 이 서신을 보면,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 신앙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복음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바울을 잊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고 있다. 이 또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성도들과 이런 사역자의 만남을 덤덤하게 그리는 이 서신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1:20, 표준새번역)

 

감옥에서 갇혀 있는 바울은 자신이 ‘복음전도’로 인하여 ‘순교’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각오는 하고 있었으리라 보여 진다. 이런 고백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울의 낮아짐, 바울의 비하(卑下)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낮아져야 나의 주인이 높아진다. 내가 높아지면 나의 주인은 그만큼 낮아진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찬가”(2:6-11)를 그의 마음에 노래하고 있다. “지극히 낮아짐으로 지극히 높아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로 나아간다. 아마 바울이 “전향”을 한 것도 초대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이 “그리스도찬가”에 도전을 받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찬가”는 예수 사건과 기독교의 본질을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찬가>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표준새번역)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1:29,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2:12, 표준새번역)

 

구원은, 천국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도중에 있는 ‘구원’이요, 도중에 있는 ‘천국’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육에 속한 자’요, ‘거듭나지 못한 자’이다. ‘성도’란 본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길가는 나그네”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3:10-11,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산다. 우리는 전에 이 죽은 사람들 중에 속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신앙이 나를 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건지셨다. 내가, 우리가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나는 이미 ‘부활’한 것이다.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 하느냐?”(눅24:5) “예수를 믿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 되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리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겠지만.

 

그러면, 부활에 이르기 위한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을,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은 골똘히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4:8-9, 표준새번역)

 

 

< 데살로니가전서 >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50-52년경)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활동했다(행18:11). 그는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51년경에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며, 신약성서 전체에서도 최초의 문헌으로 인정된다. 이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시기인 주후 51년경은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20년밖에 안 된 시점이므로, 초기 기독교와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서의 이 서신의 가치는 대단히 크다. 또한 이 데살로니가전서가 신학적으로 크게 공헌을 하는 이유는 이 서신에는 종말론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서신의 후편으로 보여 지는 데살로니가후서는 그 내용에 의하여 바울의 친저성(親著性)이 의심되어 바울계 서신(제2바울서신)으로 분류된다.

 

< 데살로니가교회 >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행17:1). 이때 바울은 3주 동안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기록하는데,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무른 기간은 3주간이 훨씬 넘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두 번이나 빌립보교회로부터 보조를 받았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였는데 이것은 상당한 시간의 경과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야손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는데 이곳이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로 발전하였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대부분이 헌신적인 개인의 가정에서 출발하였다.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지만 이러한 외부의 압력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잘 견디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에서 일어난 잘못된 종말관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생활이 문란해진 점이었다. 그들은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일도 하지 않고 세상에서 해야 할 육신의 일을 등한시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염려하여 신앙생활에 많은 혼란을 빚고 있었다.

 

< 저술 동기와 내용 >

 

바울이 본 서신을 쓰도록 자극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결정한 것은 디모데를 통해 전해들은 특별한 소식이었음이 분명하다(3:6). 먼저 바울은 교회의 건전한 상태에 만족과 기쁨을 표시하였다. 그는 또한, 비겁하며 자기유익만을 도모하는 자라는 유대인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답변해야 했다(2:1-12). 이어서 그는 유대인의 반대와 핍박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을 다시 옛날로 되돌리려는 이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도덕이 이교의 것보다 우월함을 강조한다. 그는 재림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지도자들을 존경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은사 체험에 대한 가벼운 암시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 서신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구조 >

 

​교회에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 1-3장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과 모범 (1:1-10)

데살로니가에서 벌인 바울의 사역 (2:1-16)

데살로니가교회를 재방문한 바울 (2:17-3:13)

 

교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권고와 요청 4-5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4:1-12)

마지막 권면과 인사 (5:12-28)

 

< 바울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목회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하는데,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2:11-12, 표준새번역)

 

<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종말론과 그 평가 >

 

  “(4:13)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들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4:14)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4:15)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절대로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4: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4:17)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4:18)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5:1)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5:2)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4:13-5:2, 표준새번역)

 

예수 십자가 처형과 부활 후 20년이 채 안된 시점인 당시에는 죽기 전에(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일반적이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도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성향을 암시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누가의 사도행전(주후 80년경에 기록됨)이 초기 전승을 잘 보관하고 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1:8).” 그런데 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 둘 죽기 시작하였다. 교회 안의 동요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바울은 답변을 하여야 했다. 우선 이러한 ‘종말에 관한 언설(종말론)’은 성도들이 죽음을 슬퍼하지(두려워하지) 아니 하도록 하려는 장치이다(4:13). 그 다음에 성도들의 삶과 죽음에 관련한 원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신조인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은 사실은 ‘삶과 죽음을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의미인데, 바울도 사실, 아직은 이러한 경지에 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바울이 15절에서 언급하는 “주님의 말씀”이란 복음서 전승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인데, 아마 이 때 벌써 초대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다른 전승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복음서들과 다른 서신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초대교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신앙전승으로 보여 진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롬14:8).” 바울은 그의 말년에 들면서 이와 유사한 고백들을 자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세세한 종말론에 얽매이는 종교와 신앙이 아니다! 사실, 그러한 세세한(작은) 것에 연연한다는 것은 어쩌면 육적인-세속적인 관심과 욕심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임박한 종말’은 거의 2,000년이나 연기되었다. 아직도 일부 어리석은 종교인들이 이런 가르침을 강조하며 추종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성서-성경의 종말론은 그것이 어떠한 세세한 내용으로 해석되든지 간에 문자적인 실현은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에게 나름대로 위안을 주려는 장치였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당시의 많은 신자들이 이런 종말론을 ‘문자 그대로’ 믿었을 수도 있고 또 그랬다(데살로니가교회처럼). ‘임박한 종말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항상 경성(警省)하며 살라”는 이것이다.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는 이 ‘임박한 종말’이 좀 더 ‘넓고 깊은 신학’으로 수렴(收斂)되는 몇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마태복음서는 이런 ‘종말론’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마28:20)이라는 예수의 마지막(!) 언명에 녹아 들어간다.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죽는 날까지가 아니라, 천지가 다할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신다”는데, 무슨 다른 시시한 ‘종말론’을 운운(云云)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요한복음은 이에서 좀 더 나아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5:24). 요한은 예수 신앙의 결과 이미 “영생”이 주어졌다(완료형!)고 선언한다.

 

 

< 빌레몬서 >

 

빌레몬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쓴 서신을 받은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성경에 보면 빌레몬의 집에서 교회가 모인 것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를 “우리의 사랑하는 자요, 동역자”라고 불렀다(1:1). 빌레몬서의 기록에 보면 빌레몬은 종(노예)을 소유할 정도로 재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어 성도들을 후대하였으며, 자신의 집에 있었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빌레몬서 로 미루어 보면, 압비아는 그의 아내요, 아킵보는 아들이었던 것 같다(1:2). 이 아킵보는 후에 골로새교회의 중책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골4:17). 골로새서의 이런 내용으로 빌레몬의 교회가 골로새교회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가족의 노예들 중의 하나였는데 에베소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복음전도자 바울을 만난다. 이전에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빌레몬의 심령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이제 또 그를 통해 노예 오네시모의 영혼이 변화 받았다. 그는 바울에게 너무 소중한 존재가 되어 바울이 그에 대하여 “내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 “내 심복”(12절), “사랑받는 형제(16절)” 등으로 표현하였다. 오네시모의 인격은 이제 그의 이름의 뜻 “호의”(또는 “쓸모있는”)와 일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조력자로서 자신의 곁에 두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를 그 주인에게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기로 작정한다. 빌레몬이 그를 이제는 노예로서가 아니고 사랑하는 형제로서 받아들이기를 매우 사려깊고 정중한 어조로 권고하고 있다. 만일 오네시모 때문에 바울이 책임져야 할 것이 있으면, 바울은 기꺼이 그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빌레몬의 마음에 호소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의 요구보다 더 행할 줄을 알았다. 결과는 어떠했을지 상상할 필요가 없겠다. 왜냐하면 그 편지가 이제 성서-성경에 편입되었으니 아주 ‘아름다운’ 결과들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 빌레몬서의 내용구조와 신학적 의미 >

 

1. 서두의 인사말(빌레몬과 교회에게, 1-3절)

2. 감사와 중보기도(4-7절)

3. 본론(8-20절)

4. 결미: 문안인사와 축도(빌레몬과 교회에게, 21-25절)

 

왜 이렇게 짧고 또 사적(私的)인 서신이 성서-성경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물론 요한 3서는 이 서신보다도 분량이 더 작다. 그렇지만 그 서신은 연속적인 요한 서신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 빌레몬서와 직접 비교할 수 없겠다. 구약성서 오바댜서도 한 장의 분량으로 된 성서지만 그래도 분량에 있어서는 이 빌레몬서보다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빌레몬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적(私的) 서신은 아니다. 이 책의 이름이 빌레몬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지만, 분명히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2절). 교회에서 공적(公的)으로 읽혀지기를 원했던 편지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는 이 편지를 공적인 시간에 낭독했을 것이다. 이미 노예제도가 정착되어 있었던 로마의 세계에서 사는 그들로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권고한다. 기독교 공동체(교회) 바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급진적인 예수의 설교와 실천을 너무 완화시켰다고 한다. 왜 ‘노예제도’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그리고 있는 공동체의 이상(vision)이 여기 빌레몬서의 이야기처럼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피조물”을 지향한다면 단순한 제도의 개혁보다도 훨씬 더 ‘실용적인’이며 ‘근원적인’ 해결책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의 변방 팔레스틴의 농촌 마을의 “예수운동”을 이제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로마의 한복판으로 이식(移植)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진정한 예수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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