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기도문에 대한 개괄적 이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본문의 '뜻'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델렘마(qe,lhma)인데 이 말은 'will' 즉 '의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소원이란 말이다.마12:50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엡5:17에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그러면 우리가 이해하고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인가?   첫째, 살림 곧 인간의 구원이다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지으신 만물의 회복이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일은 인간을 살리는 일이요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하나님의 뜻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요 3:16)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구속의 피 값으로 속전되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 되는 것이며(잃은 양, 드라크마, 탕자 비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3)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잔치자리에 초대받은 자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예복이다.                            하나님부르심 : 인간의 구원 ↙↗ 응답 : 우리의 거룩함                             인간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내 몸에 체현(體現)해 내는 것이다. 이 응답 곧, 우리의 거룩함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 난다. 아무도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입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인 셈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성취이다.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를 부르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나라에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왔으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으며 또한 하늘로 올리우신 그 예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이 과거와 미래의 한 지점 즉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그 나라를 일구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지금 여기'라는 시점은 단순히 시제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신앙고백적 삶 전반에 걸친 '전인적 지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궁극적으로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지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장차 성취될 하나님나라 도래의 사건을 현재적 사건으로 보게 하는 렌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간구는 믿음의 눈으로 보고 '지금 여기'에서 그 나라를 일구고 동시에 그 나라에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그 이유는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그 분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의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성도의 현재의 삶이 미래의 삶을 지시한다.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이란 밭을 주셨다. 이 밭은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밭이다. 이 밭에서 거둘 열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열매이다.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부르시는 '소명'(calling)에 응답하여 충직한 청지기로서 '지금 여기에서' 그 나라를 일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그 잔치가 오늘 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히 드릴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는 "하늘과 땅"이라는 우주적 표현을 통해 드려진다. 고대 근동지역과 구약에서 "하늘과 땅"이 병행되어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할 때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 기원이나 종교의 현상학(現象學)적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개인적, 내면적 차원에서 배양된 신앙이 우주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묘사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나라인 것이다.

샬롬은 '완전하다' '건전하다' '온전하다' '전체적이다'라는 뜻이 있고 '복지' '조화'라는 뜻과 함께 구약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샬롬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 분열이 없는 통일된 상태,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것을 뜻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계약을 어기지 않고, 깨지 않고, 잘 지켰을 때 평화이다. 영적인 완전성을 의미한다. ... 완전하고 건전한 삶이다. 생명이 충만한 상태이다. 삶이 조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

평화로운 민족은 나뉘어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차별이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평등이 있어야한다. 자유가 있어야 한다. 또한 경제적인 번영도 있어야 한다. 구약에서 때로 경제적 번영을 평화라고 부른 경우도 있다.(대상 4:40, 22:9 등) 정치적인 안보 역시 샬롬이라고 했다. (왕하 20:19 사 32:18) ... 인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화 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계약을 잘 지켰을 때 평화가 주어졌다. (렘 26:6, 겔 34:25) 모든 평화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평화의 조건은 하나님의 현존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올바르게 지킬 때 거기에 의가 존재케 되고 따라서 샬롬 평화가 깃들게 된다. 여기서 평화와 정의가 직결되고 있다."

부연하면 "'평화'라는 말로 번역되어 온 히브리어, '샬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게 '전쟁의 종식'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이른바, 매우 제한된 의미의 소극적인 '평화(eirene)'개념과는 다른 성서 특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 히브리 성서가 평화 이해를 위하여 취하였던 기본적인 사유형식은 특이했다. 즉, 물리적인 방법에 의하여 인간이 이룩한 전쟁종식이 인간 사회에 항구적 평화를 결코 가져다주지 못하였다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역사 이해가 히브리성서 기록자들을 처음부터 이미 사로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대조되는 반의어(antonym)'로서의 평화개념은 히브리말 '샬롬'의 매우 제한된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실로 예언자 예레미야가 지적한 바와 같이 '평화로다. 평화로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평화가 없는 것이(렘 6:14) 바로 다름아닌 인간 역사의 실존적 현실이다. 말하자면 '샬롬' 은 '전쟁의 물리적인 휴식'만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의 종식과 정의와 진실의 구현도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 히브리성서 기록자들의 확신이었다."

존 매쿼리(John Macquarrie)는 그의 저서 '평화의 개념'에서 구약성서의 평화에 대한 이해의 본질적인 것은 정의(正義)라고 말하는데 더 나아가 주재용교수는 '샬롬에는 화해, 자유, 희망의 세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없이는 이룩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고 동시에 화해케 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인간과 세계 안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화해의 역사로써만이 가능하다. 샬롬의 다음 요소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자기로부터 자유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빌2장)

사랑하기에 자기를 전부 내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자세였고 그것이 십자가의 모습이었다. 고난을 자기의 고난으로 받아들일 때 고난에서 해방될 수가 있으며,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죽음에서 자유할 수가 있다. 우리가 고난에서 자유할 수 있고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과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 자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자를 위한 존재만이 아니라 타자 그들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참자유인의 모습이다. 샬롬은 이 자유에 의해서 이룩되는 질서인 것이다. 샬롬의 세번째 요소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오늘에서 내일에로의 차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일에서 오늘로 오는 차원도 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샬롬은 구약성서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의 목표이었으며 이와 같은 사상은 예수를 통하여 신약시대에 이미 성취되었고 사도들과 바울을 통하여 기독론적으로 증거되었던 평화의 사상은 종말로부터 현재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영원으로부터 유한(有限) 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적 평화이다.

 

평화에 대한 또 다른 표현, '에이레네'

"신약에 나타난 희랍어 평화는 구약의 샬롬의 개념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원래 희랍어는 라이벌 그룹 간의 다툼이나 미움이 제거되거나 중지될 때 사용된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개념에 구약의 샬롬개념을 집어넣어 쓰게 되었다. 더구나 신약시대에 이 말이 성도들간에 인사말로 쓰였던 것이다. 예수나 바울이 첫 인사를 그 말을 써서 했다. 특별히 엡 2:14-17에서 평화란 말이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화해, 이때까지 극한적으로 대립되어오던 두 그룹간의 화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두 대립 그룹간의 화해에 쓰여지고 잇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복음에 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산상교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같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선언했다. 평화를 위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시고 평화 때문에 죽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룩하였고 다음으로 인간들 상호간의 화해를 이룩하였다. 인간 가운데 놓여 있는 갈등, 시기, 질투, 미움, 경쟁 등을 제하고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일이 예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요한1서 2장 17절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다. 이 땅과 땅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할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샬롬'의 나라, '에이레네'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생각을 여는 질문

1. 지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2.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당신의 결단을 써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에 대한 바른 해석은 다음의 몇 가지 전제를 이해할 때 가능하다.이 말은 우선 1세기의 일용 노동자들, 매일의 급료로 생활해야하는 궁핍하고 불안정한 이들을 염두에 둔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자들에게 이 기도는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현실의 삶에서 굶주림을 해결해야 하는 당시의 수많은 민중들에게 이 기도는 삶의 문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현실적 기도가 되는 것이다.두 번째로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나누게 될 빵'으로 해석될 수 있다.예수는 이 기도에서 분명히 1세기 일용 노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실제적 필요에 마음을 주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현실적 요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예수는 이미 그의 공생애 초기, 사막에서의 유혹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언한 바 있다.그러므로 이 기도의 두 번째 차원은 현실에서부터 다가올 새로운 현실 즉, 예수의 말씀안으로 들어 온 하나님나라와 그의 강림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누릴 온전한 삶, 즉 궁핍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온갖 차별과 불이익이 없는 신천지(新天地)를 구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양식'에 대한 세 번째 견해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매일 먹는 '성례전의 빵'이라고 할 수 있다.성례전은 하나님나라 잔치의 모형이다. 우리는 이 잔치에서 예수의 살을 먹음으로써 예수의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는 '성례전의 빵'은 단순한 물(物)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인 것이다.이 빵이 독점될 때 그 빵에는 생명의 가치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만나'를 내려 주시는 광야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이 빵은 나눠져야 하고 그 나눔의 자리에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잔치가 배설된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완성에 대한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나눔을 전제한다. '나'와 '너'의 양식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적 구원의 독점사상 즉 선민의식을 뛰어넘는다. 복음은 보편적인 모든 죄인 즉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구원의 능력이다. 생명의 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이 빵을 구하는 일만큼 간절한 것은 없다.위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다양한 이해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해석들이 그 의미가 서로 상충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오히려 우리 기도의 자리가 위의 의미들이 통전적으로 융합되는 한 지점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본문의 참뜻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을 여는 질문1. 오늘 당신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2.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내가 가진 양식은 무엇입니까?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