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 (창 32:22-32)
2002년 월드컵 때에 온 나라가 "꿈은 이루어진다" 라며 좋아라 하였다.
세상은 꿈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한다.
국가이든, 사람이든, 교회이든 꿈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에너지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넌! 장차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야! 라며 어려서부터 위인전기를 읽게 하여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온 인류를 위한 큰 인물이 되라고 꿈을 심어준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소망하는 "나"가 있다.
난 장차 이런 사람이 될꺼야! 라고 한다.
"현재의 나" 속에 "장래의 나"를 키워나간다.
저마다 "현재의 나" 속에는 "장차의 나"를 위해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
이름하여 소망이고 꿈이다.
이런 모습은 성도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나" 보다 "내일의 나"는 "더 나아진 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덜 성화 되었지만 내일은 더 성화되어 거룩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앙생활을 잘못하지만 장차는 스데반과 같은 멋진 신앙인이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교회 역시 그러하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면 목회성공에 대한 꿈을 꾼다.
앞으로 멋진 교회를 할 것이라고 열심이 전도하고 심방하고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100명, 200명, 500명, 1000명,,,,,70만명,,,,100만명,,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죄인의 속성은 신이 되고자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고 싶어한다.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세계를 확장시키고자 활동한다.
죄인이 신을 찾는 이유도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확장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레위기 12장을 보면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면 부정한 일을 하였다고 속죄제를 드리고, 태어난 아이를 위해서는 번제를 드리라고 한다.
이는 아이를 출산한 여인에겐 죄인을 하나를 더 세상에 나게 한 죄를 물으신 것이고, 태어난 아이에게는 너 때문에 의로운 제물이 희생당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세상은 죄인이 관영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관영하는 세상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소망과 생각을 비껴 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위하고, 인간은 인간만을 위한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엔 접점이 없다.
죄인은 죄인의 확장을 바라고, 하나님은 죄인의 확장을 막으신다.
하나님과 죄인은 서로가 독자적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자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난다.
이런 하나님의 고집과 인간의 고집이 충돌한 곳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타살한 현장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꿈을 말살한 죄로 죽임을 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발생시킨 십자가 사건을 인간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을 단행하신다.
인간들이 죽인 십자가를 가지고 인간들을 구원해 내신다.
하나님께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도 함께 죽이셨다.
이러한 사실을 성도들에게 세례를 받게 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음을 공포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서 죄인을 의인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하신다.
이런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이 구약마당에선 이름이 바꿔치기 당하는 사건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을 찾아가 일방적으로 "넌 내 것"이라고 선택하신다.
그리곤 이제부터 넌 "인간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폐기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꿔버리신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명 당한 것은 땅 사람 "아브람"을 죽이시고, 하늘에 사람 "아브라함"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땅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하늘에 사람"이다.
그래서 땅 사람 아브람은 죽었다는 뜻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다.
할례를 행하심으로 "땅 사람 아브람"이 "하늘에 사람 아브라함"으로 바꿔치기 된 것이다.
땅 사람 아브람이 생산해 낸 자식은 쫓겨날 이스마엘이었지만, 하늘에 사람 아브라함은 천국에 갈 이삭을 생산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하늘에 사람이다.
이삭은 땅 사람 아브람이 죽고 하늘에 사람 아브라함으로 바꿔치기 당한 자의 다른 모습이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하는 자란 뜻이다.
이는 마치 요셉이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당한 야곱의 인생을 대신하여 살아간 약전과 같다.
창세기 37장 2-4절을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야곱의 약전이란? 야곱의 역사란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역사를 말하면서 요셉을 언급하는 것은 곧 요셉은 야곱의 다른 삶이라는 말이다.
즉 야곱의 이력에 요셉의 역사로 기록한 것은 요셉은 곧 야곱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야곱이 바꿔치기 당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알다시피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당한 사람이다. 옛날 사기꾼이고 얍삽한 약탈자인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로 새로 태어났다.
얍복강에서 죽임 당하고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의 삶이 곧 요셉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 할 때 약탈자 야곱이 아니라 요셉의 모습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을 꿈꾸어야 했다.
그러나 야곱은 야곱을 꿈꾸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야곱을 요셉으로 바꿔치기 하신 것이다.
요셉의 인생 속에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이는 곧 야곱은 예수님과 같은 자로서 선택이 되어졌다는 말이다.
야곱이 예수가 아니라 야곱 속에 하나님의 아들에 형상을 담아 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도를 하늘에 사람으로 바꿔치기 하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즉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는 한 어머니 뱃속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다.
그런데 어미 태로부터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둘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라졌다.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되고 태어났다.
그런데 이 둘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장자가 되기 위한 쟁투를 한다.
야곱은 뱃속의 쟁투에서 형 에서에게 지고, 차자로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도 억울하다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은 채로 장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태어났다.
이 장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은 자라가면서 구체화되어 본색을 드러낸다.
그래서 틈만 나면 형의 장자권을 강탈하고자 술수를 강구한다.
야곱이 장자권을 강탈하고자 하는 것은 장자권은 곧 세상에서 힘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선 힘이 곧 정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갖기 위하여 일생을 투자한다.
이런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성경은 "짐승의 나라" 라고 한다.
(다니엘서는 이 세상을 짐승의 나라라고 알려 준다. )
짐승의 세계는 힘의 원리로 다스려진다.
야곱 역시 짐승의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힘의 상징인 장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서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되어서 높은 자로, 섬김 받는 자로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욕망이 급기야 사술로 아버지까지 속여 장자권의 축복을 받아 내는데 성공한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담아 놓은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께선 야곱 속에 강자의 모습을 담아 놓은 것이 아니라, 요셉과 같이 형제로부터 버려짐(죽임당함)과, 자신을 죽인 형제를 용서하고 살려내는 모습을 담아 놓은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꿔치기 하시는 작업을 시작하셨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게 만드셨다.
이는 야곱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야곱이 바라던 것은 장자가 되어 아비의 유업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집에서 쫓겨난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 광야에서 찾아 오셨다.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옴으로서 야곱은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다. 소속을 알려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늘 사람으로 선택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앞으로 알게 되지만,,,
어쨌든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 생각하였다.
외삼촌 집에서 약탈자 야곱의 꿈을 이루어간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강자가 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의 모습으로서의 야곱이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야곱이 거부가 되고 세상의 강자고 되어도 하나님 앞에선 약탈자로서의 야곱의 확대일 뿐이다. 즉 야곱의 성공은 죄인으로서 팽창일 뿐이다.
이는 전혀 하나님이 기뻐할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죽임 당하여야 할 징벌 대상이다.
하나님은 죄인으로서의 야곱에 확장을 바라지 않고 야곱 속에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형상이 확장되기를 바라셨다.
야곱은 성도의 표상적 인물이다.
야곱이나 성도는 다 동일한 지평 아래 있는 자들이다.
야곱이나 성도는 살아가는 시간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공간 속에 있는 동일한 종자들이다. 동일한 땅이라는 지평 아래서 야곱은 구약에 살았고 성도는 신약에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성도 역시 야곱과 같은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강한 자로 남고 싶어한다.
자기 이름을 날리고 싶어한다.
불철주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복을 달라고 한다.
야곱과 같이 거부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땅 사람으로서 확장이 되는 것을 거부하신다.
땅 사람으로서 확장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가지고 성도를 하늘 사람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을 벌리신다.
하나님께선 성도를 선택 할 때 하나님께서 작정한 성도의 모습이 있다.
바울은 그 모습은 곧 "아들의 형상"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 하셨다.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미리 그려 놓은 모습이란 다름 아닌 아들(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 만들기 위해 성도를 선택하셨다고 한다.
형제란? 동일하다. 성도를 예수님의 형제라고 한다면 성도들 속에 예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의 형상으로 태어난 구약의 야곱이나 신약의 성도를 아들의 형상으로 바꾸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마귀의 형상으로 난 자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
마귀의 형상을 가진 자에게 복을 주면 마귀의 세계만 팽창되게 된다.
그럼에도 야곱이나 성도들은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한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음이 사랑인 것이다.
인간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들어주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이다.
어째든 야곱은 온갖 방법으로 자기의 뜻대로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하기에 이른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과 같이 약탈자로서 성공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주셔서 거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0년 전 아비 집을 떠날 땐 어린 약탈자였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른 약탈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20년 전 하나님께서 벧엘 광야에서 야곱의 소속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지만, 야곱은 여전히 땅 사람 야곱으로서 강해졌을 뿐이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거부가 되고 나니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졌다.
야곱은 급기야 사기를 쳐서 모은 재물과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 야곱의 인생은 순탄한 것이라고 믿었다.
당당하게 거부가 되어 성공한 모습을 부모 친척에게 보이고 싶어서 가슴이 벅차 오른다.
하지만 과거에 형을 속이고 집을 떠나 온 것이 마음에 걸려 두렵기도 하고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 전령을 앞서 보내서 형 에서의 동태를 살피라고 하였다.
전령들의 보고에 의하면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병사들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온 몸에 맥이 풀리고 만다.
야곱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이는 야곱의 예상 밖에 상황이다.
이에 형 에서를 만나 과거의 앙금을 풀고 살아 남고자 야곱 특유의 술수를 강구한다.
이름하여 뇌물작전이다.
이 세상에 재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리 살기 위해 뇌물을 바친다 하여도 좋은 것을 줄 수가 없다.
생각 끝에 가치 없는 것부터 앞세워서 에서의 환심을 사려고 작전을 벌린다.
가치 없는 것들부터 1중대 앞으로, 2중대 앞으로, 3중대를 앞으로 그리곤 자신은 맨 마지막에 선다. 혹시나 받지 않고 죽이겠다고 덤비면 삼십육계 출행랑 칠 생각이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오로지 자신만은 살기 위해서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쓴다.
참으로 야곱답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마귀 권세 아래 있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다.
그래도 불안하다.
형 에서가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명 사수가 아닌가?
사냥의 달인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본다.
하나님께 옛날 약속을 거론하며 도와달라고 공갈겸 탄원겸 읍소한다.
그러나 야곱의 이런 마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작전을 개시하신다.
간사한 모습의 야곱이 아니라 자기를 버려 대속제물로 주시고 섬기는 자로서의 하나님에 아들(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꿔치기 하시려고 얍복강에서 기다렸다.
뇌물들을 다 떠나보내고 난 후 얍복 나루에 야곱 혼자 남았을 때 하나님은 시비를 건다.
밤새도록 씨름을 하여도 순순히 응하지 않자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부셔버린다.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부셔 뜨려 병신을 만든 것은 사실상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곤 이름을 바꿔주신다.
넌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약탈자 야곱을 죽이시고 창세 전에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아들에 형상을 본받는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야곱을 바꿔치기 하심으로 죄인이 자기 꿈을 이루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징벌대상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선택된 성도가 마귀의 아들로 번성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는다.
반드시 징벌하시고야 만다.
이제 야곱은 얍복강에서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났다.
이스라엘이란? 마귀와 싸우는 자란 뜻이다.
즉 죄 아래서 난 옛 사람의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나"를 죽여야 할 자란 말이다.
"이스라엘"로서의 "성도"는 난 살 자가 아니라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이제는 세상의 힘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주신다.
강자가 되고 머리가 되고자 장자권을 도적질하였던 야곱이 얍복강을 통하여서 섬기는 자로 바뀐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 얍복강 사건은 마귀의 형상으로 난 야곱이 죽는 십자가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땅 사람 "야곱"은 얍복강에서 죽이시고, 하늘에 사람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넌 다른 인간이라는 의미로 새 이름을 주신 것이다.
마귀의 자녀 야곱이 아니라, 마귀와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스라엘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장자가 되어 섬김 받고자 하던 야곱이 얍복강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스스로 에서에게 머리를 조아려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자가 된 것이다.
십자가란 이렇게 전혀 다른 인간으로 바꿔치기 하는 창조의 능력인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이라는 십자가 사건을 통과하기 전에는 바리새인라는 장자권에 매료되어 힘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사울이라는 큰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버리고 "바울이라는 작은 자"로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나니 지금까지 금이야 옥이야 하던 세상의 자랑거리들은 한 낮 배설물에 불과 한 것임을 알았다.
예수를 모르고 지옥에 갈 죄인에게 수많은 재물이 다 무엇이며, 세상의 권세가 또 무엇인가? 모두가 허망한 것임을 다메섹에서 알게 된 것이다.
자기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떨어진 것이다.
비로서 새로운 눈이 떠진 것이다.
예수를 알고 나니 세상 것은 다 버려져야 할 것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육에 것들을 버리는 일을 한다.
세상의 가치로 보면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불쌍한 자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소유한 가장 부자이고 행복한 자라고 한다.
다메섹 이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완전하게 가치가 전도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육적으로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지만 십자가 안에서 보면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십자가 안에서 보는 세계와 십자가 밖에서 보는 세계는 이렇게 다르다.
십자가가 능력인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당하고, 사울이 바울로 바꿔치기 당하는 곳이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단행하신다.
하늘에 사닥다리를 보여줌으로서 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기다렸다가 성도에게 십자가 사건을 발생 시켜 인생을 바꿔치기 하는 일을 행하시고 계신다.
즉 성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일하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 가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바울은 성도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고 하였다.
이런 바울의 고백은 다메섹에서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서 사울에서 바울로 바꿔치기 당한 후에 하는 고백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 사울이라는 죄인으로 있을 때는 세상에 대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 바울로 바꿔치기 당하고 난 후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는 세상이 두렵지가 않다.
돈을 모르는 자는 돈 없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돈 없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돈에 대하여 많이 안 다는 것이다.
돈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돈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도가 세상 것에 목말라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땅의 것에 결핍을 느낀다.
난! 왜 이렇게 가난할까?
우리 교회는 왜? 부흥이 안될까?
예수 믿는게 기쁘지 않다.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으면 마음이 무간지옥이다.
사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야곱처럼 얍복강에서 살려달라고 떼를 쓴다.
결핍이라는 부족 분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
가난한 "나"가 아니라, 부요한 "나" 가 되게 해 달라고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그려놓고, 그 성공한 "나"로 만들어 달라고 주야로 하나님 앞에 시위를 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 할 수 없는 무저갱인 줄 모른다.
열심히 채우면 채워지리라고 생각한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차자로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장자가 되겠다고 투쟁을 한 것이다.
이런 야곱의 결핍은 네 명의 아내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야곱의 아내들은 자식을 한풀이식으로 생산해 낸다.
남편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투쟁을 한다.
자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한(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생산되어지는 자식들마다 한풀이식 이름들을 지어준다.
"하나님께서 내 괴로움을 들어주셨다"는 뜻에서 "르우벤"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한다"고 해서 "시므온"이라고 짓고,
"이제부터 남편은 나와 잠자리를 많이 해 줄 것"이라는 의미에서 "레위"라 하였고,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니 고맙다"고 하여 "유다"라 하고,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하여 "단"이라 하고,
"내가 형과 경쟁에서 이겼다"고 "납달리"라 하고,
"야! 내가 동생을 이겼구나" 라고 "갓"이라 하고,
"야! 또 이겼다"는 의미에서 "아셀"이라 하고,
"하나님이 내 빚을 갚아 주셨다"라고 "잇사갈"이라 하고,
"이제부터 남편이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고 "스불론"이라 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란 뜻에서 "요셉"이라고 하고,
"아! 너무도 슬프다" 라면서 "베노니(베냐민)" 라고 지었다.
자식들의 이름을 보면 참으로 인간의 욕망과 질투심이 무섭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자식들의 이름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맺힌 한(恨)을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의 12 아들들의 이름을 뜯어보면 모두가 하나님께 항변하는 내용들로 지어져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야곱의 한(恨)이 아내들과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이가 된 것이다.
결국 이런 한(恨)이 골육상잔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는 과거 야곱이 에서가 장자권을 놓고 벌리던 투쟁과 동일하다.
이런 모습은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대로 녹아져 있다.
교회마다 이웃 교회보다 더 부흥시켜 달라고 아우성이다.
옆에 교회가 부흥되면 배가 아파 잠이 안 온다.
그래서 교인들을 닦달해서 전도해서 사람들을 끌고 오라고 한다.
새벽마다 또는 밤새워가면서 때로는 산에서 금식하면서 채워달라고 하늘에 대고 온갖 공갈과 협박을 하면서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심지어 결핍을 채워주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고 40일씩 금식하는 놈들도 있다.
이러한 것이 개인적으로 돌아오면
자기 가정 잘되게 해 달라고 하고,
자기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자기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자기 출세시켜 달라고,
자기 성공하게 해 달라고,
자기 돈벼락 좀 맞게 해달라고 한다.
하나님 정말 이러실 것입니까?
이 정도 소원도 좀 들어주지 않느냐고 따지며 협박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얍복강에서 야곱을 부셔버리고 이스라엘로 바꿔치기 하시듯이 성도들을 바꿔치기 하시는 일을 행하시고 계신 것이다.
성도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성도의 인생을 바꿔치기 하시려고 하나님은 어김없이 얍복강에서 기다리신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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