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트라이트] 평

영화 [스포트라이트] 평

영화 [스포트라이트] 평

201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받은 영화

1960년∼1980년 까지 미국 동북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에 있는 가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4세-15세까지 지역 불우 아동들을 상대로 벌린 포르노식 성행위와 강간 사건을, 20년이 지난 2002년, 지역 보스턴글로브 신문사가 자사 내 범죄 취재 전담반인 스포트라이트 팀을 통해 4명이 기자가 활약하면서 파헤쳐 가는 내용이다.

처음에 가담된 신부가 7명인 줄 알았는데 취재 과정에서 13명으로 늘어나고 급기에 90명으로 늘어나면서, 단순히 신부들의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발생된 사건이 아니라 배후에 로 추기경이라는 가톨릭 권력자의 묵인 하에 소극적으로 확대된 사실에 신문사는 주목한다.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신부들의 성추행수법은, 우선 교회 구역 내에 결손가정의 자녀나 가난한 가정에 신부가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종교적인 세뇌로 인하여, 신부와의 만남은 하나님과 실제 대면하는 것과 같았다. 가까이에서 살아있는 신의 사자를 만나는 감격에 아이들은 신부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가 아이들을 성노리개로 삼는 방식은 일반인들이 약점 있는 젊은 여성을 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아이의 환심을 산 뒤, 자기 침대로 하나, 혹은 여럿 아이들을 불어들이고, 모빌을 사용해서 정신을 혼미케 하기도 하며 ‘스트립 포커게임’을 제안하면서 점차 은밀한 분위기로 몰아가다가 급기에 자신의 나신을 아이의 얼굴에 맡긴다.

아이는 평생 충격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보스턴 지역 내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다들 짐작한 사건이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사건의 양상은 꾸준히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 당시 피해자 쪽에서 사건을 맡은 담당 변호사를 찾아가고 다른 팀원은 피해자를 찾아간다. 이미 피해자 단체가 결성되는 승산 없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었다. 신문사측의 갑작스런 관심에 호응하지만 담당 변호사는 도리어 경계한다.

왜냐하면 이미 피해자 가족들이 교회 측으로부터 몇 푼을 돈을 받고 쉬쉬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대해서 피해자 측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에서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일 뿐이다. 성추행은 기껏해야 공소시효가 3년 밖에 되지 않기에 교회 내에서 가해 신부를 3년간 비밀히 보호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변호사는 합의금의 3분지1을 가져가기도 했다.

팀장격인 기자는 취재하면서 못내 걱정이 된다. 그도 그 지역의 유명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추기경 대변인이나 변호사하고도 동기 동창 관계로 친분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내에 교회의 범죄에 남보다 더 극하게 격분하는 팀원으로 인하여 그도 마음을 바꾼다.

이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함구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지나간 이슈에 대한 지역 및 전 미국의 관심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단서가 필요했다. 그 단서를 끄집어내는 전략은 교회가 재판이 끝나고 난 뒤, 교회에 불리한 문서를 법원에 보관하지 않고 교회로 가져가버린 그 비공개 문서를 ‘공개적 문서’로 바꾸는 것이다.

이 비공개 문서의 내용에는 교회 측 변호사와 피해자적 변호사가 어떤 식으로 불공정한 협상을 했는지가 들어있다. 바로 이 내용은 신문에 실어 전미국적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팀 기자들이 피해자 단체와 피해자 담당 변호사를 설득해서 기해 신부들의 명단을 확보하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였다. 그 와중에서 가해 신부들은 교회 내부로부터 인사 조치를 받게 되었는데 그 수법이, 미발령, 병가, 지병에 의한 전출이요 치료차 휴가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심리치료센터의 담당자를 기자가 만나면서 아이를 신부들의 성노리개로 삼는 사례가 보스턴 가톨릭 구역 내 뿐만 아니라 미국 전 지역에 만연함을 알게 됩니다. 무려 신부 중 6%가 아동들을 자신의 성노리개 대상으로 삼고 목회했으며, 순결서약을 해야만 될 수 있는 것이 신부이건만 미국 내 모든 신부들의 50%가 성당 활동을 통해 성인 여성과의 성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기자는 도서관을 찾아가서 가톨릭교회의 신부 인사이동에 관한 훑어보면서, 미발령, 전출, 병가와 관련된 신부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어떤 기자는 직접 이미 은퇴해버린 가해자 신부를 찾아가기도 한다.

어떤 신부는 정신이 쇠약한 상태에서 기자에게 자신의 한 행위를 순진하게도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나는 그래도 강간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온전한 정신을 가진 누나가 나서서 기자를 내쫓는다.

사실 그 전에 신부들의 이런 아동성범죄의 사실을 변호사가 신문사에 제보한 적이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그것은 신문사 자신도 가톨릭 신자가 주류가 되어 있는 지역에서 가톨릭교회를 깐다는 것은 곧 가톨릭 신자의 정신적 지주를 흔들어대는 일이 되고 공분을 싸게 된다. 이는 구독자의 감소로 이어지고 신문사가 폐간되는 상황은 눈에 뻔히 보이는 절차다.

하지만 기자들의 정의로운 열성은 신문사 내의 분위기를 이기도 결국에는 교회 측 담당 변호사의 협조까지 이끌어낸다. 총 90명의 신부가 관련되었으며 30년 동안 10억불이란 교회 자금이 합의금 조로 지출되었음을 밝힌다.

팀원들은 추기경이 철저하게 이 사건을 숨겨주고 있음을 터트리지만 2001년 난데없이 9월 11일, 뉴욕무역센터가 이슬람 무장 세력에 테러당하면서 국내 관심사가 그쪽에 쏠리면서 폭로가 지연되고, 또는 크리스마스 절기도 지나고 그 다음 해에 신문에 기사로 나오게 된다.

2002년, 신문의 기사가 나가고 난 그 다음 일요일 아침, 스포트라이트 팀 사무실은 뒤늦은 제보전화로 전화통이 불이 난다. 쉬쉬했던 국민들이 자신들의 속에 담은 분노를 폭발하는 것이다.

결국 로 추기경은 사임하지만 이탈리아 고의적으로 재 발령되어 갈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아동성추행이 일어났던 교구들의 리스트가 화면 전면에 계속 올라온다. 정말 많다.

감독은 토마스 맥카시

(평) 영화 내에서 어떤 피해자는 고함친다. “그들은 신부가 아니라 그저 일개 성범죄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와 신문사와 지역사회가 그들을 지켜주는 겁니까?”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회의 권위’를 현 세계가 여전히 보장해주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 때문이다.

영화에 이런 대사에 이런 내용도 나온다. 어떤 피해아동의 부모는 가톨릭 교회당국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비록 저의 아이가 신부로부터 피해를 당하여도 저희 부모는 여전히 교회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 권위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사탄속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아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 상정된 관념을 실제적으로 가시적인 형태로 구체화될 때, 인간은 자기 정서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그 단체를 붙들고 거기에다 아낌없이 돈을 투자한다.

교회를 사랑해서도 아니다. 자기를 위한 신(=우상)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자기에 대한 자기 사랑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 고객의 심리상태이니 신부나 목사는 이런 고객들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즉 본인의 신의 대리자로 행세해서 그들의

욕망이 오는 길목에 마중하려 나간다. “내가 전한 설교는 신의 소리입니다. 내가 전한 것 이외에 눈 돌리고 귀 돌이면 당신들은 지옥 갑니다.”

이 말은 풀이하면 이러하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죽어 지옥에서 고생하는 것이 미리 걱정되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그런 소원을 저희 교회가 충족시켜 드릴 텐데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을 이 교회에 맡기세요. 저는 이 교회를 책임자로서 하나님부터 파견한 주의 사자(使者)입니다. 당신들이 일상이 불행해지는 것은 저를 통해서 전달되는 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요, 여러분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 저와 이 교회가 대신 기도했기 때문인 고로, 교회가 살아야 여러분이 행복해집니다. 교회를 소홀히 하면, 여러분은 이생과 내세에 저주받습니다.”

어차피 교회 입장에서 복불복이다. 또 아니면 모다. 따라서 믿든 아니 믿든 교회는 절대 권위를 외칠 수밖에 없고, 100명이 무시해도 몇 명만 호응하면 교회는 그들로 인해 유지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절대 진리체는 교인들의 마음을 안정되게 만드는 효과를 낳게 하니 그들도 이익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절대적인 자기 사랑에 미쳐서 하루 종일이 자신의 얼굴을 자기에 파묻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도, 교회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이용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눈물 나는 분투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신문사의 ‘가톨릭 비리 파헤치기’에 대해서 가톨릭 책임자로서 로 추기경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영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썩은 사과 몇 알 때문에 상자 채 사과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즉 교회라는 절대권위체가 사회에서 없어지면 사회는 혼돈과 혼란에 빠지고, 사회가 부담할 비용은 성당을 지켜내는 비용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 것이다.

즉 “교회가 하는 일이 얼마나 선하고 착한지, 바로 이 아낌없이 거의 무상으로 제공되는 희생과 봉사적인 일로 말미암아 이 인간 사회가 이만큼이라는 돌아가는 줄 알아라. 이것들아!”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희생과 봉사로 인해 오는 스트레스를 일부 신부들은 인간인지가 감당할 수 없어, 포르노로 달래다가 그것을 실제로 실습하는 쾌감 속으로 잠시 발을 들여놓았으니 우리 교회 입장에서는 그런 인재들은 불쌍히 여겨 재 치료시켜서 다시 인류를 위해 희생하면서 봉사로 평생을 바치는 것이 교회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지켜주어야 될 귀중한 유산이다’고 외칠 것이다.

(복음적 평)

사회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비복음적 발상에게 비롯된다. 세상은 미리 보는 지옥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자기 주체 파악을 하면서 자기 부인(否認)으로 일관해야 한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3-24)

만약에 자기 부인이 되지 아니하면 십자가 죽으심은 외면 눈에 보이는 교회 단체에 목숨을 걸게 된다. 그런 식으로도 자기 긍정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복해서 모독하게 된다. 정의가 성립되지 않는 세상에서 정의를 외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정의를 안다면 이렇게 외쳐야 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교회 생각하지 말고 말씀 생각하고 그 말씀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다음과 같이 해석에 휘말려야 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눅 24:45-46)

이게 바로 항상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소멸을 반복하는 참된 교회의 모양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The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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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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