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이글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차이점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글로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다.

동방교회입장에서 쓰여 올려진 글을 약간 수정하여 제공한다. 좋은 이해를 기대한다.

1. 교회의 분열

 기독교가 건설된 후 세계의 교회는 카톨릭교회라는 큰 조직 안에서 성장해 왔는데 카톨릭교회는 정치적 문화적 배경과 교리적인 문제, 성직자의 결혼과 안수 등의 문제 때문에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은 동서 교회로 분열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동과 서로 지역을 중심해서 분열이 되었는데 서쪽 로마는 서방교회로서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되었고, 동쪽지역의 동로마는 동방교회로서 헬라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로 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두 교회는 새로운 길을 가면서도 하나되기 위하여 수백년동안 교리적인 문제에 관하여 투쟁을 하여 왔지만 결국 하나되지 못하고 영원히 분열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분열을 가져오게 된 그 원인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로마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는데 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동서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그 원인중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문화적인 문제이다. 당시 동쪽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동방교회는 언어적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레니즘 문화 속에 지중해 연안에 분포되어 있는 기독교회들이라면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북서지방과 아프리카 서북지방의 교회들로서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도 분열의 큰 원이되 되었다. 또한 인종적으로도 동방교회는 슬라브인과 서방아시아의 민족들이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에 동양적인 요소가 있었고 그들의 신앙역시 서방교회와는 달리 내세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인종적인 면에서 고트인과 게르만족 민족들의 새로운 피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서 오는 생활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서방교회는 그들의 신앙은 현세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복하기 힘든 부분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세째로 사상적인 문제를 들 수 있다. 그 이유로서는 동로마의 동방교회는 헬레니즘의 지식문화를 통하여 교리중심(敎理中心)의 교회였다. 그런가 하면 서로마의 서방교회는 현실을 중요시하는 제도중심(制度中心)의 교회였다. 이처럼 두 교회는 사상적으로도 맞지를 않았다. 동로마교회가 헬라의 학문적 정신으로 점점 사색과 철학, 형이상학적 신학(形而上學的神學)을 형성해 나간 반면, 서로마교회는 로마의 법률과 정치적 천재성의 영향으로 교회 안에서의 구원론은 행위를 중시하는 자체구원을 주장하였다.1) 이처럼 동서 교회의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들이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사이에 얽힌 교권의 싸움 때문이 큰 목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넷째는 성상 숭배이다. 성상 숭배란 당시 기독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믿음의 선진들의 사진이나 성화를 교회 안에 걸어 두게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숭배의 대상에까지 오르게 도는데서 문제가 시작이 되었다. A.D 7세기 전까지만 해도 동서방교회는 그리스도, 사도들, 성자 및 순교자들의 초상화나 성상들을 회당에 많이 걸어두었던 것이었다. 성상들을 회당 안에 걸어 두게 된 이유는 믿음이 없는 신자들이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것이 후일에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숭배의 대상을 넘어 지나친 예배의 대상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레오(Leo) 황제는 회당내의 숭상철거에 대한 칙령까지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교회는 성상숭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급기야 철거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찬반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급기야는 그 일로 인하여 동서방교회가 분리되는 원인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동방교회는 끝내 성상숭배를 반대하고 반면 서방교회는 성상숭배를 찬성하게 됨으로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방교회는 그림정도로 이것을 대체하고 있다.

다섯째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당시 양 교회는 언어와 사고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인 결과로 인해 신학적으로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동방의 헬라신학에는 소아시아 학파의 에이레나이오스(130-200)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 오리겐과 같은 학자들이 있었는데 오리겐은 (185-245) 대 학자중의 학자였다. 서방교회의는 카르타고로부터 라틴신학이 시작되었는데 신학자는 라틴신학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터툴안이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주었다. 터툴리안의 후배로 목회신학자 키푸리안이 있었는데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에는 인구의 10퍼센트가 기독교도로서 그리스도인의 세력은 로마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 힘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는 아직 교리적인 체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쟁과 갈등은 계속되었다. 4세기초엽 교회 안에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신조도 정식으로 공인이 되지 못하였고 A.D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알렉산더가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다. 같은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의 삼위일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아리우스는 성부는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 뒤에 오는 것이요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오직 하나님 뿐이다라고 주장을 하며 예수는 피조물의 첫째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아리우스는 교회에서 파문당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제국의 교회는 둘로 갈라지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여섯째는 부활주일의 날자 문제였다. 동방교회의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니산월 14일에 지켰고 서방교회는 그리스도가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중시하여 춘분후 만월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지키고 있으면서 그 문제를 오랫동안 해결을 하지 못하다가 니케아 회의에서 서방교회의 제안을 채택함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25년 니케아 전역에 교회 대표들을 소집하는 니케아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내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하여 니케아 총 의회를 소집하였지만 결국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인 속셈도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될 수만 있으면 많은 감독과 주교들을 참석하게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소아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멀리 스페인까지 소집통지를 보냈으나 총318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때 처음에는 아리우스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초안이 제출되었으나 즉시 부결되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ꡒ유사본질ꡓ(homoiousios) 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오리겐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성자를 하나님(    )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그 하나님(      ) 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함으로써 제2신(             )이라고 까지 불렀다. 성자의 발생은 하나님의 필연적 행위가 아닌 주권적 의지에서 나왔으며 성령은 성자가 창조한 피조물중의 하나로 보았다. 이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295-373)는 삼위일체로서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질"(homoousios)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회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 중간파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는 오리겐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아리우스파에 기울어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교리를 반대하였다. 상당한 기간 동안 토론이 있은 후  황제의 권위에 의해 동질ꡓ이라는 말을 지지함으로 니케아 신조에 성자와 성부는ꡒ동질ꡓ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삼위일체의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완성하여ꡒ니케아신조ꡓ를 만들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379-395)는 이때 공동 신앙칙령을 반포하고 니케아주의 정통파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381년에 아리우스파를 완전히 이단으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교회 내에는 계속적인 분쟁의 불씨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문제가 해결이 되자 또 하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가 생겼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451년의 칼케돈 총회의에서 칼케돈 신조로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사람이다"(vere Deus et vere homo)라고 하는 교리가 확립되었다. 부활주일의 문제도 니케아회의에서 ꡒ춘분 후 첫 만월후의 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해졌는데 이것도 교회의 통일에 큰 힘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사망한 후 395년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으로 결국 분리되고 말았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동방세계는 멀리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 정책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의 풍조 밑에 있으면서 서방의 라틴문화의 세계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서로 발달해 왔고, 언어적으로 동방은 헬라어의 지역이고 서방은 라틴어의 지역이었다.  결국 동서교회는 타협의 길을 찾지 못하고 동방교회는 회랍정교회로 그리고 서방교회는 로마 카톨릭교회로서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이름

1) 동방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를 크게 3가지로 구분하여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눌 수 있다.

정교회는 동방정교회 또는 희랍(헬라)정교회라고도 부르는데 모두가 같은 말이다. 동방 정교회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유럽동쪽 그리이스, 불가리아, 폴란드, 러시아, 체코 등에 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는 것이고, 희랍(헬라) 정교회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 신학사상과 교리가 희랍(헬라)어로 되어 있으며 희랍철학적인 요소와 신플라톤주의, 신비주의, 수도원주의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교회라고도 부르는데 그 것은 자기들이야말로 정통교리를 수호하는 진정한 교회라는 자부심에서 그렇게 부른다. 정교회란 정통교회(正統敎會 Orthodox Church)의 줄임 말이다.  

2) 서방교회

로마카톨릭 교회란 이태리 로마에 있는 바티칸 교황청의 지휘를 받는 교회로서 서방교회라고도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 교회라고도 불리는데 같은 말이다. 서방교회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교회들이 주로 서유럽의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등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교리도 로마 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서방교회는 언어 자체가 동방교회와 다르다.

3. 교회의 확장

원래 기독교회는 하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이후 10일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기독교회의 공동체가 시작이 되었다. 이 교회들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와 로마,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주후 300년 경에는 기독교 공통체가 다섯 개 교구로 조직화되었다. 주로 대 도시를 중심해서 교구가 만들어 졌는데 로마대교구, 콘스탄티노플(Byzantium, Istanbul) 대교구, 알렉산드리아 대교구, 안디옥 대교구와 예루살렘 대교구 등 다섯 개 대교구로 구성이 되었다.

다섯 개 대 교구는 서로 협력하며 사이좋게 지내오다가 주후 1054년 거대한 힘과 능력을 소유한 로마대교구의 교만으로 인하여 동서방교회가 두 조각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로마 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로마 카톨릭교회는 서방교회로 나머지 4개 교구는 동방 정교회로 분열이 되고 말았다.

에베소 총회(451) 이후 동방교회가 터키군의 위협을 받아 서방교회에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두 교회는 서로 관계없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정교회의 '신앙의 철학'과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율법'의 차이가 두 교회를 멀게 한 것이다.

전자는 정통교리를 강조하였고 후자는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제도적인 교회(마 16:19)를 가르침으로써 가톨릭교회가 제정하는 모든 사상, 제도, 조직, 의식, 경험, 생활 등은 다 참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남아있다. 예전은 7가지를 예배 시에 악기사용과  교회 내에서 성상사용을 금했다.

15세기에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자 Santa Sofia 대감독이 러시아에 피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애굽, 시리아 등 14개국의 연맹을 조직하였다. 제도상 정교회는 성직자로 불리우는 대감독, 감독, 신부, 장로, 집사 중심의 전제적 교회로서 총회나 지방대회의 결의를 따른다.

4. 동방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

로마 카톨릭의 서방교회는 서유럽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발전에 힘입어 계속 발전되고 확산되어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과 필리핀 등지로 확신되었으나 동방교회는 동쪽 유럽이 아라비아의 모슬렘에 침공을 받아서 거의 쑥밭이 되었고 두 번째는 몽고족들의 침공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어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20세기 초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동유럽을 70년 동안 지배하는 바람에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사실 동방 정교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종교로 낮이 설지만 사실은 그 신앙의 뿌리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우리의 형제들이다. 우리는 정교회를 바로 알고 앞으로 공산귄들이 열리게 되면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5. 동방교회의 한국선교

동방교회가 한국에 들어와 활동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1897년 재정러시아 소속의 교무원인 암부로시우스 신부가 내한하여 정동의 러시아 공관 내에 임시 성당을 설치함으로 한국선교가 시작이되었다. 1900년 2월 2일 성당의 이름을 성니골라이 성당으로 이름하였고 1912년에는 러시아 교무원의 후원으로 성당 부설 보정학교(普正學敎)를 건립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가 1919년 러시아의 혁명으로 인하여 선교비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학교와 자선활동이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1948년 8월에 한국의 김의한 신부의 주관하에 교회의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는데  6.25 사변의 전란으로 김의한 신부가 납북됨으로 또다시 교회의 재건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김의한 신부의 남북으로 인하여 중단 되었던 러시아 정교회는 1953년 11월 한국동란에 주한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그리이스의 군대에 의하여 그리이스 정교회 관구 소속의 교회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리이스 소속의 정교회는 1968년 교회의 위치를 현제의 북아현동으로 옴겨 교회를 건축 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그리이스 정교회의 뉴질랜드 대관구 소속이 되었다가 다시 1975년 12월 1일에는 주관신부인 트람바스 신부가 그리이스로부터 와서 주임 선교사 겸 주임신부로 사역을 하였는데 트람바스 신부는 1992년 주교로 승품 되었다.

그리이스 정교회의 중요 교리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성경과 신조를 기본 정경으로 하고 교회의 직제도 그대로 계승하여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이스 정교회는 교회가 분열되기 전부터 보존하고있는 교회의 성사를 기본신조로한다. 또한 임원으로는 종교위원회 회장 박순호와 위원으로는 김파벨, 전익수, 이인수, 김정옥, 등이며 성당 1개소와 교직자 2명, 교인수는 남자가 420명 여자가 505명으로 925명의 교세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대표자는 트람바스 주교신부이며 성당의 주소는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424-1호이고, 그 외에 부산, 인천, 전주, 양구, 등에 성당이 있으며 경기도 청평에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어 있고 지방도시에 특수선교를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을 계획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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