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기도문에 대한 개괄적 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캠블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우리는 신구약의 두 곳에서 우리 기도의 모범을 찾을 수 있다."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시115:1)"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12:28)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유대적 전통에 의해서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인격을 보여주고 그 사람의 존재(Being)와 가치(value)를 드러낸다. 창 2: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들을 이끌어 오게 하시고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구별하는 호칭을 주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동물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하게 하신 것이다.성경에는 하나님을 소개할 때 '여호와'( hw:hy 예호바)라는 이름으로 7,040회, '하나님'(@yhla> 엘로힘)으로 4,000회, '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엮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무수히 기록된 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성전이나 회당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예배에서 부득불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거나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① 목욕을 하거나, ② 오랜 기도 후, ③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으며 ④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침묵(沈默 or 默音)으로 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입으로 부르는 것조차 불경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저 '주님'(yn;doa} 아도나이, Lord)이라고 만 부를 수 있었다.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 성품과 사역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1) 존재와 관련해서 ① Jehovah, YAHWEH :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계시하며 가르쳐 준 가장 신성한 이름
② Elohim : 경외와 권능의 하나님 ③ Elyon : 예배와 존귀를 받으시는 높으신 하나님 ④ El-Shaddai : 족장들을 향한 위로와 축복의 하나님 ⑤ Adonai : 모든 인류의 주인이며 통치자 ⑥ 예호바 엘로힘 짜바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2) 사역과 관련해서 ① 하르 예호바 라아 - 준비하시는 여호와 ② 예호바 로프에하 - 치료하는 여호와 ③ 예호바 닛시 - 승리의 깃발이신 여호와 ④ 예호바 삼마 - 거기 계신(현실 속에 계신) 여호와 ⑤ 예호바 샬롬 - 평강의 여호와 ⑥ 아싸 예호바 - 일을 행하는 여호와 ⑦ 쿤 예호바 - 성취하는 여호와 ⑧ 예호바 라하 - 목자되신 여호와 ⑨ 쩨다카 예호바 - 의로우신 여호와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 분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시고, 삶의 의미가 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 삶에 내려와(incarnation) 친히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이다.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에게는 승리가 있고 구원이 있다.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그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말 2:2)본문에 사용된 '거룩'(a`giasqh,tw)은 [구별되다]는 뜻이다.'거룩'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v/dq; 카도-쉬:}, 헬라어로는 {aJgiavzw, 하기아조}를 쓰며, 정결되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피조물과 그 거룩함에서 구별되는(聖別)되는 창조주요, 다른 신들과 구별된 참 신(神) 여호와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성스럽고 위대하다'로 설명하고 있다.철학자 파스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잠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한다.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아래 놓여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높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는 고전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설명한다. 우리 생활의 전 영역 즉, 지, 정, 의 곧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인 신앙을 극복한다. 이것은 고백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에수님은 마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시96:8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라고 말씀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전된 부패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화(神化)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여야 볼 수 있고 드릴 수 있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영광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으로써 성별되고 흠없는 제사를 드리게 되고 이런 희생(sacramentum)의 제사가 삶에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질 때 유일회적이고 완전한 제사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할 때 이는첫째,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고백이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피조물은 어떤 것이라도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아담의 타락은 이 질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교만에서 비롯되었다.둘째,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뜻이다.시편 14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저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기만 하면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라는 어이없는 착각이 만연해 있다.제 주장을 입증하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199년 후반기를 들끓게 했던 옷로비 사건을 통해 이런 모습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었다. 세 명의 크리스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면서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이다.이런 사람들은 종교는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현존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없다. 다시말해 그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비록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가증한 소행을 일삼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탄의 올무에 잡힌 사람들이며 죄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야 할 기도의 제목은 무엇일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생각을 여는 질문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2. 내 삶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높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3. 내게 있어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1. '나라'(Kingdom)의 두가지 표현본문은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말할 때 헬라어의 basilei,a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서를 볼 때 이 '나라'는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라는 표현이다.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병행되는 이 두가지 개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는 하늘나라를 30번, 하나님 나라를 3번 쓰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16번, 누가는 32번 쓰고 있으나 하늘나라라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고 있다. 우리가 마태 19:23, 마가 10:23과 누가 18:24을 비교해 보면 이 두 개의 말이 같이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그렇다면 왜 같은 의미의 말이 이처럼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말해 거룩한 이름에 대한 경외심이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마태가 그 중 가장 유대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 것이다.2. 하나님 나라의 의미헬라어의 basilei,a(바실레이아)는 왕권 혹은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여기서 사용되는 '나라, 왕국'이라는 말은 일반적 의미로 말하는 '영토'의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통치권이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란 땅의 임금이 통치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며 지배이며 최고의 통치를 하시는 상태요 상황을 말한다.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견해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그 첫째는 현세가 모두 악한 세대이며 도움도 희망도 고침도 바라볼 수 없는 이른바 악의 세계에 넘어간 세대이지만 내세는 완전히 선한 시대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시간과 이 세상에 개입하셔야만 가능하다. 혼돈과 고통과 진통 속에서 하나님이 최고의 주인이 되시는 새시대가 동터 온다는 것이다.둘째는 하나님의 통치가 느린 과정으로 실현된다는 사상이다. 즉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데 그 날까지는 사람들이 더욱 더 율법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4.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주의 기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함과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복음서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것으로 종종 묘사되고 있다. 이 나라는 역사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마20:1-16 ; 포도원의 일꾼 비유, 마22:1-14 ; 혼인잔치초청 비유)둘째,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상태이며 획기적인 것이며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에서이다.마 18:3-4은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다.이 역설(paradox)은 '존재의 전이자(轉移者)'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에서 크다 일컬어지는 구성원으로서 그 나라에 사는 것 뿐 아니라 '천국 자체'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이의 전형(全形)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어린 아기로 오셨고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셨으며 지극히 존귀한 자기를 비워 비천한 인간이 되셨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 그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었다. 둘째 아담인 것이다.셋째,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아직도 오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미래적인 것이다.(마 25:1-13 ; 슬기로운 다섯처녀 비유)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서 현재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생애 속에 온다는 것이 예수의 약속이었으며,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것으로 마시겠다는 것이 예수의 희망이요 믿음이었고, 예수는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5.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예언자와 족장들이 들어가는 곳이며, 현재 사람들 속에 또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가 주어진 나라요,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 직접적인 결과요, 동시에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큰 관계를 가진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주기도문 가운데는 두 가지 기원(祈願)이 나란히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히브리 문체의 가장 일반적인 특색은 병행법이다. 서술을 병행형으로 반복하는 것은 유대의 시 문체의 특징이다. 두 번째 구절은 첫 번째 구절을 확대하고 설명한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다.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눅17: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현세에서부터 천국이 벌써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중요시하신 말씀이다.그런데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적 임재와 통치가 우리의 생활에 이르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한다.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는데. 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qe,lhma)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 ; 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 26:42)이 포함되어 있다.그렇다면 이 나라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1)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기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2)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그 나라를 개인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하나님이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3)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하였다.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열심이 그것을 가능케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인정하는 열려진 가능성 아래서 이 나라는 인간에게 미래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4) 이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왔고 예수를 통하여 이해 가능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예수에게서 구체화되었고, 예수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는 단순히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한마디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아모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사11:6-9)하고, 이 땅에서 "다시 사망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은" 나라, 질병과 사망과 눈물과 아픔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아픔이 없고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나라이다.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첫째,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주님은 그 나라가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고 하셨다. 타계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현실에 매이는 물질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교회의 물량주의와 성장에 대한 강박, 보이는 것 즉 예배당의 건물, 사람의 숫자, 현실에서 누리는 복에 대한 집착 등은 하나님나라를 만져지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물화(物化)한다. 여기서 물질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결코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물질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극복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한한 인간의 세계에 묶어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세계를 초월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게신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셋째, 그 나라는 우리 안에, 내 안에 있다.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마음과 그 마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임재이다.삶과 가치관이 바뀌고 내면의 변화가 넘쳐 삶의 열매로 맺어질 때 그 나라는 내 속에 있으며 관계의 세계에서 사랑하며 용서하며 인정하며 용납할 때 하나님 나라는 움트고 자라나 그 마음과 공동체의 한복판에 채워지는 것이다.눅17: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보게되는 것이다. 생각을 여는 질문1. 이 땅에서 일궈야 할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2.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일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누구이겠습니까?