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머니?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을 남성으로 볼 것이냐 여성으로 볼 것이냐라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남성적인 요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생긴 불균형을 시정하는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성을 찾게 해주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 주든지, 둘 중 하나를 자기에 맞게 해석하든지, 여성적인 신관을 강조하던지 하는 노력, 그 어느 것도 필요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인식하는 노력만 필요하다. 그 동안 무시되어 왔던 하나님의 여성적인 면을 연구해 강조해야 한다면, 자칫 또 다른 불균형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면의 잘못도 함께 강요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하나님 어머니라고 해서 언제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며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한 하나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행운의 여신, 승리의 여신을 들 수 있다. 왜 행운과 승리의 남신은 없고 여신만 있었는가? 행운과 승리를 잡거나 놓치는 것이 도저히 인간의 예측을 불허하고 일정한 원칙이 없더라는 뜻이다. 여자들처럼 변덕이 심한 것이 인생살이의 행운과 승리이므로 그 신의 성도 자연스레 여성으로 둔갑했다. 또 다른 예로 풍요의 신도 전부 여성이었다. 대지를 다스려 풍년과 흉년을 조절하는 것이 아기를 생산하는 여성에 비유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지만, 이 또한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흉년과 풍년이 오더라는 의미다. 행운과 승리와 풍요의 여신이라고 단순하게 그것들만 다스리는 신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당시나 지금이나 행운과 승리와 풍요를 다스리는 신이라면 우리 삶의 전부를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중의 신이고 절대적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다. 고대에 하나님과 방불한 신들이 여성으로 인식된 가장 큰 이유는 신경질적인 변덕스러움이었지 포근한 사랑이 아니었다.

물론 인간이 고된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며, 또 절실한 것은 사랑·자비·부드러움·포근히 감싸지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특성이 아버지보다 어머니 쪽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모습을 본 것뿐이다. 어려서 철모를 때에 나쁜 짓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항상 용서해주시는 모습이고 아버지는 항상 야단만 치는 모습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있는 그대로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도 이 어머니의 모습에 더 가깝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랑과 용서의 실체를 모르는 것이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들어오면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반기며 밤늦게 다니면서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었는가 걱정해주시는 분은 분명히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다. 살짝 숨어 자기 방에 들어가 아무 일이 없는 척하고 자고 일어나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들켜 벌을 받을까 함께 조마조마 걱정해주는 이도 어머니다. 그런데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아버지가 감쪽같이 모르고 무사하게 넘어갔을 때의 우리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처음 한두 번은 신나고 스릴마저 느끼며 밤늦게 다니는 재미를 만끽할 것이다. 그런 일이 서너 번 계속되는데도 마음이 편안하거나 스릴이 넘쳤는가? 아무 말 없이 그저 따뜻하게 맞아주는 엄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는가? '내가 밤늦게 다니는 것을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야단을 치지 않지, 지금쯤은 야단을 맞아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는가? 꼭 자신의 어떤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거나, 책임추궁이 없으면 자신도 통제 못하게 될까 불안해서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나를 전혀 아는 척도 하지 않으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회초리에 대한 갈급함이 생긴다.

사랑의 용서란 무조건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용서가 제대로 된다. 남성적인 하나님이라고 해서 공의가 우선이고 사랑이 뒤라는 인식을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정의가 올바른 정의이고 정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식이 밤늦게 와도 기다리지 않고 누워 자고 있다가 나중에 벌만 주는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실에서 자식 양육의 역할을 분담을 한 것이지 사랑과 정의까지 분담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벌만 주는 아버지로 느끼면 그것은 벌써 바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다. 만약에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이라면 끝까지 벌만 피하려 하지 왜 벌 안 주는가 궁금해 하고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사랑에 바탕을 둔 아버지의 벌은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을 수 있고 나아가 벌이 없으면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에게 정의의 응징의 면이, 어머니에게 사랑의 용서의 면이 더 느껴질지라도 엄마에게도 응징은 있으며 어떤 면에서 더 심할 수도 있다. 요즈음 아이들이 엄마를 더 무서워하는가, 아빠를 더 무서워하는가를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먼 장래를 바라보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사랑일 수 있으며 어머니의 사랑은 다분히 감정적·단기적·부분적일 수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을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자식에게 실천하는 모양이 다른 것이지 그 사랑의 크기나 열성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나마 가장 유사하게 닮은 것이 부모님인데, 이를 비유하여 표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 혹은 '하나님 부모님' 할 수가 없다 보니, 둘 중 하나를 택한 것인데 이를 두고 정의의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하나님 어머니 중에서 기독교가 정의의 하나님을 택했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부모를 한 사람으로 대표하자면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가부장적인 문화와 관습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 본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인식하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은 강조되겠지만 자칫 자식이 어떤 길로 가도 방임하는 오도된 사랑이 강조될 수 있다. 형벌이 없는 사랑, 진정한 용서가 아닌 사랑, 자식의 이빨이 썩는지도 모르고 사탕만 주는 어머니,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체험한 후 붙인 이름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이 절대 아니다. 죄의 형벌로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사랑은 이미 정의로운 사랑이 아니고, 부활 없이 십자가 형벌만으로는 사랑 없는 정의가 된다. 사랑과 공의가 단번에 함께 충족된 것이 십자가 사랑인데,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어느 쪽이 어울리는가 따지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자다. 현실 삶에서 인간의 풍요로운 삶만을 바라는 종교라면 그 신이 어머니 하나님이 되어도 상관없겠지만 기독교에서만은 그럴 수 없다. 기독교는 사랑이 먼저냐 공의가 먼저냐를 따지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동시에 그 둘이 충족되었다는 것만 믿고 기억할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방적인 이미지에 치우칠 수 있으므로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에 더 어울린다고 하는 것은, 일방적이라 좋지 않다고 한 사람이 또 다른 일방으로 몰고 가는 자가당착이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남녀 우월에 관한 문제로 따질 것도 아니다. 남녀란 서로 돕는 배필로 상호 연합해야 하는 관계이다. 여권 운동가들도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역할과 책임이 무시되어 왔으므로 그것을 되찾자는 것이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겠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남자와 여자는 함께 있어야 완전해지지 각기 홀로는 언제까지나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때론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고 싶다는 심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입시공부에 지쳐 학교를 자퇴하고 싶은 그 심정은 분명히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막상 그렇게 하겠다고 덤비면 이해해주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지난 2천 년간 아버지로 불렀으니 앞으로 2천 년간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가정해 보아라. 솔직히 아버지라고 불러온 지난 2천 년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잘 믿을 것 같은가? 하나님이 어머니이니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제 멋대로 살아도 그만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엄마는 밤늦게 다니는 청소년 아들을 절대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그 심층 저변에는 십자가의 예수가 싫은 것이다. 이왕 용서해주면 그냥 용서해 주면 되지 왜 꼭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맘에 안 드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구원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의 심리다. 아니면 고대의 행운의 여신, 풍요의 여신, 가나안 여신 같은 음란한 이방신에 대한 향수가 짙게 깔려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철없는 청소년 아들 같은 인간들이 사랑만 받으면 음란한 망나니말고는 될 것이 없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uy Now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Terms of UsePrivacy Notice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

Home
Gospel
Question
Blog
Hel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